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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섭 - 산보와 산보술散步及散步術

category 근대문학과 경성 2019. 5. 31. 11:09

사람이란 간헐적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직업의 중압감으로부터 자기를 일단 해방시킴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듯하다. 그러기에 더러는 혼자도 있어 보고 싶은 욕망이 머리를 들 때가 있다. 그러기에 더러는 이 고달픈 현실을 떠나 어딘지 남모르는 곳에 도망가고도 싶은 생각이 가슴을 물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물론 우리가 어느 곳에 피신함으로써 우리의 열렬한 정조의식을 확보할 수 있을까를 알지 못한다. 하여간 이 모든 세력 범위를 떠나서 우리는 한번 가보았으면 할 따름이다. 먼 곳에 그리운 산수가 빛나고 있고 웅장한 삼림이 손짓하고 있음을 우리는 아는 까닭이다. 

그러나 녹음 속에 그늘을 더듬는 단 두어 날의 나그네가 되기에도 우리는 다음 날의 의무에 목매여 있는 자기를 반성치 않을 수 없는 몸이다. 참으로 여행이란 될수록 속히, 될수록 멀리 일상생활에서 해방될 수 있는 의미에서 인생 쾌락의 중대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여행이란 본시 그렇게 용이하게는 도모할 수 없는 물건이다. 여기 우리는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혹시 하루 일을 마치고 소가少暇에 간단히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조그만 여행은 없는가? 이리하여 특히 도회인이 자기와 자기의 생활을 떠나려 하는 마음의 간절한 요구에서 기회 있을 적마다 의식 무의식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조그만 여행 형식이 우리의 저 사랑하여 마지 않는 산보인 것이야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흔히 생활은 우리의 머리 위에 하나의 무거운 철추를 휘두르고 있다 조금인들 꿈꿀 여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온종일 일을 하고 저녁이라 먹고 나면 어쩐지 그대로 자기가 억울하다. 이대로 자서 내일의 노동에 직접 연락되기보다는 이러한 생활로부터 한 번은 해방되어 그 사이 하나의 거리를 지켜보았으면 한다. 만족에서든 불만족에서든 우리는 스틱을 잡고 집문을 나서 보는 것이다.

도회의 상모相貌는 다채하고 포도의 굴곡은 다기하다. 발 돌아가는 대로 어디를 거닐든 이때만은 그 사람의 자유다. 

산보자는 일 담박한 관찰자로서 그러나 호기에 찬 젊은 개의 탄력을 가지고 모든 움직임을 살피면서, 이제까지의 '심장수축Stole'의 과정을 버리고 '심장신장Diastole'의 섭리 밑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이때 생활을 떠나고 이해를 초월한 산보자에게 자기와는 관계없는 만물과 인생의 생활을 안한安閑히 봄에서 유래하는 하나의 쾌활한 순간이 찾아올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어떠한 지리적 비약이 없이 모든 여행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이 산보는 참으로 도회인이 가지는 일단의 경쾌한 시가 아니면 아니 된다.

말하자면 거니는 것이 휴식이 되는 상태가 산보다. 그러므로 산보의 휴식을 구하는 자는 문자 그대로 기분을 전환시켜 최고 정도로 자기해방의 도를 성수하기만 하면 좋은 것이다.

소위 가족 산보라는 것이 있다. 가족과 같이 산보를 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벗과 더불어 길을 거닐다가 노변의 다점茶店에서 목을 축이는 산보도 나쁘지 않다. 연애의 완전을 위하여 애인에게 대한 봉사를 주안으로 하는 연애 산보도 화려한 종류의 산책에 속할 수 있겠지만 무어라 하여도 산보의 정도는 혼자서 하는 데 있다.

산보에는 간단間斷없이 옮겨 놓는 발짝의 절주[節奏]가 필요함은 물론 그것은 그리하여 한결같이 진행하는 몽상의 좋은 주자[奏者]가 되는 까닭이다. 왜 우리는 산보에 있어서까지 몽상의 방해자를 동반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이때까지 종사하고 있는 모든 사무를 배후에 남기고 발 가는 대로 이 골목 저 골목을 두 다리가 피곤을 깨달을 때까지 헤매야 하는 것이다. 만일에 누가 우리의 이름을 묻는다면 우리는 그제야 우리 자신의 이름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아니 되도록 혹은 진지한 문제 혹은 우스운 문제에 대하여 몰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종의 도취상태는 동반자가 있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방황함으로 하여, 우리는 일속의 풍부한 몽상과 표일飄逸한 발견을 조금도 손상함이 없이 그대로 우리의 가난한 집에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에 산보를 갔다가 소 '콜럼부스' 혹은 조그만 '바스코다가마'로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즉 아무 인상, 아무 발견이 없이 몸에 피로만 만재하고 온다면 차라리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대체 나는 몇 시간을 밖에서 거닐었나? 두 시간 내지 세 시간이다. 단 두 세 시간의 산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먼 여행인 것 같이 보인다. 물론 우리는 이제 어떤 데를 어떻게 거닐었는지 알지 못한다. 산보는 나의 사랑하는 대여행인 까닭인 것이다. 

거리와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6월이다. 풀 위에 드러누워 하루 종일 저 높고 넓은 하늘이나 쳐다보았으면 한다. 우리의 화원이 흔히  책상에 있고 공원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이냐! 우리는 두려두려 말라붙은 가로수의 외피를 만지면서 도회의 건강을 우려치 않을 수 없다.

요즈음 우리는 교외에 놀고 싶은 유혹이 큼을 느낀다. 교외란 도회도 아니요, 그렇다고 시골도 아닌 하나의 독특한 지형과 생활을 가지고 많은 도회인의 산보지가 되지만, 서울은 불행히 그 또한 좋은 교외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극예술』, 19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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