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는 남몰래 안잠자기에게 문의하였다. 안잠자기는 세책(貰冊)집에는 어떤 책이든 있다는 것과, 일 전이면 능히 한 권을 세내올 수 있음을 말하고, 그러나 꾸중들우. 그리고 다음에, 재밌긴 춘향전이 제일이지, 그렇게 그는 혼잣말을 하였었다. 한 분(分의) 동전과 한 개의 주발 뚜껑, 그것들이 17년 전의 그것들이, 뒤에 온 그리고 또 올, 온갖 것의 근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자기 전에 읽던 얘기책들. 밤을 새워 읽던 소설책들. 구보의 건강은 그의 소년 시대에 결정적으로 손상되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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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예봉
"얘, 이것봐라. 민주사허구 취옥이허구, 아주 그렇지 않은가부다……'
[...]
그 별로 신기할 것 없는 그들의 대화는 대략 아래와 같다.
"오늘, 너, 아무 데두 안 갔구나?"
"아, 영감께서나 불러주시기 전에야, 제가 갈 데가 어딨에요?"
"아따, 고것……"
"근데, 참, 왜 그렇게 뵐 수 없어요?"
"응, 좀 바빠서……"
"참, 저어, 춘향전 보셨어요?"
"춘향전이라니?"
"왜, 요새, 단성사에서 놀리죠."
"활동사진 말이로구나. 거, 재밌나?"
"모두 좋다구들 그래요. 오늘, 동무 몇이서 구경 가자구 맞췄는데…… 영감 같이 안 가시렵소?"
"가두 좋지만, 글쎄, 좀 바빠서……" (박태원, 『천변풍경』, 문학과 지성사, 2005[1936], 296-7쪽)
▲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의 출현'. 영화 「춘향전」 단성사 신문광고 (동아일보, 1935년 10월 4일자)
▲ 1935년 10월 4일 개봉된 문예봉 주연 「춘향전」의 한 장면
▲ 1934년 12월 신축된 단성사
▲ 1960년대의 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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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적-얘기책
▲ 영화 「반도의 봄」 중 춘향전 촬영장면
어머니를 따라 일가집에 갔다온 나 어린 구보는 한꺼번에 다섯 개나 먹을 수 있었던 침감보다도 그 집의 젊은 아주머니가 재미나게 읽든 '얘기책'이 좀 더 인상 깊었다.
"어머니 그 책 나 두 사 주."
"그 책이라니 얘기책?…… 그건 어린앤 못 읽어. 넌 그저 부지런히 학교 공부나 해애."
어린 구보는 떠름한 얼굴을 하고 섰다가 슬쩍 안짬자기에게로 가서 문의하였다.
"얘기책은 을마씩 허우?"
"대중 없지 십 전두 허구 심오 전두 허구…… 왜 도련님이 볼려구 그러우?"
"응."
"볼려면야 가게서 일 전이면 세두 내오지."
"단 일 전에? 그럼 하나 내다주우."
"마님께서 그거 봐두 좋다십디까?"
"……"
"어유 마님께 꾸중 들으면 으떡하게……"
그는 다듬이질만 하다가 문득 홋잣말같이
"재밌긴 춘향전이 제일이지."
이튿날 안잠자기가 '주인마님' 몰래 세를 내온 한 권의 춘향전을 나는 신문에 싸들고 약방으로 나가 이층 구석진 방에서 반일半日을 탐독하였다. 아무리 구보로서도 아홉 살이나 그밖에 안 된 소년으로는 변학도의 패덕悖德에는 의분을 의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여인麗人 춘향의 옥중 고초에는 쏟아져 흐르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었다. ('가을의 슬픈 인상: 순정을 짓밟은 춘자', 『조광』, 193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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