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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풍경 (5)] 원산 - 명사십리와 송도원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3. 22. 13:28

▲ 원산역


하늘과 바다와 입맞추는 곳 ─ 멀고 가깝게 크고 적게 이름도 모르는 섬들 ─ 자연이 만들어 놓은 향기로운 방축 명사십리 ─ 달은 밝고 바람은 자는 이 바다 위……

이윽히 그곳에 서 있다가 철수는 갑자기 허리를 굽혀 발 아래 조약돌을 집어들었다.

퐁당 ─ 그 소리에,

"달 밝은 바다 위에 팔매질하네……"

누구의 시였던가 이런 구절으 기억에서 찾아내며 그는 또 한번 허리를 굽혔다.

퐁당 ─ 퐁당 ─

철수는 이십팔 년간의 고독을 일시에 느끼면서, 물새조차 깃을 찾아든 바닷가에 오래오래 있었다.

퐁당……

퐁당, 퐁당……

(박태원, '옆집 색시', 1933)

 

**

이튿날 오후 세 시 오십 분 경성역을 떠나는 나진행 특급열차에는 몇 패의 피서객들이 있었다. 아무렇게나 차린 남학생들이며 좋아서 날뛰는 아이들, 그리고 땀에 적삼 등이 촉촉하게 젖고 약간 흥분한 빛을 띤 여학생이 그 아버지나 오라버니를 따라가는 양도 보였다. 김 장로 일행도 이들 중의 하나였다. 김 장로와 혜련과 문임이와 그리고 김 장로의 어린 손자요 종관의 아들인 영수. 영수는 문임의 손에 매어달려서 좋아하였다.

자리들은 잡아 놓고도 서늘한 바람을 탐하여 플랫포옴에 나와서 서성거리는 객들은 잠시 인생의 번뇌를 떠난 듯하였다.

은주가 이마의 땀을 씻을 새도 없이 행리와 식료품 등속을 차실에 싣고 있었다.

[...]

원산 바다에 온 혜련은 날마다 조금씩 유쾌한 기분을 회복할 수가 있었다. 비도 개이고 사람도 많이 모여서 해수욕은 대단히 흥성흥성하였다. 아침 저녁 따라서 은빛으로 쪽빛으로 고동색으로 야청으로 빛깔을 변하는 바다라든지 바다 저쪽으로 보이는 적은 푼 섬이며 흰 구름 봉우리라든지 황혼에 먼산에 덮인 구름에서 번적거리는 번개라든지 이런 것이 다 혜련의 음울한 기분을 전환하게 효과가 있었다.

처음에는 솔밭과 모래판에 날뛰는 또는 드러누운 벌거벗은 남녀들이 추해 보이고 징글징글해 보여서 보기도 싫던 것이 차차 그 속에서 일종의 조화와 힘과 아름다움과 기쁨도 찾게 되었다. (이광수, 『애욕의 피안』, 1936)

 

**

... 우리의 포목전 주인은 아까부터 혼자서 이야기다.

"그, 집안에 애들이 없은즉슨, 아주 쓸쓸헌 게군 그래."

"그렇습죠. 똑 집안엔 애기들이 있에얍죠…… 왜 애기들이 어디 갔나요?"

그의 말을 받은 사람은 이 집의 주인─, 포목전 주인은, 그래도 이 사람이 이 집에서는 '어른'이라서 어떠한 경우에든 똑 그 한 사람에게만 자기의 머리를 만지게 한다.

'응, 저, 매년 원산엘 보냈더니, 그게 인젠 아주 습관이 돼버려서, 큰놈 둘째 놈은 그래두 중학생이니까 또 헤엄두 칠 줄 아니까, 갈 만두 허지만, 아, 인제 보통학교 이 년 댕기는 끝에 놈마저 저두 가겠다구 졸라서……"

"하, 하, 그렇겠습죠. 그럼, 세 학생이 해수욕을 나갔군요."

"아, 그러니까 기집애년두 또 가만 있나? 왜, 올해 숙명학교 들어간 애 말야. 아, 그년두 또 나서서……"

"하, 하, 그럼, 사남매 분이……"

"아, 그렇게 되니 늙은 것두 바람이 나서, 나중엔 우리 마누라까지 애들 따라 구경 가겠다구, 하, 하, 그 법석들이란……"

"하, 하, 그럼, 영감께서만 빠지시게 되셨군요?"

"아, 나야 어디 한가롭게 피서니 뭐니, 그렇게 되나?─ 아, 거긴 너무 치키지 말구─, 그런데 원산 내려 가더니, 인젠 나더러 한 사흘이래두 좋으니 댕겨가라구 연방 편지질이로군, 하, 하……"

"그래, 어떡하기루 하셨나요?"

