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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풍경 (7)] 권투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3. 25. 13:57

▲ 동아일보 1931.6.16.

창수는, 우선, 개천 속 빨래터로 눈을 주었다. 한 이십 명이나 모여든 빨래꾼들-, 그들의 누구 하나 꺼리지 않고 제멋대로들 지절대는 소리와, 또 쉴 사이 없이 세차게 놀리는 방망이 소리가, 그의 귀에는 무던히나 상쾌하다.

그는 눈을 들어, 이번에는 빨래터 바로 위 천변의, 나뭇장 간판이 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미 윷을 놀지 않는 젊은이들이, 철망 친 그 앞에 앉아서들 잡담을 하고, 더러는 몸들을 유난스러이 전후 좌우로 놀려가며, 그것은 또 무슨 장난인지, 서로 주먹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한다. 그것이 권투라는 것의 연습임을 배운 것은 그로써 며칠 뒤의 일이거니와, 그러한 장난도 창수의 눈에는 퍽이나 재미스러웠다. (박태원, 천변풍경, 문학과 지성사, 2005[1936], 48쪽)

자기 동무가 이러할 때, 용돌이만 게으르게 놀러 다닌다거나 그러고 있지는 않았다. 원체 힘이 장사요, 또 체격이 좋은 그는, 특히 권투에는 비상한 소질이 있어, 배우기 시작한 지는 비록 반년이 채 다 못나, xx구락부에서는 벌써 가장, 유망한 신진 선수로, 이해 들어서 첫 번 대회에는 기어코 웰트급의 패권을 잡으러, 매일같이 도장에 나가서 맹연습을 거듭하는 것은 매우 기특한 일이다. (같은책, 4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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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형이 집에 없으니. 응당 제가 나서서 집안일 돌보아야만 마땅할 것을 충섭이녀석은 나이 이십이 넘어도 똑 우미관 앞으로만 빙빙 돌며, 툭하면 사소한 일로 남을 치기가 일쑤요, 그러면 또 ‘남 치려다 제가 맞기도 일쑤’로, 곧잘 붕대로 대가리를 둘둘 싸매고 며칠만에야 집으로 들어와서는, 으레, 늙은 아비 화만 돋우고, 늙은 어미 애만 태우고 그러던 것이, 

“너, 사람 치구 대녀야 네 몸에 한푼어치 이로울 것 없느니라. 이로울 것 없어 !” 

하고, 늙은 부모가 입이 아프게 타이르는 말에, 문득, 그는 깨달은 바가 있었던 모양이라, 3년 전부터는 남을 치기는 치되 말썽이 안 난다는, ‘권투’라는 것을 배워가지고, 인제 선수만 될 말이면 일쑤 돈도 잘 벌어들인다고 바로 큰 일이나 하는 듯싶게 꺼떡대는 것을. 늙은 마누라는, 

“얘애. 듣기두 싫다. 남을 치면 고작 지소루나 끌려갔지, 아무리 말세기루 잘 했다구 돈 줄 사람이 어딨단 말이냐? ” 

한마디로 물리쳐버렸던 것이나, 영감은 매일 열심히 보는 신문으로 권투가 어엿한 운동 경기로서, 직업 선수만 될 말이면 사실 돈도 벌 뿐만 아니라, 신문 지상에 사진까지 게재되고, 바로 명예가 대단한 것이라고, 짐작이 있어서, 

‘그저 그런 거래두, 허기만 잘 해라 ! ’ 

은근히 속으로 기대하였던 것이 참말 기대한 보람이 있어, 작년 봄부터는 매우 유망한 선수라고 바로 신문에도 이름은 오르내리나, 그만하면 돈도 많이 탈 듯싶은 것을, 타도 저만 혼자 쓰고 돌아다니는지, 어째 가다 집에 들어와야 주머니 속은 언제든 털터리요, 

집안에 피천 한잎 들여오기커녕은 도리어 때때 카페로 제 누이를 찾아가서는, 담뱃값이 떨어졌느니 어쩌니 하고, 1원씩 2원씩, 뺏어가기가 일쑤인 모양이라, 영감은, 그래, 누구 입에서 혹 충섭이 말이라도 나오면. 

