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시골 사람으로 서울에 와 있으면서 이런 말을 하기는 미안하지만은 나는 언제나 근본적으로 시골 사람의 서울 오는 것을 불찬성不贊成한다. 시골 사람이라도 무슨 특별한 일이라던지 주의主義가 있어서 서울을 구경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 다만 풍조風潮에 딸려서 외형外形의 번화한 것이라던지 사치한 것만 취取하여 구경한다면 그야말로 장님 코끼리 만지기(盲者丹靑) 구경 이상으로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허영심, 사치심만 늘어서 여간한 악영향을 입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시골 사람들이 도회에 유혹이 되어 자꾸 도회로 집중하려 하고 또 근래에는 농촌의 생활곤란, 기타 어떠한 일시적 기회로 인하여 1개월에 몇천 몇만의 시골 사람들이 서울을 오게 되는 것이야 그 누구가 막을 수 있으랴. 그런데 기왕 서울을 오게 된다면 나는 이러한 말을 부탁하고 싶다. 즉 경성京城은 도로의 개통, 시가市街의 즐비, 건축의 굉대宏大, 그러한 모든 시설이 완비하고 외면이 번화한 반면에는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빈민굴이 있는 것을 알어야 할 것이라고. 지금 조선朝鮮에 있어서 어느 지방에 빈민굴이 없는 곳이 없지만은 서울의 빈민처럼 참혹한 현상은 없을 것이다. 진고개와 종로 같은 번화지를 보는 동시에 신당리新堂里, 공덕리孔德里 같은 빈민굴을 보아, 어찌하면 저런 사람들도 잘 살게 할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고 또 다른 시설보다도 조선인의 일반 교육시설을 잘 살펴서 교육의 필요를 확신하는 동시에 자제子弟를 많이 학교에 보내서 유위인물有爲人物을 많이 양성하도록 하는 것이 좋은가 한다. (송진우, '교육의 시설과 빈민굴에, 경성京城에 와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별건곤』 19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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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촌貧民村
기름진 논밭 전지를 다 뺏기고 먹으려니 밥이 없고 잠자려니 집이 없어 그리운 산천을 등지고 남부여대하여 강냉이 조밥이나마 얻어먹으려고 수천만 리 먼먼 길을 산 넘고 물 건너 몰려 가는 것이 쪼들리고 구차한 조선 사람의 현상이다. 그러고 장안 살림을 지탱해 갈 수가 없고 집 없고 터전 없어 동문 밖 서문 밖 문 밖으로 쫓기어 나가는 것이 가난한 서울 사람의 한낱 피해 갈 곳이다. 서울의 빈민촌을 찾아내라니. 서울 사람, 아니 조선 사람이 특수한 계급을 제[除]해 놓고서 누가 빈민 아닌 사람이 있겠는가만은 이렇게 가난한 서울 사람 중에도 할 수 없는 사람은 모조리 문 밖으로 몰려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문 밖에 사는 사람이 전부가 빈민이라는 것은 아니지만은 그중에도 서울의 빈민촌으로 대표가 될만한 곳은 수구문[光熙門] 밖 신당리新堂里를 손꼽아도 과히 흠잡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 신당리는 왕십리往十里로 가는 큰길 연변의 불과 얼마 못 되는 초옥草屋을 제[除]한 전 호수 2,700여 호의 반 수 이상이 사람이 거처하는가 싶은 토막土幕들이다. 이러한 신당리에도 300석 이상으로 천 석의 추수를 받는 부자도 있으나 그 외에는 공장의 직공과 회사의 고용인들이고 대개는 그날그날에 몇십 전씩의 품삯을 받아 평균 다섯 사람이나 되는 식구를 길러 간다. 그러나 일정한 직업이 없이 날품(日雇用)을 하는 사람들에게 날마다 돈벌이가 있으란 법 없어 그날의 먹을 것을 얻지 못하고 어른 아이가 주린 배를 부둥켜안고 있는 식구들이 또한 많다.
