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오 - 가을 (1)] 기호의 산보
"산보 좀 허구 오리다." 빨래하던 손을 멈추고 놀라 멍멍히 쳐다보는 아내에게 말해버리고 기호는 집을 나섰다. 暮雲千里色 모운천리색 無處不傷心 무처불상심 ─ 형숙荊叔 거리에는 벌써 저녁빛이 어리고 있었다. 이따금 산뜻산뜻 불어오는 바람이 맑고도 차다. 하늘에는 붉게 놀이 뜨고 그 빛이 집집 지붕 위에 던져져서 역광선으로 보면 그 모든 지붕이 마치 눈부시는 황금색 테를 두른 것같이 보인다. 창경원 문앞까지 왔을 때 기호는 문득 발을 멈추고 지붕 추녀끝을 쳐다보기 시작하였다. 보통 때는 때묻어 보이고 무겁고 둔해 보이는 추녀였으나 이렇게 맑은 가을하늘 밑 황금색 저녁 햇빛에 비쳐보는 감각은 무슨 아름다운 꿈을 품고 금시로 푸른 하늘로 내딛을 듯이나 가볍고 산뜻해 보인다. 보고 있는 동안에 기호의 눈은 점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