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웃고 재깔이며 십칠팔 세씩 된 머리 땋아 늘인 색시가 세 명, 걸음을 맞추어 남쪽 천변을 걸어 내려온다. 흡사 학생같이 차렸으나, 손에들 들고 있는 것은 벤또 싼 보자기로, 조금 전 다섯 시에, 전매국 의주통 공장이 파한 것이다. 모두 묘령들이라 그리 밉게는 보이지 않아도, 특히 가운데 서서 그중 웃기 잘하는 색시가 가히 미인이라 할 인물로, 우선 그러한 공장 생활을 하는 여자답지 않게 혈색이 좋은 얼굴이 정말 탐스럽다. (박태원, 『천변풍경』, 문학과 지성사, 2005[1936], 4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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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
멋없도록이나 맑게 갠 날이다.
누구나 그대로 집안에 붙박여 있지 못할 날이다.
볼일도 없건만 공연스레 거리를 휘돌아 다니고 싶은 날이다.
철수는 양말을 두 켤레 사서 그것을 아무렇게나 양복 주머니에 처넣고 화신상회를 나왔다.
그러나 그곳을 나와서 집으로밖에는 어데라 갈 곳을 가지지 못한 철수였다.
양말을 살 것이 오늘의 사무였었고, 그 사무는 이미 끝났다.
그는 백화점 앞에가 서서, 물끄러미 종로 네거리를 오고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뜻하지 않고 그의 머리에 -기순-이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는 곧잘 뜻하지 않은 때에 뜻하지 않은 사람을 생각하는 일이 있다.
지금 기순이 생각을 한 철수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
그 기순이 생각을 철수는 바로 지금 종로 네거리에서 한 것이다.
그 뒤로 기순이 소식을 듣지 못하기 이미 사 년이다.
기순이는 지금 어쩌고 있을까?
남편은 그저 연초 공장에서 '뚜'하고 있을까? [기순의 남편은 의주통 연초공장에서 사이렌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을 한다]
그들은 행복일까?'
이러한 생각을 잠깐 하다가, 철수는 언제까지든 그곳에가 그렇게 서서 그따위 생각만을 하고 있을 수 없는 것을 깨닫고, 날씨가 하도 좋으니 한강으로라도 나갈까? - 하고 마침 온 전차를 탔다.
그러나 그것은 의주통을 돌아 경성역으로 가는 전차였다.
철수는 만원에 가까운 전차 안에서 손잡이에 손을 걸치고, 혼자 싱거운 웃음을 웃었다.
그러자 전차가 의주통에 가 닿았을 때, 철수는 사람들 틈에 끼여 전차에 오르는 한 여인을 보고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 아낙네는 세 살이나 그밖에 더 안된 사내아이를 안고 있었다.
철수는 그가 바로 요전 순간까지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기순인 것을 알고 희한하게 놀랐다.
그러나 그렇다고 선선히 알은 체를 할 사이는 물론 아니었다.
흘낏 보았으니 물론 장담은 할 수 없는 노릇이나, 하얗게 바른 분 덕에 이마의 생채기는 쉽사리 알아낼 수 없었다.
철수는 약간 안도에 가까운 감정을 맛보며, 그대로 그곳에가 서 있었다.
아무도 그들 모자를 위하여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젊은 아낙네는 아이를 안은 채 사람들에게 밀려 철수의 옆에까지 왔다,
그러자 전차 창밖에 돌연 벽돌집이 나타났다.
철수는 그것을 보자 저도 모르게 흘낏 옆에 선 어렸을 때의 동무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한 아이의 어머니인 옛날의 기순이는 자기 곁에 철수가 있는 것도 모르고 한 손에 치켜 안은 어린 아들에게 창 밖 전매국 공장을 손가락질하였다.
▲ 오월의 훈풍 동선
"저게 어디지? 우리 귀남이는 알지?"
