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과 희경은 종각 모퉁이를 돌아 광충교[광교]로 향한다. 신용산행 전차가 커다란 눈을 부르뜨고 두 사람의 앞으로 달아난다. 두 사람은 컴컴한 다방골 천변에 들어섰다. 천변에는 섬거적을 펴고 사나이며 계집들이 섞여 앉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웃다가 두 사람이 가까이 오면 이야기를 그치고, 컴컴한 속에서 두 사람을 쳐다본다. 두 사람이 아니 보이리만 하면 또 이야기와 웃기를 시작한다. 혹 뒤창으로 기웃기웃 엿보는 행랑 까지의(아씨의) 동백기름 번적번적하는 머리도 보인다. 희경은 가끔 길을 잊은 듯하여 우뚝 서서 사방을 돌아보다가는 그대로 가기도 하고, 혹 '잘못 왔습니다' 하고 웃으며 오륙 보나 뒤로 물러 와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어떤 집 문 밖에는 호로 씌운 인력거가 놓이고 인력거꾼이 그 인력거의 발등상에 걸앉아 가늘게 무슨 소리를 한다. 계옥이니 설매 니 하는 고운 이름을 쓴 광명등이 보이고, 혹 어디선지 모르나 '반나마-' 하는 시조의 첫 구절이 떨려 나오며 그 뒤를 따라 이삼 인 남자가 함께 웃는 듯한 웃음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화류촌이로구나 하였다. 처음 이러한 곳에 오는 형식은 이상하게 가슴이 서늘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행여 누가 보지 않는가 하고 얼른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기도 하였다. 남치마 입은 기생 두엇이 길 모퉁이에서 양인을 보고 소곤소곤 하며 웃고 지나갈 때에 형식은 남모르게 가슴이 뛰고 얼굴이 후끈하였다. 양인은 아무 말도 없이 간다. 양인의 구두 소리가 벽에 울려 이상하게 뚜벅뚜벅 한다. 희경은 몇 번이나 길을 잃었다가 마침내, 여기올시다 하고 어떤 광명등 단 집을 가리킨다. 형식은 더욱 가슴이 서늘하며 그 대문 앞에 우뚝 서서 광명등을 보았다. 계월향!
[...]
아까도 영채를 보고 곧 자기의 얼굴과 비교해 보았다. 그때에 선형은 매우 영채를 곱게 보았다. 친해 두고 싶은 사람이로군 하였다. 그러나 알고 본즉, 그는 다방골 기생이다. 형식이가 자기의 얼굴과 더러운 기생의 얼굴을 비교할 것을 생각하매 더할 수 없이 괘씸하다. 영채의 얼굴이 비록 곱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생의 얼굴이다. 내 얼굴이 비록 영채의 것만 못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양반집 처녀의 얼굴이다. 어찌 감히 비기랴 한다.
형식의 끈끈한 것을 보건대 당당한 여학생인 자기보다도 아양을 떨고 간사를 부리는 영채를 곱게 볼 것 같다. 영채가 무엇이냐, 다방골 기생이 아니냐, 하여 본다. 형식이가 계월향이라는 기생과 좋아하다가 평양까지 따라갔다는 말을 들을 제 형식을 조곰 의심하게 되고, 그 후 형식이가 자기더러 나를 사랑하시오? 하고 염치없는 소리를 물으며, 나중에 자기의 손을 잡을 때에 과연 기생집에나 다니던 버릇이로다 하였고, 지금 와서 선형은 더욱 형식을 더럽게 본다. 한참 악감정이 일어난 이 순간에는 선형의 보기에 형식은 모든 더러운 것, 악한 것을 다 갖춘 사람 같다. (이광수, 『무정』, 1995[1917], 동아출판사)
**
개천 건너 남쪽 천변으로 기생 탄 인력거가 호기 있게 달려가는 것이 눈에 띄자, 그[점룡이 어머니]는, 순간에, 일종 부러움 가득한 얼굴을 해가지고,
"뭐니, 뭐니 해두, 호강은 니가 제일이다."
거의 한숨조차 섞어서 하는 말을, 막 빨래를 마치고 일어서서 아픈 허리를 펴고 있던 귀돌어멈이 듣고,
"누구, 말예요?"
그의 얼굴을 쳐다보니까, 점룡이 어머니는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이,
"언년이 말이오. 취옥이 말이야. 걔 어머니가 걔 기생으로 집어넣군 아주 막 호강허는데?…… 언년이가 바루 이쁜이허구 한 동갑이지. 열네 살부터 소리를 배워가지구, 작년 봄엔가, 열여덟에 머리를 얹었는데, 인젠 아주 잘 불려 다니는데? [...]"
그리고 또 소리를 낮추어
"그래, 내가 이쁜이 어머니한테두 여러 번이나 권했지. 이쁜이두 권번에다 넣으라구. 그럼 그년 팔자두 해롭지 않거니와 마누라두 딸의 덕을 볼 게 아니냐 말야? 헌데, 딸 기생에 넣어라는 걸, 이건 무슨 큰 욕이나 되는 줄 아는군그래, 이쁜이 어머니는. 내가 그 얘기만 꺼내면 아주 딱 질색이지. 그게 내 딸이 아니니까 맘대루 못허지, 그저 내 조카딸쯤만 돼두, 꼭 우겨서 권번에 넣구 말았지. 아무렴 그렇다마다, 모두들 인물이 잘나지 못해 못 되는 게지. 아, 이쁜이만큼 이쁘다면야 그걸 왜 그냥 둬? [...] 그야, 양반으루, 부자루, 다 같은 집안에다 시집이래두 보낸다면, 그건 혹 몰라두, 어려운 집 딸자식은 그저 파닥지나 추하지 않으면 별수 없어. 소리나 가르쳐서 기생으루 내놓는 것 밖엔 [...] 그래, 그렇지 않수?" (박태원, 『천변풍경』, 문학과 지성사, 2005[1936], 22-23)
▲ 다동/다옥정/다방골 기생조합(1910) → 대정권번大正券番(1919) → 조선권번朝鮮券番(1923)
**
그 이튿날이다. 아침을 마치고, 궐련卷煙 한 개를 피워 문 내가 이리 저리 마당을 거닐 때였다.