“그 자식. 내 자식 아니오. ” 

그렇게 말하였고, 자기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려 드는 것이었다. (박태원, '골목 안',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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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서울의 시민들은 권투에 대하여 거의 탈선적인 열광을 보인 일이 있다. 그래서 권투구경이라고만 하면 삽시간에 시합장은 초만원이 되는 것이 의례였다. 흑인 '뽀비'의 이름은 실로 '나폴레옹'의 이름에 필적했다. 얼마 동안 나는 이 현상의 원인을 몰라서 흥미를 가지고 생각해 본 일이 있는데 역시 기차 속에서 갑자기 그것을 깨달았다. 

즉 권투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다른 어느 경기보다도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치열한 육체와 육체의 충돌에서 발산되는 생명의 불꽃의 이상한 매력에 틀림없다. 

다시 말하면 피로한 도시인의 생명적인 것에 대한 향수가 그들의 권투열에도 숨어있나 보다. 거기에 환경에 억압된 투쟁본능의 부단不斷한 발효醱酵도 그 한 원인일 것은 물론이다. 우리 문단에서는 평론이라는 것은 우선 싸움이 아니면 아니되는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이러한 곳에들 그 원인이 있는 것이나 아닐까? (김기림, '길을 가는 마음', 『비판』, 19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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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和信' 요사히 서울 장안 사람들의 입과 입에서는 이 '화신'이 한가지 화제에 오르고 있음이 사실이다.

"세계적 권투선수 서정권이가 조선에 나왔다지…."

"그런데 참, 조선이 낳은 무희舞姬 최승희도 요사히 서울에 나왔다데."

으레히 요사히 장안 대로를 활보하는 서울 사람들의 입에서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그들 중에서는 또한 으레히 이런 말소리가 들린다.

"여보게, 자네 화신상회에 구경 안 갈야나? 15일부터 이쪽 본관[화신상회 화재 후 재건축된 화신 동관을 지칭]으로 이전하고 특별 대매출을 하는데 우리 구경을 안 갈야나." 확실히 요사히 서울 장안 사람들의 눈과 발을 멈추게 하는 것은 이 '화신백화점'이다. ('새로 낙성落成된 오층루五層樓 화신백화점구경기' 『삼천리』, 193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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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네거리에서 전차를 잡아 타니 차중車中의 화제는 전부 서정권徐廷權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하는 이들은 산듯하게 차린 청년신사들이 아니면 어느 고등학교인 듯한 학생패들이다. 전차는 탑동공원塔洞公園 앞에서도 이러한 구경패를 한아름 싣고, 또 종묘宗廟 앞에서서도 한아름 싣고 쏜살같이 쏜살같이 훈련원의 운동장으로 닿는다. 운동장 앞은 수십 자동차와, 또 자꾸 계속하여 오는 전차가 수십 명씩 수백 명씩 사람을 쏟아 놓고 가버린다. 

입구의 혼잡은 예상이외로 사람은 사람을 안고 돌고, 부녀아婦女兒들은 인파에 끼어 울음소리를 낸다. 눈 앞에 보이는 군중만도 천여 명이 될까, 겨우 뚫고,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가니 그 넓은 운동장 3면三面 주위는 첩첩 인파로 빈틈이 없이 군중으로 가득 찼다. 얼른 보기에도 약 5,000명 정도의 군중인 듯, 운동장 중앙에는 권투장이 둥그렇게 올려 솟았고, 그 주위에도 사람으로 가득 찼다. 가끔 환성이 "우워우워-"하고 일어나는 것은 아마 정각이 다 되었으니 어서 시작하라는 뜻인 듯, 청년학생들이 많이 모인만치 장내가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신선하고 활기가 흘러 보인다. 누가 가끔 우스운 말을 한마디 툭 건네면 그 주위의 수십 명, 수백 명 군중이, "왓-"하고 환하게 웃는다.