이 신당리는 처음에는 인가[人家]라고는 얼마 없고 산등성이는 공동묘지였든 것이 최근에 와서 점점 공동묘지는 없어지게 되자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양 철조각'으로 지붕을 잇고 '거적 조각'으로 벽을 삼아 비와 바람을 막고 사람의 살림이 아닌 사람의 살림을 하고 있다. 신당리의 빈민을 나누면 빈민과 궁민窮民이며 토막士幕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궁민들이다. 이 궁민들의 사는 모양을 들여다보면 과연 눈으로 볼 수가 없다. 물론 이들은 건축 허가 없이 밤 동안에 집 한 채를 지어 놓고 세금이란 무슨 세금이고 아무 상관이 없고 책임이 없다. 물론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한 손으론 기둥을 붙들고 한 손으론 지붕을 누르고 섰다. 새벽이면 세상에서는 제일 먼저 일어나서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어서 정한 곳 없이 일터를 찾아간다. 그날 하루를 온종일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벌지 못한 날은 별수 없이 굶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다. 요행히 몇십 전 생긴 날은 조粟 한 봉지에 비지 한 덩이를 사 들고 토막土幕을 찾아간다. 철 모르는 아이와 불쌍한 아내는 조쌀 한 봉지 사들고 들어 오는 남편과 아버지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애조리며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대개가 시골서 농사를 짓다가 농터가 떨어지고 흉년이 들고 해서 먹을 것은 없고 서울이 좋다는 말을 듣고 홑 몸으로 혹은 처자를 거느리고 벌이 좋고 돈 흔하고 살기 편한 서울을 찾아 믿을 사람 없는 백사지 땅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들에게 일을 주고 먹을 것을 주는 서울은 아니었다. 그들은 갈 곳이 없고 잠 잘 곳이 없어 이곳에다 토막을 짓고 차마 눈으로 보기 어려운 살림을 하고 있다. 그 나머지 길가 근처에 잇는 초가들은 역시 빈민들이랄 수밖에 없으며 들은 대개가 공장 직공이나 날품(日雇) 노동자가 많다. 그중에는 중국인(支那人)이 30호戶 가령 살고 있는데 어디를 가든지 근검勤儉한 그들은 역시 몇 사람 석공石工을 제[除]한 외에는 전부가 그 근처의 땅을 얻어서 농사를 짓고 있다. 또 백여戶나 되는 일본인은 거의 다 일정한 월수입이 있어서 그들의 생활은 빈촌貧村에 있으면서도 조선 사람의 생활 내용에 비하면 토대가 잡히고 구차하나마 여유가 있다. 그 근방의 토지는 대개가 동척東拓[동양척식회사]의 소유가 되고 조선 사람의 소유로는 시가時價로 불과 4,5만 원이라 한다. 이러하니 이제 다시 한숨 쉴 바 아니련만 한심치 않은가. ('대경성의 특수촌', 『별건곤』 19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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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京電[경성전기회사]에서 나온 백만 원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고 연구하기에 벌써 1년의 세월을 보내었다. 내 조그맣게 소리치노니 백만 원으로 주택 천 호千戶를 지어서(매호每戶 천 원씩千圓式), 그래서 집 없는 빈한貧寒 시민을 수용하여라. 송월동松月洞과 東小門안 빈민굴에 철퇴령撤退令을 내려 토막민土幕民들의 비루悲淚를 본 기억이 어제 같지 않느냐 ('종로네거리',『삼천리』193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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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 산재한 토막민 5천 호에 2만 명
서릿발 치는 겨울을 앞두고 한 간의 두옥[斗屋]이나마 소유하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을 가련한 신세를 가진 사람이 많은 대경성의 한 복판에서 또 해마다 그 수가 늘어가고 있다.
최근 경성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경성을 중심으로 부[府] 내외에 산재한 토막민은 근 2만 명의 숫자를 보이고 있다 한다. 즉 그 숫자를 부내 각 경찰서 관내로 본다면
- 동대문서 관내 2,804호 12,668인
- 서대문서 관내 110호 550인
- 종로서 관내 16호 53인
- 본정서 관내 6호 25인
- 용산서 관내 244호 1,045인
합계 3,180호 14,341인
이 외에 지난 소화 7년[1932]부터 경성부 사회과에서 토막민 구제를 목적하고 사설한 부[府]의 아현리阿峴里 토막민 수용소에 수용된 수효가 약 1천 호에 5천 인에 달하고 있으며, 노고산老姑山 수용소에 약 3백 호에 5백여 인이 수용되어 있으므로 그 전부를 합하면 겅성을 중심으로 약 5천 호에 2만 명의 생령이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현상이라는 바, 최근 수년의 통계를 보면 매년 약 3백 호에 천 명의 비율로 토막민은 늘어가고 있다 한다. 이러한 놀라운 현상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된 경성부에서는 금후 4개년 계획으로 부의 정릉리貞陵里와 홍제외리弘濟外里에 토막민 수용소를 건설하여 매년 약 2천 호의 토막민을 수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나 아직 그 계획은 구체화하지 못하고 명년도부터나 실현될 것 같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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