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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의전병원에 있었던 관계로 전화로 당직인 친구를 불러내가지고 당장 입원을 시키고 밤을 도와 수술을 하게 되었다. 약관 조덕기의 한마디 말이지마는 친석지가 된 조덕기의 소개다! 범연할 리가 없다. ....

아침 한 차례 판 후에 경애가 틈을 타서 집과 바커스에 다녀오기를 기다려 필순은 병원으로 뛰어가 모친과 교대를 하였다. 그때까지 병화는 경찰서에서 나오지 않았다.  필순은 병상 앞에서 지키고 앉았다가 부친이 잠이 혼곤히 드는 것을 보고, 가만히 나와서 유리창 밖으로 길거리를 내다보고 섰었다. 마주 보이는 것은 개천을 새에 두고 부연 벌판에 우뚝 선 옮겨온 광화문이다. 날이 종일 흐릿하여 고단하고 까부러지는 필순의 마음은 한층 더 무거웠다.   무슨 연들을 개천 속에서 날리는지 두 패 세가 조무래기들에게 휩쓸려서 법석들이다. / .. (중략)...
눈물이 핑 돌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유리창에 물이 묻었는지 눈에 눈물이 가렸는지 어른어른하며 비스듬히 아래로 양복 입은 덕기가 종친부 다리를 건너서려는 것이 내려다보인다. 가슴의 피가 머리로 쭉 솟는 것을 애써 가라앉히며 필순이 눈물을 살짝 씻고 내려다보니, 덕기는 벌써 다리를 건너 섰다. 여기서 먼저 알은 체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어버렸다. 유리창을 열고 손짓을 하여 보이며 반기는 웃음이 인사 한 마리라도 내려보내고, 아래서는 되받아 올려 치치고 하면 그 얼마나 운치 있는 일이요 유쾌한 일이랴마는 지금의 자기 처지는 그러한 화려한 행동을 막는 것을 필순은 잘 요량하고 달뜨려는 제 마음을 걷잡았다.
....

덕기는 경찰부에서 독감이 도진 것을 참고 지냈다. 병을 감추어 가며 참고 있었다. 약을 사다 달라거나 하면 병 핑계나 하려고 엄살하는 듯이 알 것 같아서 도리어 내색도 보이지 않고 근 일주일이나 지내왔었다. 실상은 그보다도 걱정이 태산 같아서 해가에 신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쯤이야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부친의 소식, 금고 속, 집안에서 걱정들 할 것, 필순의 소식, 병화의 고초... 생각하면 몸 아픈 것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집에 잠깐 끌려갔다가 온 뒤로 신열이 부쩍 더하여져서 몸을 제대로 가누고 앉았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훈련원 벌판 같은 유치장 속에서 또 이틀 밤을 새웠다. 그 이튿날 아침에 불려나가다가 유치장 턱에서 쓰러져버린 것을 그대로 끌려갔는데 요행히 고등과장이 부른 것이기 때문에 뒤틀린 눈자위와 말 더듬는 것을 보고 서둘러주어서, 의사를 불러다 뵈고 저희끼리 의논을 하고 한 뒤에 말하자면 고등과장이 책임을 지고 의전병원으로 옮겨다가 가둔 것이다. 
물론 집에는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병원에서는 경찰부의 유치인 하나를 맡아서 치료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사는 육장 하나가 와서 머리맡에 지키고 앉았는 것이다. 그 외에는 모친과 아내가 돌려가며 와 있을 뿐이요, 아무에게도 면회를 허락지 않았다. 필순의 부모가 한 병원 속에 있고 필순의 모친이 어제야 소식을 듣고 찾아왔건마는 만나 보이지 않았다.

....
[종로서에서 나온 덕기가 화동의 부친(조상훈) 집에 들렀다가:주] 그는 지금 필순을 만나러 소격동으로 돌아 의전병원으로 가는 길이다.
'--할아버니께서 일흔이 넘어 돌아가셨으면 일찍 돌아가신 것은 아닐 거요, 결국 우리의 뒷받침이 늦은 것이다. 우리가 아무 준비도 없기 때문에 불과 두 달에 이 모양이다!

덕기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늘 하는 버릇으로,
' --병화란 놈이 내 처지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꾸?'
하고 돌려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나 결국에 별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괄기에 아무 생각 없이 활수 좋게 돈을 뿌려버리거나 할지는 모르지마는 이러한 혼란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병원 문 앞으로 다가가며 필순이 내려다보는 것 같아 눈이 저절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언젠가 필순이 위층에서 내려다보다가 문간까지 마중 나오던 것이 생각난 것이다. (염상섭, 『삼대』, 1931)


▲경복궁(옮겨진 광화문) 동쪽 중학천 건너편의 의전병원


▲경복궁 동편으로 옮겨진 광화문, 중학천과 종친부 다리


▲1930년대 경복궁(광화문), 중학천, 의전병원 일대의 경성지도


▲경복궁 동편으로 옮겨진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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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십자각(소격동 입구)