[...]

7시 정각, 오백촉 전광 아래에선, 처음으로 역사적인 이 시합이 개시되었다. 오늘[1935년 10월 21일] 이 광경은 라디오를 통하여 전조선은 물론이요, 세계의 곳곳에서 서정권의 승패 기록을 주시하고 있으리라.

간단한 개회사開式辭가 마이크로폰 앞에서 있은 뒤 뒤이어 여운형呂運亨씨의 거구巨軀가 단상에 오르면서 일장의 감격적인 축하연설이 있었다.... ('무적 서정권 대승광경, 서반아의 강호를 격파', 『삼천리』, 193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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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운동장에서 서정권과 서반아西班牙 선수의 복싱경기가 있었다. 엄청난 관중이었다. 서 선수가 서반아 선수를 제압했다. (『윤치호일기』,  193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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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1위를 목표로

오늘 밤, 세계적 선수 서정권徐廷權군을 환영하는 데 있어서, 벌써 개회사에서, 그에 대한 환영하는 의미와 여러 가지 찬사를 하였기에, 이 자리에서 내가 다시금 환영사라고 해서 별다른 찬사를 한대야 또 그것을 거듭하고, 중복하겠으므로, 서군徐君이 오늘날까지 국제무대에서 빛나게 싸웠다던가 하는, 과거에 대해서는 나로서 말치 않으려 하는 바이며, 다만 아래에 말하려는 세 가지 의미에서 徐君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첫째로 서 군이 반도의 한 어린 소년으로써, 복싱에 있어서 세계무대에 제6위를 점하기까지 싸운데 대해서는 그의 과거를 먼저 위로해야 할 것이며,

둘째로는, 이 세계적으로 빛나는 서군徐君의 장래를, 더욱 맹렬히 꾸준하게 분투하여 나아가기를 위하야 비는 바이며,

셋째로는, 권투조선拳鬪朝鮮의 의기意氣를 널리 세계무대에서 빛내고 있는 오늘날에 와서, 서 군과 같이 전도가 유망한 선수들이, 그 뒤를 계속해서 반도에서 많이 나와주기를 위해서,

오늘 밤 이 서 군 환영의 밤의 모임이 의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어떠한 과학이나, 어떠한 예술이나, 어떠한 스포츠를 물론하고, 그것으로 하여금, 한 민족, 한 사회를 빛나게 하고, 더욱이 세계적인 존재에까지 이르기에는 참말로, 그 과거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피와 땀의 길을 밟어 오지않고는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권투라는 「복싱」에 있어서는 사실로 그 어떤 때에는 피와 땀으로 싸우는 스포츠입니다.

오늘 밤 우리가 환영하는 서 군은 일찍이 20세도 못된 어린 약관弱冠의 몸으로, 머나먼 외국으로 건너가, 더구나 그 체구라던지 모든 것이 우리보다 훨씬 우월한 백인白人들을 상대하여, 다만 맨주먹싸움인 권투로써, 피와 땀을 흘려가며, 재미在米 3년 반이라는 짧은 시일에 일약 제6위의 영예를 얻게까지 되었다는 것은 실로 용이한 일은 아닙니다.

더구나, 아직 나이 23세의, 더구나 직업선수로서 그렇게 세계적으로 빛나는 전적을 남겨 놓았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가 만약 외국 사람들과 같이 훌륭한 지도자와, 여러 가지로 도와주는 사람을 가젔었다면 그래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었겠지만 서 군이야말로 오직 단신單身으로, 훌륭한 지도자를 못가젔으며, 단신 두 주먹으로 피와 땀을 흘려서 싸운 결과도 미국의 '달러리즘'[dollarism]에 희생이 되고, 바쳐진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음을 알 것입니다.

