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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마코, 피죤, 해태표, 단풍, 장수연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3. 22. 18:45

▲ 마코

물론 사람에 따라서 취미는 다르오마는 아마도 우리 젊은이의 입에는 '피죤'이나 '마코-'가 알맞을까 보오. '카이다'[해태표]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소. (박태원, "기호품 일람표", 동아일보, 19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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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람값 찾는 세상인가요. 통틀어 말하면 있는 놈과 없는 놈의 싸움인데, 싸우는 수단이 여러 가지거든요. 미인은 얼굴로 싸우고, 김홍근이는 입심으로 싸우고, 노름꾼은 마작으로 싸우고…… 하하하."

하며 봉익이는 웃어 버리닥 다시 정색으로 결론을 맺는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놀리거나 흉보지는 않아요. 요새 청년─ 소위 인텔리 분자로서 할 일이 있어야지요. 먹을 도리가 있어야지요. 그 사람들만 나무라겠습니까. 공창公娼을 허락한 이 사회에서, 사창私娼을 묵허하듯이, 그런 좀팽이도 사회적으로 무인해 두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무엇으로 싸우십니까?"

"나요……?"

하고 봉익이는 싱긋이 웃기만 하며, 착 달라붙은 마코갑을 꺼내서 한 개를 빼물고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는다.

문경이는 부싯깃 같은 분홍빛 담뱃갑을 보고, 좌석에 어울리지 않는 '구차'를 느끼면서 얼른 집어치울 생각도 나고, 한 갑 사주고 싶은 호의도 났다.

[...]

'돈 만원에 금이 간 부부생활이면야 그렇게 행복한 부부도 아닐 것이다. 어떤 남자거나 참된 애욕이라면 감사하다는 그 감사조차 남편에게는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봉익이는 이왕 금이 갔을 바에야, 어서 쪼개져 버립시사고 축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피천 없는 무산자라도'라는 말을 생각하면 모욕을 느끼었다. 구차가 죄악도 아니거니와, 수치도 아니기는 하지만 굴젓눈이 죄도 아니요 수치도 아니라고 하면서, 남의 앞에 가면─ 더구나 여자 앞에 가면 쭈뼛거려지고 무안스러운 듯이 봉익이는, 여자의 돈으로 산 해태표갑을 요릿집에서 넣고 나온 것부터 마음에 굽 죄이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염상섭, 『무화과』,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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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코 갑이 번연히 빈 것인 줄 알면서도 다시 집어다 눌러 보았다. 주머니에는 단돈 십 전, 그도 안경 다리를 고친다고 벌써 세 번짼가 네 번째 딸에게서 사오십 전씩 얻어 가지고는 번번이 담뱃값으로 다 내어보내고 말던 최후의 십 전, 안초시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것을 집어 내었다. 백통화 한 푼을 얹은 야윈 손바닥, 가만히 떨리었다. (이태준, '복덕방',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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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죤

창수는 한달음에 다리[배다리] 모퉁이 반찬 가게로 뛰어갔다.

"담배 한 갑 주세요. 마코요.... 아니, 저, 피죤요."

아버지는 늘 마코만 태우신다. 구장 영감도 피죤을 태우는 것을 못 보았다. '쥔영감'은 참말 부잔가 보다. [1936] (박태원, 『천변풍경』, 문학과 지성사, 2005,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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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꿎은 담배만 태웠다. 한 갑... 두 갑.... 세 갑... 그러나, 설혹 담배를 태우면 소설이 써진다손 치더라도, 아마 세 갑쯤으로는 아무 보람이 없는 듯싶었다. 나는 으레 네 갑째의 피죤을 빈 갑을 만들어 놓고 아침부터 이제까지 공연히 잉크를 찍어서는 그대로 말리고 찍어서는 그대로 말리고 한 원수의 펜을 내동댕이치고 그대로 자리에 쓰러져버리는 것이다. (박태원, '적멸',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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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담배부터 하나 내게. 내 턱은 그저 무어나 들어오라는 턱일세."

하며 병화는 방 안을 들여다보고 손을 내밀었다.

"나 없을 땐 소통 담배를 굶데그려."

덕기는 책상 위에 놓인 피죤 갑을 들어 내던지며 웃다가,

"그저 담배 한 개라도 착취를 해야 시원하겠나? 자네와 나는 착취와 피착취의 계급적 의식을 전도시키세."

하며 조선옷을 훌훌 벗는다.

"담배 하나에 치를 떠는--천생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다!"

병화는 담배를 천천히 피워서 맛이 나는 듯이 흠뻑 빨아 후우 뿜어내면서,

"여보게, 난 먼저 나가서 기다림세. 영감님이 나와서 흰동자로 위아랠 훑어보면 될 일도 안 될 테니까!"

