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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이 가지고 싶어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3. 23. 10:04

오늘도 그가 활발하게 집에 쑥 들어오더니 신문지에 싼 기름 한 것을 "이것 봐라"하는 듯이 마루 위에 올려놓고 분주히 구두끈을 끄른다. 

"이것은 무엇인가." 

나는 물어 보았다. 

"저어, 제 처의 양산이야요. 쓰던 것이 벌써 낡았고 또 살이 부러졌다나요." 

그는 구두를 벗고 마루에 올라서며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여 벙글벙글하면서 대답을 한다. 

그는 나의 아내를 돌아보며 돌연히, 

"아주머니, 좀 구경하시렵니까 ?" 

하더니 싼 종이와 집을 벗기고 양산을 펴 보인다. 

횐 바탕에 두어 가지 매화를 수놓은 양산이었다. 

"검정이는 좋은 것이 많아도 너무 칙칙해 보이고 회색이나 누렁이는 하나도 그것이야 싶은 것이 없어서 이것을 산 걸요." 

그는 “이것보다도 더 좋은 것을 살 수가 있다"하는 뜻을 보이려고 애를 쓰며 이런 발명까지 한다. 

"이것도 퍽 좋은데요." 

이런 칭찬을 하면서 양산을 펴들고 이리저리 흘린 듯이 들여다보고 있는 아내의 눈에는. 

"나도 이런 것 하나 가졌으면......

하는 생각이 역력히 보인다. 

나는 갑자기 불쾌한 생각이 와락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오며 아내의 양산 보는 양을 빙그레 웃고 바라보고 있는 T 에게 

"여보게. 방에 들어오게그려. 우리 이야기나 하세." 

T는 따라 들어와 물가 폭등에 대한 이야기며, 자기의 월급이 오른 이야기며, 주권을 몇 주 사 두었더니 꽤 이익이 남았다든가, 각 은행 사무원 경기회에서 자기가 우월한 성적을 얻었다든가, 이런것 저런것 한 참 이야기하다가 돌아갔었다, T 를 보내고 책상을 향하여 짓던 소설의 결미를 생각하고 있을 즈음에. 

"여보 !" 

핏기없는 얼굴에 살짝 붕은 빛이 들며 어느결에 내 곁에 바짝 다가안 았더라. 아내의 떠는 목소리가 바로 내 귀 곁에서 들린다. 

"당신도 살 도리를 좀 하세요." 

나는 또 "시작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머리에 번쩍이며 불쾌 한 생각이 벌컥 일어난다. 

그러나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 묵묵히 있었다. 

"우리도 남과 같이 살아 보아야지요." 

아내가 T 의 양산에 단단히 자극을 받은 것이다. (현진건, '빈처',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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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야, 어느 여름인데 내일같이 방학을 하고 고향으로 떠날 터인데 동무들은 떠날 준비에 바쁘더구나. 그때는 인조견이 나지 않았을 때이다. 모두가 쟁친 모시치마 적삼을 잠자리 날개처럼 가볍게 해 입고 흰 양산 검은 양산을 제각기 사더구나. 그때에 나는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더라.

무엇보다도 양산이 가지고 싶어 영 죽겠더구나. 지금은 여염집 부인들도 양산을 가지지만 그때야말로 여학생이 아니고서는 양산을 못 가지는 줄 알았다. 그러니 양산이야말로 무언중에 여학생을 말해주는 무슨 표인 것 같이 생각되었니라.K야, 어느 여름인데 내일같이 방학을 하고 고향으로 떠날 터인데 동무들은 떠날 준비에 바쁘더구나. 그때는 인조견이 나지 않았을 때이다. 모두가 쟁친 모시치마 적삼을 잠자리 날개처럼 가볍게 해 입고 흰 양산 검은 양산을 제각기 사더구나. 그때에 나는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더라.

철없는 내 맘은 양산을 못 가지면 고향에도 가고 싶지를 않더구나. 그래서 자꾸 울지만 않았겠니. 한 방에 있는 동무 하나가 이 눈치를 채었음인지 혹은 나를 놀리느라고 그랬는지는 모르나 대가 부러진 양산 하나를 어디서 갖다주더구나. 나는 그만 기뻤다. 그러나 어쩐지 화끈 달며 냉큼 그 양산을 가질 수가 없더구나.

그래서 새침하고 앉았노라니 동무는 킥 웃으며 나가더구나. 그 동무가 나가자마자 나는 얼른 양산을 쥐고 벌리어보니 하나도 성한 곳이 없더라. 그때 나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울분과 슬픔이 목이 막히도록 치받치더구나. 그러나 나는 그 양산을 버리지는 못하였다. (강경애, '원고료 이백원',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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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는 양산을 어디다 놓고 있었을까 하고, 구보는, 객쩍은 생각을 하다가, 여성에 대하여 그러한 관찰을 하는 자기는, 혹은 어떠한 여자를 아내로 삼든 반드시 불행하게 만들어 주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여자는…… 여자는 능히 자기를 행복되게 하여 줄 것이다. 구보는 자기가 알고 있는 온갖 여자를 차례로 생각하여 보고, 그리고 가만히 한숨지었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전차가 약초정 근처를 지나갈 때, 구보는, 그러나 그 흥분에서 깨어나 뜻 모를 웃음을 입가에 띠어 본다. 그의 앞에 어떤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 여자는 자기의 두 무릎 사이에다 양산을 놓고 있었다. 어느 잡지에선가 구보는 그것이 비(非)처녀성을 나타내는 것임을 배운 일이 있다. 딴은, 머리를 틀어 올렸을 뿐이나, 그만한 나이로는 저 여인은 마땅히 남편은 가졌어야 옳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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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정말 오늘은 가는 거야?"

박인원은 회색 파라솔을 한편으로 기울이고 석순옥의 곁으로 바싹 다가선다.

"그럼, 안 가구?"

순옥은 옥색이라기에는 너무 진하고 남이라기에는 너무 연한 파라솔을 한편으로 기울이면서 걸음을 잠깐 멈추고 의외인 듯이 인원을 돌아본다. (이광수, 『사랑』, 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