그러나 귀남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쉽사리 알아내지를 못하였다.
"엄마가 아르켜줄까?"
"---"
"아빠 계신 데. 뚜 - 하시는데."
그제야 귀남이는 갑자기 깨달은 듯이 두 손을 좋아라고 내흔들며 소리쳤다.
"아빠, 뚜- 아빠, 뚜-"
철수는 그 소리를 듣자 저도 모르게 사람들을 헤치고 차장대로 나와 달려가는 전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가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거리를 걸어갔을 때, 그의 가슴속에 기쁨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행복이다. 그는 지금 행복이다.'
철수는 큰길을 피하여 골목을 찾아들었다.
'그는 행복이다. 아들 낳고, 딸 낳고 - 까지는 알 수 없어도, 이제 분명히 어머니의 기쁨이 그에게 있을 게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가 그 골목을 왼손 편으로 꺾으려 할 때,
"뚜-"
하고 연초회사의 '석점 뛰'가 불었다.
철수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몸을 들이키어 지붕 너머로 연초 회사 굴뚝을 쳐다보았다,
이윽히 그곳에 서 있다가 철수는 어느 틈엔가 입가에 떠오른 빙그레 웃음 그대로 띄운 채, 다시 골목을 걸어나갔다.
오월의 향기로운 바람은 그 골목 안에도 가득하다.
그가 그렇게 걷고 있을 때, 저도 모르게 가만한 음향이 그의 입술 사이를 새어 나왔다.
뚜-
뚜
뚜, 뚜- (박태원, '오월의 훈풍', 『조선문단』, 193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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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공장 모던걸들
첫 여름 얼마전 더위가 앞 이마에 땀방울을 굴리는 어느 날 오후 의주통義州通 모 연초공장某煙草工場 앞을 지나자니 마침 공장이 파하는 시간이여서 남녀공男女工 할 것 없이 대문이 터저 나가게 쏟아져 나온다. 그 중에도 여공이 훨씬 많다.
밥 먹고 똥누는 외에 할 일이 없어 마지못해 한가한 우리 사람들이 이곳 저곳 모여서서 무슨 구경거리나 생긴 듯이 바라보고 섰다. 그들은 대개 십오육세의 탐스러운 소녀들이며 간간 젊은 부녀들도 섞였다.
"야- 이건 정말 하이칼라로다!"
"응! 꽤 됐는데 그것!"
"미인이야 미인! 정말 반하겟꼬나 아이그으!"
런 체면 없는 찬탄이 구경하고 섰는 그들의 입에서 마냥 흘러 나온다. 나도 가던 걸음을 멈추고 구경을 한다. 과연이다! 누가 그들을 가리켜 일급 삼사십전의 여공이라 할꼬. 학교에서 나오는 호화로운 여학생과 조금도 다름이 없지 않은가. 옆에 낀 고운 보에는 빈 '변또'를 싼 것인가. 굽 높은 노란 구두, 인조견 양말, 철 맞은 가스씨마 치마, 별문생고사 저고리, 곱게 빗어 느린 향유 머금은 뒷머리 생글생글 웃음을 토하고 있는 그 눈 눈 눈 눈... ... .
아, 이 아름답게 차리신 처녀들이 무서운 노자관계勞資關係 아래 대립해서 싸워나가는 노동군[勞動軍]일 수가 있을까!? 하루 밥 세끼에 목숨을 매인 무산자無産者의 자녀들일까! 실로 세 번 놀래고 네 번 탄식하였다. 길게 말해 뭘하랴.