하고 뚜벅뚜벅 사랑문 밖으로 나간다. (염상섭, 『삼대』,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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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 도적은 이 방안에서 훔칠 수 있는 것은 남기지 않고 훔쳐갔다고 할밖에 없었다. 양복장 속에 넣어 두고 먹던 피죤 한 상자가 어제 낮에 볼 때, 분명히 대여섯 갑은 남았었는데, 그것마저 없는 것을 보면, 넥타이를 남겨 두고간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박태원, '투도',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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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다(해태표)

"왜들 그래? 젊은 사람들이 술들을 먹거든 곱게 삭여야지! 그러나 애들 썼네! 우선 한숨들 돌리게."

하고 외투 주머니에서 해태표를 꺼내어 일일이 권하러 돌아다녔으나 두 청년은 손으로 탁 쳐버리고 상훈은 권하지도 앉으니까 차례에 못 가고 병화만 하나를 받아서 붙여주는 불에 붙이었다. 경애도 피워 물었다.

 "눈이 쌓이고 이 좋은 날  이 속에서 싸우다니... 훈련원 벌판, 아니 경성 운동장으로 가서 최후의 결승을 하거나 장충단 솔밭에 가서 결투를 해버리는 게 옳을 일이지." (염상섭, 『삼대』,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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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십자각 옆에까지 온 P는 그 건너편 담배 가게 앞으로 갔다.

"담배 한 갑 주시오."

하고 돈을 꺼내려니까 담배 가게 주인이,

"네, 마콥니까?

묻는다.

P는 담배 가게 주인을 한번 거듭떠 보고 다시 자기의 행색을 내려 훑어보다가 심술이 버쩍 났다. 그래서 잔돈으로 꺼내려는 것을 일부러 일 원짜리로 꺼내려는데 담배 가게 주인은 벌써 마코 한 갑 위에다 성냥을 받쳐 내어민다.

"해태 주어요."  

P는 돈을 들이밀면서 볼먹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담배 가게 주인은 그저 무신경하게  네―  하고는 마코를 해태로 바꾸어 주고 팔십오 전을 거슬러 준다.

P는 저편이 무렴해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욱 얄미웠다.

그는 해태 한 개를 꺼내어 붙여 물고 다시 전찻길을 건너 개천가로 해서 올라갔다. 이제는 포켓 속에 남은 것이 꼭 삼 원하고 동전 몇 푼이다. 엊그제 겨울 외투를 사 원에 잡혀서 생긴 것이다. (채만식, '레디메이드 인생',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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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에 출시된 담배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승호는 담배에 불을 붙여 물며, 그저 난로 곁에 가 서 있는 애녀석이,

"선생님, 카이다만 잡수십니다그려."

무심히 한마디 하는 말에도, 스스로를 비웃는 웃음을 픽 웃고,

'참말이지, 계집이 얻어다라도 주지 않으면, 담배 한 대, 변변히 태우지를 못하고…… 술을 따라, 아양을 떨어, 벌어 온 몇 푼의 돈이 아니고는, 한 끼, 설렁탕 한 그릇이나마……' (박태원, '비량',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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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단풍 한 개를 피워 물었다. 뽀얀 연기가 안개 같아야, 원래 안개는 아니었다. 동그란 안개 안 지경이 좁기는 좁으나, 박힌 것이 아니요 가면 늘 고만큼은 트였다.  그는 조선은행 앞을 지나 장곡천정으로 뚫린 길을 마악 비어 건너서였다. 웬 검은 중절모를 눌러쓴 사나이가 그에게 담뱃불을 청하였다. 그는 담뱃불을 붙이고 있는 사나이의 얼굴을 잠깐 살펴보았다. (박노갑, '무가霧家', 1940)

▲ 영화 「미몽」(1936) 중에서

“아주머니 안 잡수세요?”

하고 숭은 한갑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서 먹게. 나 먹을 건 부엌에 있지.”

하고 한갑 어머니는 마른 호박잎을 쓱쓱 손바닥에 비벼서, 아마 한갑이와 공동으로 쓰는 것인 듯한 곰방대에 담아서 화로에 대고 빤다. 이것이 호박잎 담배라는 것이다. 가을이 되면 콩잎 담배 가 생기거니와, 그때까지는 호박잎 담배로 산다. 정말 담배를 사먹는 사람이 이 동네에 몇 집이나 될까, 얻어만 먹어도, 대접으로 한 줌을 주기만 하여도 죄가 되는 이 세상이거든. 한갑이가 짚세기를 삼아서 장에 내다 팔아서 장수연 한 봉지를 사다가 주면, 어머니는, 

“돈 없는데 이건 왜 사왔니?” 면서도 맛나게 피웠다. (이광수, 『흙』, 1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