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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해 - 신록新綠과 나

category 근대문학과 경성 2019. 6. 4. 09:52

▲ 선희궁터(연녹색) 주변 지도 (1936)

우리 집은 선희궁 앞 큰길 건너편이외다. 대문을 나서면 고양이 이마빡만한 배추밭이 있습니다. 그 밭을 왼편으로 끼고 이삼 간 나오면 실개천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희궁 앞 큰길가인데, 인왕산에서 흐르는 물과 우리 동네에서 먹는 우물물이 서로 어울려서 졸졸졸 흐르고 있습니다.

그 개천가에는 늙은 버드나무가 드문드문 실같이 늘어진 가지를 떡 이고 서 있습니다. 실같이 늘어진 그 가지가 연둣빛으로 물들어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보았습니다. 아침에 어린애가 밥 짓는 아내를 하도 조르기에 안고 큰길로 나갔다 보았습니다. 

이것은 거짓말 같은 참말입니다. 내가 이 동네로 이사한 지가 하루 이틀이 아니요, 그 버드나무 가지가 푸른 것 또한 하루 이틀이 아니었을 터인데, 내 눈에 뜨인 것은 어제 아침이 처음이었습니다. 마음이 허울의 수고를 받으니 그런지 또는 내가 너무도 무심하여서 그런지는 모르나, 하여튼 바로 집 앞에 우겨져 가는 버들잎을 어제야 비로소 봤을 때, 나는 어쩐지 나라는 존재를 너무도 어이없이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른한 아침 연기 속을 고요히, 그리고 정답게 흘러내리는 아침볕을 받고 서서 어린애 뺨같이 부드러운 싹에 실실이 푸른 그 가지를 보는 내 가슴은 까닭 모르를 애틋함에 흔들렸습니다. 북악의 푸른 빛과 인왕산 머리의 아지랑이도 모두 처음 보는 것 같았습니다. 천지는 이렇게 푸르렀습니다. 늙은 나무에까지 움이 텄습니다. 그래도 나는 몰랐습니다.

한 사래의 밭도 없는 내가 철은 알아 무엇하리까만, 생각해보면 철을 모르는 인간처럼 미미한 존재는 세상에서 또 없을 것입니다. 무엇이 나의 귀를 막고, 무엇이 나의 눈을 가리었던고. 나는 가슴에 안겨서 철없이 방긋거리는 어린 것의 뺨을 문지르며 따스한 햇밭이 흐르는 신록의 천지를 다시 보았습니다. 저 빛이야 철을 잃으리까만, 이 어린것들의 장래는 어찌 될는지. ( 『별건곤』, 1930.6)

 


▲ 동아일보』, 1924. 7.26.  * 기사 중 맹아원[제생원 맹아부]으로 소개된 것은 [제생원] 양육부(고아원 및 임시아동보호소 기능)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임. 1924년 당시 제생원 맹아부는 서대문구 천연동 98번지에  소재함. 1931년에 종로구 신교동 1번지에 있던 제생원 양육부와 위치가 맞바뀜.  현 국립서울맹학교 종로캠퍼스 및 서울농학교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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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희궁터 시절의 제생원 양육부 (1923년경)
▲ 서대문구 천연동 시절의 제생원 맹아부 (1921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