공장이란 자본가들의 축첩장蓄妾場은 아닐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그같이 과분한 호사와 치장을 하는고? 구두 한 켤레만 사재도 도 벌써 한달 임금은 다 들어갈 게 아니냐. 그들의 오막살이에는 굶주린 입이 한두 개 아니 그들의 자비를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그렇다고 나는 그들의 소행을 캐내기는 싫다. 아즉 철이 없어 그러리라. 몰라서 그러리라. 하기야 여위열기자용女爲悅己者容[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 주는 사람을 위하여 화장을 한다]하고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란[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옛사람들古人의 말도 있긴 하지만…… 조선 사람들의 밑 빠진 주착 없는 사치풍이 드디어 여공들의 마음까지를 침식하고 말았든가! 참으로 개탄스럽다[慨慨嘆嘆]!. ('모던 복덕방', 『별건곤』, 19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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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공장의 겨울 풍경
오전 여섯시 통안네거리[종로4가 네거리] 연초공장[인의동 전매국 연초공장] 기적소리가 서리찬 채 새벽하늘을 울릴 때 도수장[도살장]같이 보기에도 험상스러운 붉은벽돌담 좁은 홍여문을 목이메여 들어가는 밥통찬 수많은 남녀의 떼가 있다. 그 중에는 아직도 젖내 나는 어린 아이도 있으면 꽃같이 젊은 색시도 들어간다.
겨울의 쌀쌀한 바람이 그네들의 헐벗은 옷자락에 사정없이 사무칠 때 가난과 고통과 유린과 눈물에 찌들은 그네의 영육靈肉에도 쓰라린 북풍이 지난듯 하였다.
창백한 수많은 얼굴들은 잠깐 사이에 사라지고 시커먼 대문이 그들의 뒤를 자른다. 그리하여 죽은듯이 고요하던 그 안으로부터는 죽어가는 소의 신음하는 소리같은 지긋지긋하게도 처참한 기계바퀴 소리가 넘어로 들리기 시작한다.
이곳은 그네들의 심혈을 힘입어 돈벌이하는 곳이다. 그네의 피갑으로 일급 얼마라는 약간의 주사침으로 그네의 애꿎은 생生을 늘여주는 곳이다.
우리가 날마다 때마다 무심하게 피우는 담배는 모두 이 곳에서 우리의 누이와 동생들이 뼈가 닳토록 애써 만들어 주는 것이니 우리가 담배 한 개를 피울 때 그 구수한 내음새는 그네들의 기가 타는 내음새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겨울은 깊어간다. 그 높다란 굴뚝을 스치는 바람보다도 그네의 가슴을 스치는 바람은 더욱 쌀쌀할 것이다. ('거리 위의 초겨울 街上의 初冬 -연초공장', 동아일보, 1924.11.22.)
[주]
1. 일제시대에 경성 시내에는 인의동[종로4가]과 의주통[의주로1가] 두 곳에 조선총독부 전매국 연초공장이 있었다. 현재 그 터는 공교롭게도, 인의동 전매국 연초공장(서쪽) 터는 동대문경찰서[2006년 3월부터 혜화경찰서로 명칭 변경] 맞은편, 의주통 전매국 연초공장(동쪽) 터는 (현) 서대문경찰서 맞은편이다.
2. 김해경, 곧 이상李箱은 경성고공(경성고공)을 졸업한 1929년 조선총독부에 들어가 바로 그 해에 의주통 조선총독부 전매국 연초공장 재건축 공사(1928년 착공)에 몇 달간 파견근무를 나갔다. 김해경이라는 본래 이름 대신에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계기(현장의 인부들이 김해경을 이씨李氏로 착각해 일본 식의 이씨라는 뜻의 '이상'이라고 불러 필명을 이상으로 정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는 곳이 바로 이 의주통 전매국 공사장이다. 그러나 김해경은 보성고보 시절부터 이상이라는 닉네임을 썼다고 전해진다. (참고 https://gubo34.tistory.com/64)
3. 조선총독부 전매국 청사
4. 성냥공장
▲ 조선인촌주식회사朝鮮燐寸株式會社의 공장 (인천 성냥공장)
▲ 대한 뉴스 345호 (1961. 12.23.) [박정희 의장 전매청 의주로공장 방문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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