"하, 조르니, 글쎄 이번 토요일에 떠나 일요일 밤에나 돌아올까 허는데, 그것두 봐야 알겠는걸." (박태원, 『천변풍경』,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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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원산부元山府 전경


달도 없는 어느 날 밤 나는 바닷가에 나와 참으로 오랜 동안을 모래 위에 뒹굴며 놀았다. 이러한 때 사람들은 흔히 황당무계하게도 애수를 느끼고 감격을 갖고 한다.


내 귀는 바닷가의

조개 껍데기

물결치는 소리가

그립습니다.

장 콕토도 생각해 내고

눈을 감아도 마음에

떠오르는

아무것 없네

외로이도 또다시 눈을

뜨고 마누나


탁목(啄木, 타쿠보쿠)의 단가短歌도 외워 보고 하였을 때 나는 문득 어둠 속을 바람에 날라오는 노랫소리에 놀랐다.


며칠후우 며칠후우

요오단가앙 거언너가아 마안나리이

며칠후우 며칠후우

요오단가앙 건너가아 마안나리이


나는 저도 모를 사이에 모래를 차고 일어나 노랫소리를 더듬어 그 주인을 찾었다.

'누가 이 어둔밤에 죽음을 생각하고 있누?……'

모래 위에 내버려둔 낡은 목선에가 기대앉어 머얼리 명사십리 편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은 내가 그의 옆에까지 가도 놀라 고개를 돌리거나 하지 않았다

[...]

며칠 지나 나는 드디어 여인의 거처하는 곳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송도원松濤園 뒤  조그만 초가집, 국제통운회사 원산지점에 근무하고 있는 젊은이의 건넌방을 세내어 여인을 손수 조석을 지여먹고 있었다. (박태원, '바닷가의 노래',『여성』, 1937.8.)


**

안 빈이가 가족을 위해서 얻은 것은 송도원 바닷가에 있는 별장이었다. 바로 문앞이 바다요, 백사장이 있고, 담을 둘러막은 뜰까지도 있었다. 이층에도 큰 방이 하나 있고 밑층에는 응접실까지 있어서 상당히 사치한 집이었다.

[...]

옥남이는 무서운 데나 들어가는 것처럼 한발 두발 바다로 들어간다. 그리 차지 아니한 물결이 옥남의 장딴지를 만져 주었다.

볕은 따갑고 물결은 잔잔하였다. 이백 미터쯤 북쪽 해수욕장에는 울긋불긋한 여자들의 머리와 검은 남자들의 머리가 수없이 푸른 물위에 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걱정 근심을 다 잊고 오직 청춘과 건강만을 즐기는 것같았다. 

"이만큼 들어와!"

안 빈은 옥남을 보고 소리쳤다.

"여기 깊지 않아, 자 보아."

협이가 젖가슴까지 차는 물을 가리키며 어머니의 용기를 일으키려고 애를 쓴다.

"선뜩하지 않지?"

안 빈이가 가까이 오는 옥남을 보고 묻는다.

"시원해요."

"헤엄칠 줄 아우?"

"헤엄이 무어야요? 바다가 처음인데."

"바다가 처음이야?"

"바라만 보았지 누가 들어가 보았나요?"

"흥, 옛날 여학생이 되어서. 저기 있는 저 울긋불긋한 것이 다 여학생들야."

"우리 학교에 다닐 때에야 누가 기집애가 빨가벗구 바다에를 들어가요? "

"흠흠, 꽤 변했지." (이광수, 『사랑』, 1938)


**

경성역의 기적일성汽笛一聲, 모든 방면으로 시끄럽고 성가시던 경성을 뒤로 두고 동양에서 유명한 해수욕장인 명사십리明沙十里를 향하여 떠나게 된 것은 8월 5일 오전 8시 50분이었다.

차중(車中)은 승객의 복잡으로 인하여 주위의 공기가 불결하고 더위도 비교적 더하여 모든 사람은 벌써 우울을 느낀다. 그러나 증염蒸炎, 열뇨熱鬧, 번민煩悶, 고뇌苦惱 등등의 도회를 떠나서 만리 창명滄溟의 서늘한 맛을 한 주먹으로 움킬 수 있는 천하 명구名區의 명사십리로 해수욕을 가는 나로서는, 보일보步一步 기차의 속력을 따라서 일선의 정감이 동해에 가득히 실린 무량無量한 양미凉味를 통하여 각일각刻一刻 접근하여 지므로 그다지 열뇌熱惱를 느끼지 아니하였다.

