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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소와 욕실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4. 3. 18:20

경성역─앗다. 그리 쫏겨 나가듯 급하게 나가지 말고 정거장 속을 구경 좀 하여요. [...] 지하층에 기차 발착장發着場과 식당과 사무실이 있고 또 화양和洋 요리점이 있고 창고가 있고 그러고 일층에는 대합실 귀빈실 무료변소無料便所유료변소有料便所가 있고 2층 우에는 사무실과 대소 식당이 또 있어서 제일 비싼 서양요리를 주머니 큰 손님에만 대접한다네.

"유료변소란 무언가." 흥 그러게 서울이 고맙다지. 자네도 대변이 급한 때 2등 대합실 변소나 3등 대합실 변소라도 가보아서 만원滿員이 되었거든 유료변소로 가요. [...] 깨끗이 꾸민 변소인데 돈 3전만 내면 들어가 눈다네. ('2일 동안에 서울 구경 골고로 하는 법', 『별건곤』, 19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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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수건과 비누를 들고 목욕탕을 나서다가 무슨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나는 이것을 잊을까 두려워, 오직 그 생각 하나에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나, 거기서 연상(聯想)의 가지가 돋치는 다른 생각 때문에, 기록할 때까지 기억해 두 지 않으면 안 될 수효가 늘어, 점점 복잡하게 된다든지, 또는 큰길을 건널 때 자동차를 피하다가, 혹은 친구를 만나 인사와 이야기하는 얼마 동안, 깨끗이 그 생각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다. 생각났던 것을 생각하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지 못할 때의 괴로움과 안타까움은 거의 나를 미치기 직전에까지 몰아가곤 한다. 그러므로 목욕이나 이발 시간같이, 명상의 시간이 주어지면서도 연필과 종이가 허락되지 않는 때처럼, 나 같은 메모광에게 있어서 부자유한 시간은 없는 것이다. (이하윤, '메모광', 『문장』, 19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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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길룡, 'K군의 주택' 설계도 (1932)

"그거 무어 어찌 대단한 욕심인가!"하고 친구들이 비웃듯이 생각하면 참으로 하잘 것 없는 작은 욕심이지만 나는 우선 수세식 변소와 욕실이 붙어 있는 집을 가졌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중에 제일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변소인데 요새같이 청소인부가 임금이 싸다고 잘 붙어 있지 않아서 잘해야 한 달에 한 번 가량밖에 변소를 쳐가지 않는 때에는 그런 생각이 더욱 절실하다. 이야기가 추해서 대방大方의 청흥淸興을 깨트릴까 보아 기다란 설명을 붙이지 않지만 나뿐 아니라 누구든지 수세식 변소를 갖지 않은 사람이면 날마다 당하는 그 정경이 실로 딱할 것이다. 그런 변소에서 나와서도 그래도 아주 양복을 버젓하게 버티어 입고, 기침하고 나서는 것을 생각하면 제 스스로가 분반噴飯할 지경이다[입 속의 밥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우습다].

여기 비하면 시골 촌村집 변소는 도리어 퍽 정결한 셈이다. 한번 생리적 사무를 쳐든 뒤에 잿덤북을 덮어가지고 부삽으로 옮겨 던지면 후각과 시각에 아무런 불쾌를 느끼지 않고 다음 사람이 용변用便할 수 있어서 문호 개방만 단속한다면 이런 식이 혹은 이상적 변소가 될는지도 모른다. 나는 서울서 자라나서 시골일을 모르지만 가끔 가다가 촌村에 갈 기회가 있어서 아침 일어나 변소에 갈 때면 도리어 쾌감을 느끼는 때가 많다. 아무리 호사豪奢한 '빌딩' 속의 수세식 변소라도 냄새만은 면치 못하는데 촌村변소는 이 냄새까지도 완전히 발산發散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설비는 도저히 도회지에서는 바랄 수 없고 한다면 수세식밖에 없는데 이것은 도시계획상으로 하수도가 완비되어야 하고, 주택제도가 개량되어야 할 것이니 일 년, 이태에 바랄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몇 해 동안을 이런 변소 신세를 질지 모르지만, 아침마다 침 뱉고 얼굴 찡그리고 외면하고 출입해야 하는 변소를 갖는 것은 확실히 우울한 일임에 틀림없다.

변소같이 아침저녁으로 느끼는 게 아니지만 집에 욕실 없는 것도 큰 문제다. 대개 한 달에 몇 번씩 공동욕탕 가게 되는데 낮에 사무가 있는 사람이라 오후 2시 개탕開湯할 때에는 갈 수 없고, 자연히 밤 여덟, 아홉 시에 가게 되는데 그때쯤 되면 욕조 속에 허연 땟자국으로 덮여 있어 땟국에 몸을 씻는 셈이 되고, 더구나 요새같이 석탄화력이 약한 때에는 물이 다 식어버려서 감기 들기 알맞을 지경이다. 그것보다도 욕실의 공중도덕이란 말할 수 없을 지경이어서, 오동 칠한 발을 가지고 그대로 욕조에 텀벙 뛰어드는 사람, 욕조 속에서 몇 해 묵은 때를 북북 씻는 사람, 아무 데나 덮어놓고 소변을 삐치는 사람, 남의 옆에서 염치 불고하고 냉수를 내려 붓는 사람 등등 질색할 짓을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지만 그중에도 염려되는 것은 몹쓸 병의 전염이다. 어느 목사가 공동 욕탕에서 세면바리[사면발니]를 옮아 가지고 남이 의심할까 보아 내놓고 치료도 못하고 혼자 으레 고생하는 것을 보았지만 세면바리쯤은 도리어 약하고 화류병花柳病 같은 것에 걸리는 날이면 큰일이다. 수세식 변소는 몰라도 욕실쯤은 집에 하나씩 있었으면 좋겠는데 우리네의 생활정도로 그것도 바랄 수 없으니 딱한 일이다.

한 달 전에 어느 친구가 만나자고 해서 아침 일요일 오정 때 쯤해서 그를 찾은 일이 있다. 처가 덕으로 살고 있는 그 친구는 나를 보고 창피해 살 수 없으니 어디 취직자리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오랜 것인 듯싶었다. 그래서 갔는데 부인이 나와서 마침 욕실에 있으니 조금 기다려달라고 하면서 접대하였다. 얼마 있다가 조탕朝湯을 마친 그 친구가 머리에서 김이 오르고 혈색 좋은 얼굴을 해가지고 유유히 나왔다. 그런데 청을 받으러 간 나는 어떤가 하면, 나는 어제저녁에 공동욕탕에 갔다가 물이 더럽고 차서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온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를 보는 순간 미망美望보다도 알지 못할 불쾌를 느꼈다.  여러 가지 어수선한 말이 모두 귓전으로 들릴 뿐이었다. 나는 지금껏 그가 그때 나에게 어디 가서 어떻게 청해 달려든 지 그의 이야기를 자세히 기억지 못하고 있다. 생각하면 나에게 욕실 없는 것이 이런 불신의 죄를 저지르게 한 셈이다. (조용만, '변소와 욕실',『춘추』, 19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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