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안해여. 용서하시오. 당신의 소중한 비녀와 가락지, 꼭 일주일 이내에 찾아다 놓으리다. 남편의 이 같은 행동 과히 실망하지 마시고 부디 현명하게 처리해 주시오.'
이렇게 적은 다음 상자 안에다 곱게 접어 넣고는 다시 보자기 밑으로 아까와 조금도 틀리지 않게 안해의 의복 사이에다 놓아두었다.
[...]
만약에 할머님이나 어머님이 아시는 날이면 정말 큰 일이다. 집안이 발끈 뒤집히고 사방으로 사람들이 나를 찾아다니게 되지나 않을까, 불유쾌한 생각만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다가 골목으로 들어서서 한 으슥한 곳을 만났을 때 선뜻 비녀, 가락지를 내어 보려다가 그렇게 하는 그것이 두 번이나 내가 잘못을 범하는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그만두고 그대로 어느 전당포 문을 열었다.
일백십 원을 장만해 가지고 나온 다음, 이날 하루 지낸 것을 대강 추리면 다음과 같다.
우선 흥분한 정신을 진정하기 위해서 '바'로 찾아가서 시원한 맥주 몇 잔을 마셨다. 그러나 이렇게 '바'나 혹은 이른바 티룸의 쿠션에 앉고 싶어하는 것은 아무 중뿔난 이유는 없고 단순히 나의 일상 버릇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박 군을 찾아가서 일금 칠십 원을 갚아 주었다. 그와 함께 본정으로 가는 길에 이 군을 만나서 나는 할 수 없이 다시 한번 가까운 '바'를 찾았다. 탐스럽게 비루beer 거품이 유리잔 위를 흘러내릴 때 나에게는 자꾸 안해의
비녀와 가락지가 생각나서 되도록 돈을 절약하고 쓸 데 써야겠다는 비겁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였다.
백화점엘 들러서 여름 모자를 하나 살까 하다가 내가 새 모자를 쓰면 응당 그것이 집안 사람의 시선을 끌리라는 생각에서 그것은 중지하고 대신 '쓰기다니塚谷'라는 양품점[본정1-35]엘 가서 비교적 위험성이 없으므로 박 군이 추천한 넥타이 한 개를 샀다.
'히라다平田'[본정1-51]로 가서 점심을 먹은 후 박 군과 둘이서 '희락관喜樂館'[본정1-38]으로 구경을 갔다. 어두컴컴한 실내에 앉아 생각할 때 별안간 집에 들어가는 것이 싫었으며, 옛날 어릴 적에 몰래 벙어리를 깨뜨려 가지고 우미관으로 연속連續을 대어 보러 가서는 나중 아버님의 벌을 염려하고 있던 때와 똑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일한서방日韓書房[본정2-10]에서 오구리 무시타로小栗虫太郎의 『흑사관살인사건黑死館殺人事件』이라는 탐정소설 한 권을 샀다. '아스팔트'를 슬슬 걸으며 지금의 나에게는 '넥타이'나 책이 모두 그렇게까지 필요한 것은 아닐 거라고 스스로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으며 나는 벌써 걷잡을 수 없이 돈을 낭비하지 않았나 하고 후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우울하였다.
암만해도 겁이 나므로 종로 금은상金銀商으로 가서는 안해의 것과 모양이 비슷한 놈으로 도금 비녀와 가락지를 샀다. 우연히도 그것을 왼편 포켓 속에다 넣고는 아까 아침때 모양으로 손으로 만졌다 놨다 하면서 서성대었으나 별로 갈 데는 없고 집으로는 아직 돌아가기 싫어서 다방茶房 '멕시코'[종로2-14]로 갔다. 나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누런 도금 비녀와 가락지가 결단코 순결한 것이 아닌 것같이 좋은 양복을 입고 모양 있는 모자와 넥타이, 비싼 구두를 신은 내 자신 역시가 이를테면 한 개의 가짜, 따져 보면 그야말로 정말 값어치 없는 존재인 것만 같아서 나의 가슴은 어느덧 감상적인 레코드 소리보다도 오히려 센티멘탈하였다.
저녁 햇살을 받으며 초조하여 집으로 돌아오다가는 신문사에 있는 김 군을 만나서 어떻게 마음이 내켰던지 다시 종로로 내려가서는 바긴네코銀猫[종로2-78]를 위시로 각 처로 다니며 술을 먹었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아무리 쓰지 못할 돈일지라도 인제는 낭비를 안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낭비하고서도 후회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집까지 다 와서는 이것도 역시 일상의 버릇으로 얼음과 딸기를 샀다.
안해의 거동을 보아 아직 발각되지 않은 것을 알자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이튿날 아침 지갑을 열어 보니 돈이 십 원 각수밖에는 남지를 않았다. 그러면 일백십 원에서 꼭 백 원이 없어진 셈이고 그 백 원 속에서 칠십 원은 의당한 빚을 갚았으나 나머지 삼십 원이 나의 낭비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 돈의 출처를 생각해 보매 더욱 안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엊그저께 당신의 생풀 모시기 두루마기를 지을 텐데 재봉틀 실 하나만 사다 달라고 한 그의 말을 생각하고는 세수도 하기 전에 산보 겸 나가서 근처 잡화상으로 다니며 안해에게 줄 몇 가지 물건을 샀다.
