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천변풍경 (4)] 당구장 '께임도리'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3. 22. 10:26



[...] 광교 모퉁이, 종로 은방 이 층에, 수일 전에 새로 생긴 동아 구락부라는 다맛집[당구장]과, 그리고 떄를 만난 평화카페가 잠자지 않고 있을 뿐으로 [...] (박태원, 『천변풍경』, 문학과 지성사, 2005[1936], 108쪽)

[...]

이 키 작고 뚱뚱한 신사가, 바로 수일 전에, 광교 모퉁이 이 층을 세 내어 '동아 구락부'라는 다맛집을 시작한 사람이 분명하다. (같은책, 114)

[...]

▲ "시내 금은상과 결탁 팔십만원 금괴 밀수.. 종로서 십수 명 피검" (동아일보, 1934. 8.8.)

젊은 주인이 금 밀수 사건으로 검속이 된 뒤로, 문을 닫힌 종로 은방 이 층에 있는 '한양 구락부'[동아 구락부]라는 다마 치는 집에서 금순이의 오라비 순동이는 께임도리를 하고 있었다. 근무 시간은 오전 열한 시경부터 그 이튿날 오전 한 시경까지, 월그은 들어오던 당초에 십 원이었던 것이, 그 뒤 승급이 되어 지금 십일 원을 받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이곳 서울로 올라온 지 이제 일 년이나 그밖에 더 안되지만, 시골 소년이 제법 서울 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구락부에 들어온 지도 이미 오 개월. 그야 '삼백'을 치는 젊은 감독과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뚱뚱보 주인과는 '삼십'은 같은 '삼십'이지만 그 실제의 기량에 있어서 우리 십육 세 소년 순동이가 훨씬 순동이가 훨씬 어른이다. (같은책, 307)

[...]

"아, 이 녀석아, 무얼 또 정신없이 듣구 섰어?"

분명히 김서방인 듯싶은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린다. 눈살을 잔뜩 찌푸르고 재봉이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러나 그곳에는 뜻밖에도, 정말 뜻밖에도, 창수 녀석이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다.

[...]

"그래, 너, 지금 어딨니?"

"종로 구락부"[동아구락부, 한양구락부]

"아, 요기, 은방, 이 층에서 다마 치는 집?" (같은책, 380)

[...]

이발소의 귀여운 소년 재봉이는, 저보다 나이도 어리고, 이를테면 시골뜨기인 창수같은 아이가, 종로 구락부에서 놀고 지내며 달에 십 원씩이나 월급을 받는 것에도 이제는 이미 그다지 유혹을 느끼지는 않고, 젊은 이발사 김서방과 밤낮 쌈을 하면서도 좀처럼 그곳을 떠나지는 않았다. (같은책, 413)


 

▲ 천변(광통교 일대) 지도


▲ ▲ 남대문통 1정목 2번지 동일은행 옆 종로양복점과 2층 당구장 종로구락부. 이 당구장은 『천변풍경』에서 '광교모퉁이' 종로은방(위 지도에서 삼화금방 자리) 2층 동아=한양=종로 구락부의 모델로 보인다.


▲ 종로네거리에서 광교(남대문통) 쪽을 바라본 풍경 (1920년대 후반 추정)


**

한국[인] 최초의 양복점

종로양복점 입구에는 “since 1916”이라고 적혀 있는 작은 간판이 걸려 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양복점인 종로양복점은 올해로 개점 87주년을 맞이했다. 종로를 주름잡던 김두한부터 고위급 장관까지 단골로 모셨다는 이 유서 깊은 양복점을 3대째 잇고 있는 이경주(58세)씨를 만났다.

이씨는 종로양복점의 창업주 이두용씨의 손자다. 이두용씨는 1910년초 일본으로 건너가 양장기술을 배워와 1916년 보신각 근처에 종로양복점을 개업했다. 그리곤 1940년 초반에 세상을 뜨기 전까지 종로양복점을 지켰다. “당시 우리 나라에는 양복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을 때예요. 상당히 진취적인 정신을 지니고 계셨던 할아버지는 새로운 문물을 들여온거죠.”

이두용 할아버지는 7형제 중 넷째이자 이경주씨의 아버지인 이해주씨에게 양복점을 물려주셨다. “큰아들에게는 좋은 걸 물려주려 하지 누가 양복점을 물려주려 하겠어요? 저 역시 다른 일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할 수 없이 물려받았죠.”

가게를 물려받았을 당시 이경주씨는 양복재단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가게 형편이 어려워지자 이씨는 재단사를 내보내고 직접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서 재단사의 길에 접어든 그에게는 그만큼 많은 실수와 시련이 따랐다. 하지만 이씨는 이제 맞춤양복에 대해 그만의 철학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프로다.

“요즘 사람들 개성을 외치는데, 기계로 똑같이 수천 벌을 찍어내는 기성양복에 어떻게 개성이 있을 수 있겠어요?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과 색상을 입맛대로 맞춰 입는게 진짜 개성이죠. 사람의 체형도 얼굴과 똑같아요. 세상에 똑같이 생긴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듯이 치수가 아무리 같다고 해도 신체의 굴곡은 제각기 달라요.” 종로양복점만의 자랑거리를 물었더니 이씨는 열띤 어조로 설명한다.

양복점을 이어받지 않았으면 어떤 일을 했겠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한다. “원래 건축을 했어요. 지금쯤 건축가가 되어 있겠죠.” 아주 다른 길은 아닌 거 같다고 하자 그는 웃으며 이렇게 덧붙인다. “재단하고 자르고 만들고, 건축과 옷을 만드는 일은 어떤 면에서는 비슷합니다. 하지만 건물은 불평이 없죠.”

이씨에게는 다시 예전의 명성을 되찾아 100년 역사의 흐름을 끊지 않고 대대로 이어가고픈 소망이 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종로를 떠나진 않을겁니다. 대대로 이곳을 지켜왔으니까요.”

유행복이 주류를 이루는 이 시기에 그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종로양복점이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켜나가길 바란다.『리더스 다이제스트』 한국판 20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