그를 증명하는 예로는 우리는, 그가 재미在米 3년 반, 전미全米를 흔드는 인기 속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하여 가면서, 수많은 돈을 모았고, 그가 귀국할 때에는 적어도 수십만원의 돈을 안고 돌아오리라는 소식을 여러 소식통으로서 늘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에 돌아온 서 군은 아무런 소식이 없음을 볼 때, 그가 재미 3년 반이라는 동안을, 실로 피와 땀을 흘려가며 50회에 가까운 '게임'에서 얻은 수십만의 황금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의 뒤에 숨은 어떤 '기업가'에게 자기의  '기술'과 노력을 빼앗기우고 돌아왔음이 사실인 듯 합니다.

과연 오늘에 승리의 기록을 국제무대에 남겨놓고 돌아온 徐君으로 말하면, 전세계적인 선수들을 상대하여 용감하게 잘 싸운 결과, 반도남아半島男兒의 의기意氣를 널리 세계에 빛냈을 뿐이고, 그의 땀과 피와 이익을, 빨아 먹은 사람은 따로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읍니다.

서 군은 다만 두 주먹에 빛나는 '투지' 때문에 그들에게 환영된 것이 아니고 그를 한갓 상품취급의 한 이용물로서, 그들에게 모든 피와 노력을 바쳐왔었던 것입니다. 서 군이 얼마 전에 처음으로 요코하마橫濱에서 내려, 동경에서, 필리핀比島의 제일인자와 일전一戰을 갖기로 되었을 때 '일본권투연맹'과 '일본권투구락부'의 이 두 단체는 서로 그 주최권을 앞에 놓고 싸우는 추태를 나타내고 말았습니다.

▲ '테이켄 조' (Teiken Jo) 서정권과 매니저 프랭크 타보

더구나, 그 때의 서 군으로 말하면 오래인 선해여행航海旅行의 피로와 다리에 난  '종기'로 해서 동경순천당병원東京順天堂病院에서 2주일의 치료를 요하는 진단서를 내게 되었으므로, 이 시합을 중지하자고 하였으나, 주최측에서는, 폭력단을 사용하는 등, 모든 추악하고, 언어도단의 만행을 감행하였으므로, 서 군은 병 중의 몸으로 2백여명의 경관에게 포위되어 부득이 출전하게 된 사실을 보더라도 실로 오늘날의 스포츠계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바이며, 통탄할 노릇입니다.

더욱이 요사히 조선의 신문사들을 바라보면, 그 내용이야 더욱 한심스럽고 부끄러운 현상입니다. (이것은 내가 신문사에 관계한 사람으로서 말하는 바입니다)

서 군을 환영한다던지, 어떠한 선수를, 환영한다고 떠드는 그 이면을 바라보면, 그에 대한  '기술'이나 '공로'나, '노력'을 널리 알리고, 환영함이 아니고, 모두가 자기의 선전용구로서 그들을 이용함이 사실인가 합니다.

아무리 오늘날 이기주의사회에 있는 신문사라 하더라도 그렇게도 자기들의 선전과 이익을 위함은 실로 한심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해서 오늘 밤 여기에 모인 우리들은 참말로, 진실로, 성심으로, 서 군이 과거에 피와 땀으로 싸워 올린 승리와 영예를 축복하는 동시에, 오늘날 세계 6위라는 세계적 지위를 찬탄하는 바이며, 더욱 그 전도양양한 앞길에 조금도 쉬지말고, 세계에 제1위를 점할 때까지 굳세게 싸워나가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끝으로, 이  '복싱'의 각 급을 통해서, 반도의 남아들이 모조리 전세계무대에 나서서 제1위를 빼서 오기 위해서 우리는 이 모임을 가젔고, 이 서 군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여운형, 1935년 9월 18일 오후 6시 조선일보 강당에서 개최된 '서정권 귀국 환영의 밤' 환영사, '여운형 연설집', 『삼천리』, 1936.1. 부록, )


▲ 대한뉴스 306호 (1961.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