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이발소 창 앞에 앉아, 재봉이는 의아스러운 눈을 들어, 건너편 천변을 바라보았다. 신수 좋은 포목전 주인은 가장 태연하게 남쪽 천변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 소년의 관찰에 의하면, 그는 일찍이 남쪽 천변을 걷지 않았다. 그러하던 그가, 대체 무슨 '까닭'을 가져, 삼사 일 전부터, 그의 이제까지의 관습을 깨뜨리는 것일까? [...]
그러나, 재봉이는 마침내 한 개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내고야 말았다. 포목전 주인은, 마침내, 한약국 앞에 이르러, 가장 자연스럽게 고개를 그편으로 돌리고, 그 안, 주인방에 앉아있는 영감과 필연적으로 얼굴이 마주치자, 그는 역시 자연스럽게, 그의 머리 위에 얹혀 있는 중산모를 사뿐히 위로 들어 가벼이 인사를 하고, 그리고 큰기침과 함께 그대로 다시 그 길을 광교까지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다.
[...]
그는 어째, 그의 연래의 관습을 깨뜨려서까지, 요사이 갑자기 한약국 주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일까? .. 마침내, 그는 그것을 이발소 주인에게 말하고, 그에게서 그 까닭을 배웠다. 그것은 별 큰 일이 아니다. 이번 제이차 경성부회의원 선거에, 다시 출마한 자기의 매부를 위하여, 포목전 주인은 어떻게 소중한 '일 표'를 더 얻어줄 수 있을까 해서에 지나지 않았다. 한약국 영감은, 역시 선량한 한 사람의 시민이었고, 또 물론, 어엿한 유권자에 틀림없었다. (박태원, 『천변풍경』, 문학과 지성사, 80-2쪽)
[...]
민주사는 자기가 어째 꼭 헛애만 쓰고 있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전에는 뭐 그렇지도 않던 것이, 이번에 이 운동이 시작되자, 갑자기 누구보다도 자기가 변변하지 못한 인물로, 그래 '부회의원'이라든가 그러한 영직이 어디 내게 당할 말이냐고 스스로를 낮게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 마음에는 참기 어렵게 쓸쓸하고 또 안타까웠다.
그래도, 누가 이번에 입후보한 이들 가운데서 자기의 이름을 발견하고, 무례하게도,
"아, 그 사법서사가?…… 흥, 참, 벨꼴두 다 보는군."
그렇게 말하더라는 것을 어떻게 전하여 들었을 당초에는, 순간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며,
'어디, 이놈, 두구 봐라!' (같은책, 84-5쪽)
포목전 주인은 다시 배다리를 건너 북쪽 천변을 광교까지 이르는 노차[동선]를 선택하였다. 선거가 끝난 것이다. 그의 매부는 우수한 성적으로 부회의원에 당선하고 [...] 그러나 민주사는? 민주사는 드디어 병석에 눕지 않으면 안되었다. [...] 낙선을 했기 때문에 병들어 누웠다고, 모든 사람의 비웃음이 클 것을 그는 생각 아니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동안의 속무로 하여 피로할 대로 피로한 몸에, 빚 엊어 쓴 이천 원에 대한 심려가 컸고, 또 엎친 데 덮치기로 안성집 문제가 종시 마음을 괴롭히어, 그는 자리에 쓰러진 채 신열조차 높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책, 1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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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경성부회의원 선거 경과
▷투표일시 1935년 5월 22일
▷투표장소 남대문소학교
▷유권자
☞ 경성부총인구 377,372명 중 유권자 20,469명
- 조선인 270,590명 중 유권자 7,361명 * 조선인 37명당 1인
- 일본인 106,782명 중 유권자 13,108명 *일본인 8명당 1인
- 투표자 16,982명(조선인 6,022명)
▷당선자
☞ 경성부회 정원 48명
- 조선인 15명 당선 (24명 출마)
- 일본인 33명 당선 (41명 출마)
※ 당선자 평균 득표수 314표 (조선인 최고 541표, 최저 195표 평균 323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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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의 지방자치제는 어떤 것?
벌써 10여 년 전이었다. 기미己未운동[3.1운동] 직후에 재등[齋藤] 총독이 문화정치文化政治라는 새간판을 붓치고 조선에 부임하면서 조선실정에 가장 부합하는 지방자치제도의 입안立案이란 것이었다. 그리하여 행정에 담당한 자로 하야금 그에 대한 조사를 명령하게 되었던 바 그 결과, 2천만의 조선민중은 아직 구습을 타파할 수 없는 형편이고 민지民智의 진보, 경제의 발달, 공공적 정신의 훈련 등으로 지금 곧 지방자치제의 실시는 가능치 못한 일이니 먼저 훗날에 실시할 지방자치제의 과도적過渡的 단계階段로 대정 9년[1920] 7월에 공포하야 그해 10월에 실시케 된 것이 지금까지의 과도적 제도이라는 그 자치제이였던 것이다. 그가 이제 다시 한 걸음 범위를 확대하였다는 것이 개정된 지방자치제이란 것이니 그는 과연 어떤 것일까. 먼저 그 전의 제도를 보면
1. 부와 면의 자문기관인 부면협의회를 둔 것
2. 도지방비[道地方費]자문기관인 도평의원회의를 둔 것
3. 조선인의 보통교육을 위하여 부, 군, 도에 학교비[學校費]제도를 두고 그 외 자문기관으로 학교비평의회를 두었으며, 일본인 교육비를 위한 기관으로 학교조합평의회를 둔 것
그 회원을 선임하는 규정은 각각 다른 바가 있으니 부와 지정면 협의원은 공선[일반선거]이고 보통면의 협의원은 추천에 지나지 못했으며 학교평의회원도 부의 학교평의원은 공선이고, 군이나 도의 학교평의원은 그 군이나 도 내의 각 면협의원으로부터 배수倍數의 후보자 중에서 관선하였고, 도평의회원은 그 정원의 3분지 1은 관선, 나머지의 3분의 2는 그 도내의 부, 군, 도의 협의원으로부터 선거한 배수의 후보자 중에서 관선키로 되었던 것이다.