그러면 천산만수千山萬水를 격隔하여 있는 천애天涯의 양미를 취하려는 미래의 공상으로 차중의 현실 즉 열뇌熱惱를 정복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이른바 일체유심一切唯心[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이다. 만일 그것이 유심唯心의 표현이 아니라면 유물遺物의 반현反現이라고 할는지도 모른다.

나는 갈마葛麻역에서 명사십리로 갔다. 명사십리는 문자와 같이 가늘고 흰 모래가 소만小灣을 연沿하여 약 10리를 평포平鋪하고, 만내灣內에는 참차부제參差不齊[들쑥날쑥하여 가지런하지 않음]한 대여섯의 작은 섬이 점점이 놓여 있어서 풍경이 명미明媚하고 조망眺望이 극가極佳하며 욕장浴場은 해안으로부터 약 5,60보步 거리, 수심은 대개 균등하여 4척 내외에 불과하고 동해에는 조석潮汐의 출입이 거의 없으므로 모든 점으로 보아 해수욕장으로는 이상적이다.

해안의 남쪽에는 서양인의 별장 수십 호가 있는데, 해수욕의 절기에는 조선 내에 있는 사람은 물론 동경, 상해, 북경 등지에 있는 사람들까지 와서 피서를 한다 하니 그로만 미루어 보더라도 명사십리가 얼마나 명구名區인 것을 알 수가 있다 허락지 않는 다소의 사정을 불고不顧하고 반천리半千里의 산하를 일기一氣로 답파踏破하여 만부일적萬夫一的[만인 중의 한 사람] 단순한 해수욕만을 위하여 온 나로서는 명사십리의 수려한 풍물과 해수욕장의 이상적 천자天姿에 만족치 아니할 수 없었다. 목적이 해수욕인지라 옷을 벗고 바다로 들어갔다. 그 상쾌한 것은 말로 형언할 배 아니다. 얼마든지 오래하고 싶었지마는 욕의浴衣를 입지 아니한지라 나체로 입욕함은 욕장의 예의상 불가하므로 땀만 대강 씻고 나와서 모래 위에 앉았다가 돌아보니, 김군은 욕의 기타를 사가지고 돌아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7일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보니 일기가 흐리었다.

7시경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였으나 계속적으로 오는 것이 대단치 아니하였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바다에 갈 욕심으로 비가 개이기를 기다렸으나 좀처럼 개이지 않는다.

11시경 비가 조금 멈추기에 해수욕하는 데는 비를 맞아도 관계치 않겠다는 생각으로 나섰다. 얼마 아니 가서 비가 쏟아지는 데 할 수 없이 쫓기어 들어왔다. 신문이 왔기에 대강 보고 나니 원산元山의 오포午砲 소리가 들린다. 시계를 교정하여 가지고 나서니 비가 개이기 시작한다. 맨발에 짚신을 신고 노동모를 쓰고 나섰다. 진 길에 짚신이 불어서 단단하여지매 발이 아프다. 짚신을 벗어 들고 맨발로 가는데 비가 그쳐서 길이 반은 물이요, 반은 흙이다. 맨발로 밟기에 자연스러운 쾌감을 얻었다. 더구나 명사십리에 들어서서 가늘고 보드라운 모래를 밟기에는 너무도 다정스러워서 맨발이 둘뿐인 것이 부족하였다.

해수욕장에 다다르니 마침 여러 사람들이 나와서 목욕을 하는데 남녀노유男女老幼가 한데 섞여서 활발하게 수영도 하고 유희도 한다. 혼자 온 것은 나 하나뿐이다. 나는 그들 목욕하는데서 조금 떨어져서 바다에 들어가 실컷 뛰고 놀았다. 여간 상쾌하지 않다. 조금 쉬기 위하여 나와서 모래 위에 앉았다. 이 때에 모든 것은 신청新晴의 상징뿐이다.


쪽같이 푸른 바다는 

잔잔하면서 움직인다. 

돌아오는 돛대들은 

개인 빛을 배불리 받아서 

젖은 돛폭을 쪼이면서 

가벼웁게 돌아온다. 

걷히는 구름을 따라서 

여기저기 나타나는 

조그만씩한 바다 하늘은 

어찌도 그리 푸르냐. 

멀고 가깝고 작고 큰 섬들은 

어디로 날아가려느냐. 

발적여 디디고 오똑 서서 

쫓다 잡을 수가 없구나.


