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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 이발소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3. 25. 17:30

이발사는 머리를 가지런히 쳐놓고 면도와 비눗물을 가지고 나의 옆으로 왔다. 그는 나의 두 뺨과 턱에 차례로 비누질을 하고 난 다음에, 은근한 말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기르시렵니까?"

물론, 나의 수염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나는 그가 나의 '감숭한 놈'의 존재를 알아준 것에 기쁨과 만족을 느끼며, 

"예에."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불안하였다. 혹시나 이발사가,

'젊은애가 건방지게...'

하는 종류의 비웃음을 갖지나 않을까? 하여서이다. 나는 눈을 살며시 뜨고, 나의 턱에 면도질을 하고 있는 그를 흘깃 쳐다보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

그러나 경과는 나의 예상 밖으로, 그 후 두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변화도 나의 수염 위에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수염을 기르려고 결심한 후, 두 번째로 이발을 하러 갔을 때, 이발사는 면모하기에 이르러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로 기르시렵니까?"

물론 이것을 이발사의 무심한 습관에서 나온 말이라면 그만일는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절대로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말에서 두 가지 뜻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젊은 양반이 보기 싫으니 깎아 버리슈'

또 하나는,

'벌써 두 달이 됐건만 그저 이 모양이니, 깎아 버리는 게 낫겠쇠다...'

사실 말이지, 나에게 있어서 이러한 모욕은 이제까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그러한 티는 보이지 않고 가만히, 그러나 힘있게,

"예에. 그냥 둡쇼"

하였다. 그리고 눈을 들어 이발사의 '한줌은 착실히 되는' 깜숭한 놈을, 적의와 선망을 가지고 관찰하였다. 미적 가치는 비록 '제로'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그 분량만은 확실히 '탐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까닭에, 나는, 그가 고개를 숙여 나의 빈약하게도 감숭한 놈의 양쪽 끝을 따고 있는 동안, 그지없는 치욕을 느끼고, 그에게서 면도를 빼앗아 가지고, 그의 수염을 몽탕! 잘라 버리고 싶은 충돌을 깨달았던 것이다.

[...]

▲ 광교에서 본 천변[관철동쪽]의 이발소 (1950년대)

지금으로부터 꼭 일주일 전에 나는 이발을 하게 되었다. 근 두 달이나 게으른 까닭으로 너무 헙수룩하여, 하루라도 더 미룰 수 없었던 까닭이다.

내가 수염을 기르리라고 결심한 날을 이미 기억하고 있는 이상, 절대로 이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소화 오년(1930) 삼월 xx일이다. 그러나 이날이 우리나라 역사에 무슨 유기적 관계도 없는 것일 뿐 아니라, 나 이외의 사람에게는 흥미도 없는 일이니 고만두기로 하고, 다만, 저, 해 뜨고 비 오던 날이라면 아는 이는 알 것이다.

이날 나는 '오정 뛰-'[사이렌 시보時報]와 함께 이발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사십여 일 만에 거울과 처음 대하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나는 새삼스러이 이발소 안을 둘러보았다. 언제나 다름없는 이발소였다. 나는 살그머니 살을 꼬집어 보았다. 아팠다.

나는 칠 개월 전과 다름없는 얼굴에 코밑에 '감숭'하던 놈이 '깜숭'하게, 무서운 변화를 보이고 있는 인물을 '경탄'과 더불어 버엉하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

나의 이 '깜숭한 놈'을 누구보다 먼저 칭찬하여 준 것은, 물론, 이발사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레 훌륭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헤, 헤, 헤..."

나는 치밀어오르는 기쁨을 억제할 길 없이,

"흐, 흐, 흐..."

하고 웃었다. (박태원, '수염', 『신생』, 1930, 10.)


**

이발을 하고 난 다음에 이발사는 향수를 머리에다 뿌려 준다. 가끔 향수 바를 것을 잊어버리고 일어날려면 이발사가 눌러 앉히고 발라준다. 바라지도 않는 향수를 처덕처덕 발라주는 것이 마치 가난한 더벅머리 총각을 관례冠禮나 시켜 주는 것 같은 태도로 하는 것 같아서 불쾌하기 짝이 없다...고 언젠가 일기 한 모퉁이에 써 놓은 일이 있다. (박태원, '백일만필百日漫筆', 조선일보, 19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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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돈이 제일이지, 지위가 제일이지'

민주사는, 자칫하였더라면 입 밖에까지 내어 중얼거릴 뻔한 것에 스스로 놀라, 거울 속에서 다른 이들의 얼굴을 찾으려니까, 저편 한길로 난 창 앞에 앉아 있는 이발소 아이 놈[재봉]의 얼굴이 이편을 향하고 있는 것과 시선이 마주쳐, 어째 그 사이 그 놈이 자기의 표정으로 자기의 마음속을 환하게 들여다본 것만 같아, 그는 제풀에 당황하여,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는, 그러나 별로 민주사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 유리창 너머로, 석양녘의 천변 길을 오고 가는 행인들에게 눈을 주었다. (박태원, 『천변풍경』, 1936, 문학과지성사[2005], 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