종엽이는 중학동 정류장 앞까지 가서 주춤 서며 위아래를 홰홰 돌려다본다. 태섭이는 최후의 희망이 끊어진 것을 볼 때 얼굴에는 기름땀이 쭉 솟는 것을 깨달았으나, 두 손에는 식은땀이 흥건히 괴었다. 거리가 한 간통이나 되자 그제서야 종엽이는 획 돌아다본다. 눈길이 번개같이 이어졌다가 툭 끊어졌다. 태섭이는 모른 척하고 안국동을 바라보고 돌아섰다. 뒤에서 종엽이가 웃는지 우는지 그것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종엽이의 두 눈길은 태섭이가 그렇게 느낀 거와 같이 언제까지 멀리멀리 태섭이의 잔등에 업혀 왔다. 이 여자는 지금 울지도 않고 노기도 스러진 얼굴로 휙 돌아가는 것을 보자, 난데없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더욱이 저녁때 찬바람에 불려 나가는 쓸쓸한 뒷모양을 바라볼수록 가엾었다. 그러나 쫒아가서 붙들기는 싫었다. 이편에서 먼저 수그러지기가 싫었다. 그 외에는 아무 까닭도 없다. 아까 나올 때 들은 그 욕도, 지금은 잊어버렸다. 다만 먼저 화해를 청하기 싫은 악지가 남았을 뿐이다.
전차가 오자, 종엽이는 홱 타버렸다. 태섭이가 가는 편에 등을 두고 앉아서 다시는 내다보지도 않았다.
 
[...]
"바람이 또 이나 보이."
두 여자는 소격동 천변으로 나서며 외투깃을 올렸다. 누구나 칠팔분 파흥이 되어서 나갈지 말지 하는 어정쩡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문경이는 봉익이의 집을 찾아간다는 새로운 흥미에 그래도 발씨가 급하였다.
"날씨는 이래두 눈은 벌써 다 녹았겠네."
종엽이는 고만두자고 하려는 눈치다.
"무얼, 산에야…… 저것 보우. 여기도 저렇게 남았는데."
하며 문경이는 광화문 담장 밑에 허옇게 솜발 펴논 듯한 잔설을 가리킨다. 이 여자는 봉익이를 만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끌고 나갈 작정이다.
"삼청동 설경은 어떤가. 거기도 절 있으니 절밥이나 사먹고, 솔잎에 솜발 편 것이나 방 속에 들어앉아서 어름어름 그려 가지고 가면 고만이지."
하며 종엽이는 깔깔 웃는다.
눈이 녹은 데는 짙어서 미끄럽고, 안 녹은 데는 당져서 미끄러운 길이 언틀먼틀해서, 아스팔트 바닥에만 익은 발이 이런 데 와서는 큰 곡경이다. 인가를 떨어져 산꼴짜기 같은 약물터 앞을 오니 삼동에 더께가 진 빙판 위에 눈이 또 쌓이고 언턱이 져서 섣불리 내려가다는 언 바위 위에 엉덩방아를 질 상싶다.
"어구, 이런 데를 오밤중에 어떻게 다니누?"
문경이는 어제 자정이나 되어 눈을 맞고 돌아온 봉익이가 용하다고 생각하였다.
"저 방야."
 
[...]
몸을 반이나 차에 실린 병인은, 맑은 정신이 들었는지 여러 사람에게 인사하듯이 휘 돌려다보다가, 바로 옆에 문경이가 서 있는 것을 보자, 한참 눈을 그리 주며 우물우물하는 모양이나 입 속에다 넣고 하는 말이 이불 깃에 가리어서 들리지는 않았다. 문경이는 그것을 보자 죽어나가는 사람같이만 생각이 들어서 눈 속이 더워 오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 휘장을 휙 가리고 단춧구멍을 끼우니까, 앞체가 번쩍 들리며 스르르 미끄러져 나갔다.
신발들을 부산히 찾아 신고 따라 나서니까, 뒤에는 간호부와 이 집의 인력거꾼만 환한 불 밑에 우뚝이 서 있다. 문경이는 발인한 집 같다고 생각하였다. 화장터로 상여 뒤에 따라가는 것 같다. 언제든지─ 며칠 안 돼서 이렇게 상여 뒤에 따라갈 날이 분명히 있을 것 같았다.
차 뒤에는 순사와 모친이 바짝 붙어가고, 조금 떨어져서는 보지 못하던 양복쟁이와 부친이 터덜터덜 쫒아간다. 양복쟁이는 종엽이도 아는 친구인 모양이다.
형사는 두 여자의 뒤를 따라오는 눈치다가, 안동 네거리에 나서니까 종엽이 옆으로 와서 무어라고 수군수군한다. 문경이는 어쩐지 가슴이 덜켝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종엽이는 문경이에게로 다가서며, 자기는 형사를 따라갈 테니 먼저 집으로 가라고 수근거린다. 문경이는 길바닥에 딱 서버렸다.
...
문경이는 컴컴한 속에 오도카니 서서 한참 바라보다가 단념을 하고 돌아섰다. 다시 네거리로 빠져 나와서 병인이 간 데를 바라보니, 벌써 그림자도 안 보인다. 종종걸음을 쳐서 뒤쫒아 보았다.
동십자각 앞까지 와서야 총독부 문 앞께서 검은 게 움찔움찔하는 것이 커브를 돌아 내려가는 전찻불에 비치어 바라보이다가는, 다시 컴컴한 속에 스러져 버린다. 문경이는 맥을 놓고 섰다가, 천변으로 돌아섰다. (염상섭, 『무화과』, 1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