재봉틀 실 오십 전
'구라부' 백분 삼십팔 전
'가오루'[은단] 한 병 일 원
과산화수소수[치아미백용] 이십이 전
후에끼노리不易糊[풀] 십 전
《부인공론婦人公論》 오십 전
지갑 일 원 이십 전
빨랫비누 십 전 [합계 4원]
지갑에다가는 일원 한 장을 넣어서 '가오루'와 함께 농 서랍에다 두고, 재봉틀 실과 풀은 반짇고리에다, '구라부' 백분과 과산화수소수는 경대 위에다 이렇게 처리하고는 어제 아침때같이 그가 안 부엌에서 조반을 짓고 있는 틈을 타서 모양이 예쁜 그 상자를 다시 집어 내가지고는 이번에는 양복 호주머니로부터 가짜 금비녀와 가락지를 그 속에다 넣었다. 순금은 빛깔이 약간 붉으며 광채가 있는데 이것은 누렇기만 한 것이 어쩐지 더러워 보이며 그것들이 한데 섞이어 있는 모양은 내가 보기에 대단 불쾌한 현상이었다. 이러고보니 어제 써 넣은 편지는 쓸데없게 되므로 그것은 찢어버리고 다시 사연을 고쳐서 기다란 글을 써 넣었다.
[...]
이날도 나는 아침을 먹는 대로 부랴샤랴 집을 나왔으나 의연 아무데도 갈 곳은 없고 자연 발 놓이는 대로 어제와 같이 본정통으로 돌어섰다. 책사에 가서 신간 서적과 잡지 등속을 뒤적거린 다음 백화점 양품부에 서서는 어제 산 것을 생각하며 넥타이를 골라 보기도 하고 가구부로 돌아서는 테이블과 안락의자와 화려한 양복장들을 만져 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아스팔트' 위를 거닐다가 '플레이 가이드'[매표 및 안내소] 앞에 가서 영화관 관람료를 조사해 보기, 악기집에 들러 신판 레코드를 들어 보기, 이렇게 한 다음으로는 이곳저곳 차방으로 돌아다니면서 푹신푹신한 쿠션에 앉아 시간을 보내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우울하였다.
어제 '히라다'에서 '런치'를 먹을 때와 '멕시코'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에도 생각하였거니와 나와 같이 유일도일愉逸逃逸 무위하는 이처럼 살아 나가는 존재야말로 값어치 없고 누추하기가 흡사 도금비녀, 도금가락지 같은 것이라고 오늘은 더 한층 자책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모두 하루 동안을 노력하고 있는 보람으로 그러한 곳에서 활기 있고 유쾌하게 먹고 마시며 있는 것이거늘 나는 무슨 일이 있다고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며 집에 있는 음식을 버리고 쓸데없이 허황한 기분을 가장하는 것인가. 입은 옷과 먹는 음식은 같으되 나의 속은 노름꾼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 아니뇨. 이렇게 편하게 앉아서 머리 위에는 장미꽃을 꽂은 화병, 유량한 멜로디 저편의 푸르스름한 유리창에 나의 그림자를 어른거리며 밀짚[straw]으로다 사탕 물을 빨고 있는 것 역시 안해의 장신구를 팔은 덕택이
아니냐. 그렇게 스스로 추궁하는 나머지, 나는 이마빼기 위에다 일백십 원짜리 전당표를 붙이고 있는 것 같았고 그러면서도 호화롭게 앉아 있는 나의 꼴이 오늘 아침 가짜 비녀 가락지를 상자 속에다 넣어 둘 때 목도하였던 불쾌한 광경과 똑같이만 생각되어 나는 홀연히 일어서서 거리로 나왔다. 여름 모자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까 할머님도 계시지 않았고 안해도 없었다. 하인들에게 어디 가셨느냐고 물으니,
"아까 권 대신 댁에서 자동차를 보내서 가셨에요."
이렇게 대답하며 흘끗 나를 쳐다보는 어멈의 표정을 읽을 때 무슨 일이 났나 가슴이 선뜩하였다. 조마조마하였으나 천천히 양복을 벗고 나무광으로 가서 장작 서너 개비를 쪼갠 다음 세수를 하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상자를 꺼내어 보니 그 속에는 나의 편지와 안해의 장신구도 없었고 내가 사다가 넣은 가짜 금비녀와 가락지만이 뒹굴고 있었다.
[...]
나는 도금 비녀와 가락지를 꺼낸 다음 아름다운 상자의 뚜껑을 덮었다. 그 속에는 나의 세 번째 편지가 들어 있는 것이다. 맨 아래창 농문을 열고 울긋불긋한 비단 보자기 밑으로 손을 더듬어 쌓여 있는 안해의 하얀 속옷들 사이에다 상자를 곱게 파묻어 두었다. (『조선문단』, 1935.7.)
'근대문학과 경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진섭 - 산보와 산보술散步及散步術 (0) | 2019.05.31 |
---|---|
이광수 - 길놀이 (0) | 2019.05.30 |
백석 - 창의문외彰義門外 (0) | 2019.05.24 |
[윤동주 - 종시終始] 통학길 (0) | 2019.05.24 |
[이태준 - 장마] (옛) 출근길 (0) | 2019.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