이제 새로이 개정되여 지난 4월[1931년]부터 실시하는 새 제도란 어떤 것이냐 하면
첫째, 부府와 지정면指定面[읍]의 의결기관으로 부에 부의회를 두고, 지정면[읍]에 읍회를 두고 면에는 면협의회를 둔다는 것
둘째, 도에는 의결기관으로 도회를 둔다는 것이다.
그 선임규정은
1. 부, 읍, 면협의원은 민선 [이전까지는 부와 읍(지정면) 민선, 면은 관선]
회의원은 3분의 1은 관선이고 나머지 3분의 2는 각 선거구에서 부, 읍, 면협의원이 선거토록 하였다.
그러나 그 신구의 차이란 무엇인가하면 부, 면, 도의 자문기관이던 것이 의결기관으로 되었고 지정면을 읍회라 하야 새로운 제도를 선포한 것이며 그 선임방법에 있어 관선을 제하고는 민선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원의 임기가 3년이든 것이 4년으로 되었다.
▲ 1935년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면협의회 의원선거 당선자들의 당선사례
선거권, 피선거권 자격?
부, 읍, 면이나 도에 의원될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야 될 것인가. 누구나 원한다고 선거되는 것이 아니요 너도 선거할 수 있고 나도 선거할 수 잇는 것은 아니다. 가령 나의 생각으로는 김 가라는 사람을 가장 적당하다고 인정하나 나는 그 사람을 선거할 수 없고 또 그 사람도 아무리 자격은 그에 가장 적당하다고 할지라도 피선被選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어찌된 까닭일가. 유권자의 자격을 제정하되 "제국신민인 연령 25세 이상의 남자로 독립하여 생계하고 1년 이상을 그 부나 면에 살고 조선총독의 지정한 부세府稅, 면세面稅 5원 이상을 바치는 자라야 회의원의 선거권을 가진다"고 했다.
부세 5원 이상을 바칠 수 있는 정도의 재산가가 얼마나 될 것인가? 일본인은 그가 십이면 팔구이되 조선인은 일본 사람보다 인구는 많으나 그 5원이 이상의 부세를 낼 수 있는 재산가 그 실수實數에 있어서는 일본 사람보다 훨씬 적다는 것이다. 그러니 선거할 자격자도 적고 선거를 받을 자격자도 적다. 그리고 감옥에 가서 증역한 자는 그 자격이 없다. 지금 조선사람의 형세로는 감옥에 가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병신같은 사람들이다. 이일저일 하여 감옥에 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일이 많았다. 이 두 가지의 사정은 오늘의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지방자치제의 간여할 자격을 상실시켰다.
지금까지 그에 관계한 사람들은 지주, 면장, 대서인代書人[사법서사] 퇴직관리, 변호사, 도시의 자본가, 일본인 농장의 감독 등으로 그네는 정치도 모르고 사회도 모르는 자들이었다. 그네가 당선된 것은 토지가 많은 지주이니 그의 소작인이 투표한 까닭이다. 도시의 자본가는 채무관게로 그에 억눌린 소시민, 소상인들에게서 투표를 받은 것이고 대서인代書人이란 그 대부분이 협잡꾼이어서 그로 돈을 모은 자들로 그 후보에 나서는 것이니 도시의 자본가나 마찬가지의 경우이고 일본 사람의 농장 감독도 지주나 마찬가지 이유로 투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면장, 퇴직관리 등은 지방에는 봉건적의 사상이 그대로 농후하야 조건 없이 그들을 지지한다. 그렇게 당선된 그들은 면행정을 모른다.
정치란 어떤 것이고 더욱이 민중과의 관게는 전혀 모른다. 그것이 입신양명으로 알고 군수나 도지사 내무부장에게 아첨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 뿐이다. 그러니 민중의 욕구를 살피어 그를 통치자에게 제시하여 민중의 행복을 증진시키지 못함은 물론이고 그 중에도 일본인 농장의 감독으로 있어 다소의 세상물정을 안다는 자는 이권 운동에 눈이 어두워 있다. (김세성, '금일의 문제, 지방자치제 이야기', 『별건곤』 19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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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기관에서 그동안 준비한 법령이 오늘부터 발효된다. 부府의 경우에는 지방행정에 관한 문제를 의결할 수 있는 권한이 지방의회에 부여되었다. 이 안은 일본인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할 수 있도록 대단히 '계획적'으로 짜여있다. 결국 이런 내용의 자치는 일본인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자치를 의미할 뿐이다. 일본의 국가정책이 '일본인을 위한 조선'이기 때문에 이러한 일본인 중심의 계획과 정책들은 이상할 것도 없다. 조선인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 (『윤치호일기』, 1931년 4월 1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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