얼마 동안 앉았다가 다시 바다로 들어가서 할 줄 모르는 헤엄도 쳐보고 머리를 물 속에 거꾸로 잠가도 보고 마음 나는 대로 활발하게 놀았다. 다시 나와서 몸을 사안沙岸에 의지하여 발을 물에 잠기었다.


모래를 파서 샘을 만드니 

샘 위에는 뫼가 된다. 

어여쁜 물결은 

소리도 없이 가만히 와서 

한 손으로 샘을 메우고 

또 한 손으로 뫼를 짓는다. 

모래를 모아 뫼를 만드니 

뫼 아래에 샘이 된다. 

짓궂은 물결은 

해죽해죽 웃으면서 

한 발로 모를 차고 

한 발로 샘을 짓는다.


다시 목욕을 하고 나서 맨발로 모래를 갈면서 배회하는데, 석양이 가까워서 저녁놀은 물들기 시작한다. 산 그림자는 어촌의 작은 집들에 따뜻이 쪼이는데, 바닷물은 푸르러서 돌아오는 돛대를 물들인다. 흰 고기는 누워서 뛰고 갈매는 옆으로 나른다. 목욕은 사람들의 말소리는 높아지고 저녁 연기를 지음친 나무 빛은 옅어진다. 나도 석양을 따라서 돌아왔다.



9일은 우편국에 소관이 있어서 원산에 갔다. 볼 일을 보고 송도원松濤園으로 갔다. 천연의 풍물로 말하면 명사십리의 비교가 아니나 해수욕장으로서의 시설은 비교적 상당하다. 해수욕을 잠깐하고 음식점에 가서 점심을 먹고 송림松林 사이에서 조금 배회하다가 다시 원산을 경유하여 여사旅舍에 돌아와 조금 쉬고 명사십리에 가 또 해수욕을 하였다. 행보行步를 한 까닭인지 조금 피로한 듯하여 곧 돌아왔다.

10일엔 신문이 오기를 기다려서 보고 나니 11시 반이 되었다. 곧 해수욕장으로 나가서 목욕을 하고 사장에 누웠으니 풍일風日이 아름답고 바닥 작은 물결이 움직인다. 발을 모래에다 묻었다가 파내고 파내었다가 다시 묻으며, 손가락으로 아무 구상이나 목적이 없이 함부로 모래를 긋다가 손바닥으로 지워 버리고 다시 긋는다. 그리 하다가 홀연히 명상冥想에 들어갔다. 멀리 날아오는 해조海藻의 소리는 나를 깨웠다.


어여쁜 바다새야 

너 어디로 날아오나. 

공중의 어느 곳이 

너의 길이 아니련만, 

길이라 다 못 오리라. 

잠든 나를 깨워라. 

갈매기 가는 곳에 

나도 같이 가고 지고. 

가다가 못 가거든 

달 아래서 자고 가자. 

둘의 꿈 깊은 때야 

네나 내나 다르리.


해수욕장에 범선帆船이 하나 띄었다.

그 배 밑에 가서,

"이게 무슨 배요?"

선인船人들이,

"애들 놀잇배요."

"그러면 이것이 아무개의 배요?"

"아니요, 다른 사람의 배요."

나는 배에 올라가서 자세히 물은즉 그 배는 해수욕하는 데 소용되는 배인데, 배에 올라가서 물에 뛰어 내리기도 하고 혹은 그 배를 타고 선유船遊도 하는 배다. 1개월 95원圓을 받고 삯을 파는 배로 매일 오전 9시경에 와서 오후 5시에 가는데, 선원은 다섯 사람이라 한다. 95원을 5인에 분배하면 매일 매일 60여 전인데 그 중에서 선세(船貰)를 제하면 대단히 박한 임금이다. 여기에서 그들의 생활난을 볼 수가 있다. 오후 4시경에 여사에 돌아왔다.

11일 상오 11시경에 해수욕장으로 나오는데 그 동리 뒤 솔밭 속에 있는 참외막 아래에 서너 사람의 부로父老들이 앉아서 바람을 쐬며 이야기들을 한다. 나도 그 자라에 참례하였다. 이 날이 마침 음력으로 칠석七夕날이므로 견우성이 장가를 드느니 직녀성이 시집을 가느니 하였다. 나는 칠석에 대한 토속土俗을 물었는데 별로 지적하여 말할 것이 없다고 한다. (한용운, 명사십리, 『반도산하』, 1940.5. 게재*)


 * 원본은 1929년으로 보임. 1929년 8월 11일이 음력으로 7월 칠석, 원산의 오포[정오 시각을 알리는 포]는 1932년에 사이렌으로 대체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