"편지 받으오"
하는, 소리를 듣자, 누런 복장이 얼른 하며, 하얀 네모난 종이가, 중문中門 앞에 떨어진다. 그것은 엽서형葉書形 서양 봉투이었다. 매우 이상하다는 듯이, 나는 겉 봉을 앞뒤로 뒤치며, 한 참 보고 있었다. 그러다 사방을 둘러보기가 무섭게, 얼른 호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또 꺼내었다. 또 넣으려다 말고, 손에 움켜 쥔 채, 어찌 할 줄 모르는 것처럼, 왔다갔다 하엿다. 문득, 미친 듯이 건넌방으로, 뛰어들어왔다. 그것은 춘심春心의 편지이다! 앞장엔 한 자, 한 획 틀림 없이 우리 집 번지와 나의 이름을 적었고, 그 뒷장엔, '다옥정茶屋町 00 번지 김소정金小汀으로부터'이라 쓰이여 있다.
나는, 번개 같이, 봉투 웃머리를 찢었다. 안에서 그림 엽서 한 장이 나온다. 굽이치는 물결 모양으로, 검누른 머리를, 좌우로 구불구불 늘어뜨리고,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얇다란 한 오리 벼자취가, 아른아른 하게 감긴, 농염한 두 팔과 안 가슴을 눈 같이 들어 내었는데, 장미꼿 한 송이를, 시름 없이 든 손으로, 턱을 고이고, 눈물이 도는 듯한 추파에 님 생각이 어린 금발 미인의 그림이었다. 그리고, 이쁘게 언문반초諺文半草를 날린 그 사연은, 아주 간단하였다. 보통 수신자受信者의 주소 씨명을 쓸 자리 한 복판에 두 줄로, '아무리 기다려도 아니 오시기로 두어자 적사오니, 속 보시지 마시압'이라 하였고, 그 밑 간間 글월은 이러하였다.
'보고 싶어. 흥응. 왜 오시지 안습니까. 기다리는 제 마음 행여나 아실는지. 지정 일변 아시겠소. 어찌하면 좋을까요?'
이 때의 기쁨이야 무어라 할는지! 가슴에 무슨 경기구輕氣球[풍선] 같은 것이 있어, 나를 위로 위로 추슬러 올리는 듯 하엿다. 길길이 뛰고 싶었다. 날고 싶었다.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쁨을 말하고 싶었다. 종로네거리에 뛰어 나가, 오는 사람, 가는 사람에게, 춘심이가 나에게 편지 한 것을, 알려도 주고 싶었다.
밑장을 화닥닥 열었다. 무슨 큰 일이나 난 듯이, 안 방에 있는 아내를 소리쳐 불럿다.
"이것을 좀 보아요. 이것을!"
아내가 방에 들어도 서기전에 무슨 경급한 일을 말하는 사람 모양으로, 나의 소리는 헐덕거렸다.
"춘심이가, 나에게 편지를 했구려. 편지를!"
하고, 온 얼굴이, 웃음에 무너졌다. (현진건, '타락자', 『개벽』, 1922.2.)
▲ 돈의동 명월관 내부
**
다방골은 본래 부자 많기로 장안에서 유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옛날일이요, 지금은 부자 대신으로 기생 많기로 장안에서 제일입니다. 기생은 조선의 명물이라, 이 한나라의 명물이 한 동리에 모였으니 어찌 다방골의 명물만 될 수 있겠습니까? 좌우간 한 나라의 명물이 다방골에 모였으니 명물 중에도 짭짤하고, 값비싼 명물입니다.
서울 안에 기생이 대략 삼백 명이 있는데, 다방골에만 육십 명이나 있다 하니 어찌했던 굉장하지 않습니까. 이 명물을 찾아 달 밝은 밤마다 들창문으로 새여 나오는 은방울 소리 같은 노래를 찾아서 문 앞에 대령하여 보는 곳도 꽃을 탐하고 버들을 꺾는 풍류남아로 한번 하여볼만한 노를일 것입니다.
기생도 조선에 명물인만큼 그 역사도 당당하였지요. 정승판서도 슬슬 기였지요만은 이것도 옛날 일입니다. 지금은 한 시간 얼마씩 팔리는 값싼 몸으로 뜻도 안 둔 손[客] 앞에서 웃음을 팔게 되었습니다. 웃음을 팔고 한숨을 사는 가련한 그들의 신세- 어느 곳 사람이 없으리요만은 색향으로 연상되는 평양기생이 제일 많답니다.
(동아일보, 1924.7.5.)
'친절한 구보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변풍경 (5)] 원산 - 명사십리와 송도원 (0) | 2019.03.22 |
---|---|
[천변풍경 (4)] 당구장 '께임도리' (0) | 2019.03.22 |
구보씨의 고현학 강의 (0) | 2019.03.21 |
[천변풍경 (2)] 평화카페 하나코 (0) | 2019.03.21 |
시계가 걸린 자리 (0) | 2019.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