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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 해방전후] 한청빌딩

category 근대문학과 경성 2019. 6. 7. 14:23

▲ 한청빌딩  투시도 (광고)

현은 서울 정황에 불쾌하였다. 총독부와 일본군대가 여전히 조선민족을 명령하고 앉았다는 것과 해외에서 임시정부가 오늘 아침에 들어왔다, 혹은 오늘 저녁에 들어온다, 하는 이때 그 새를 못 참아 건국建國에 독단적인 계획들을 발전시키며 있는 것과 문화면에 있어서도, 현 자신은 그의 꿈인가 생시인가도 구별되지 않는 이 현혹한 찰라에, 또 문화인들의 대부분이 아직 지방으로부터 모이기도 전에 무슨 이권이나처럼 재빨리 간판부터 내걸고 서두르는 것들이 도시 불순하고 경박해 보였던 것이다. 현이 더욱 걱정되는 것은 벌써부터 기치를 올리고 부서를 싸고 덤비는 축들이 전날 좌익작가들의 대부분임을 알게 될 때, 문단 그 사회보다도, 나라 전체에 좌익이 발호할 수 있는 때와 좌익이 제 멋대로 발호하는 날은, 민족상쟁 자멸의 파탄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위험성이었다. 현은 저 자신의 이런 걱정이 진정일진댄, 이러고만 앉았을 때가 아니라 생각되어 그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한청빌딩 소재]란 데를 찾아갔다. 전날 구인회九人會 시대, 문장文章[출판사, 한청빌딩 3층 소재] 시대에 각별하게 지내던 친구도 몇 있었으나 아닌게 아니라 전날 죄익이었던 작가와 평론가가 중심이었다. 마침 기초된 선언문을 수정하면서들 있었다. 현은 마음속으로 든든히 그들을 경계하면서 그들이 초안한 선언문을 읽어보았다. 두번 세번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과 행동에 혹시라도 위선적인 데나 없나 엿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저으기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에게 이만침 조선사정에 절실한 정신적 준비가 있었든가?'
현은 그들의 태도와 주장에 알고 보니 한 군데도 이의를 품을 데가 없었다.
'장래 성립한 우리 정부의 문화, 예술정책이 서고, 그 기관이 탄생되어 이 모든 임무를 수행할 때 까지 우선, 현계단의 문화영역의 통일적 연락과 각부문의 질서화를 위하야' 였고 조선문화의 해방, 조선문화의 건설, 문화전선의 통일, 이것이 전진구호前進口號였던 것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민족이 나아갈 노선에서 행동통일부터 원칙을 삼아야 할 것을 현은 무엇보다 긴급으로 생각한 것이요, 좌익작가들이 이것을 교란할까 보아 걱정한 것이며 미리부터 일종의 증오를 품었던 것인데 사실인즉 알아볼수록 그것은 현 자신의 기우였었다. 아직 이 이상 구체안이 있을 수도 없는 때이다. 이들로서 계급혁명의 선수를 걸지 않는 것만은 이들로는 주저나 자중이 아니라, 상당한 자기비판과 국제노선과 조선민족의 관계를 심사숙고한 연후가 아니고는, 이처럼 일견 단순해 보이는 태도나 원칙만에 만족할 리가 없을 것이었다. 현은 다행한 일이라 생각하고 즐겨 그 선언에 서명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도시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 1930년대 후반의 종로네거리 (화살표시된 부분이 한청빌딩. 투시도 참고)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로!'

 

이런 깃발과 노래만 이들의 회관에서 거리를 향해 나부끼고 울려나왔다. 그것이 진리이긴 하나 아직 민중의 귀에만은 이른 것이었다. 바다 위로 신기루같이 황홀하게 떠들어올 나라나, 대한이나, 정부나 영웅들을 고대하는 민중들은, 저희 차례에 갈 권리도 거부하면서까지 화려한 환상과 감격에 더 사무쳐 있는 때이기 때문이다. 현 자신까지도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로'가 이들이 민주주의자로서가 아니라 그전 공산주의자로서의 습성에서 외침으로만 보여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위고같은 이는 이미 전세대前世代에 있어 '국민보다 인민에게'를 부르짖은 것을 생각할 때, 오늘 우리의 이 시대, 이 처지에서 '인민에게'란 말이 그다지 새롭거나 위험스럽게 들릴 것도 아무것도 아닌 줄 알면서도, 현은 역시 조심스러웠고, 또 현을 진실로 아끼는 친구나 선배의 대부분이 현이 이들의 진영 속에 섞인 것을 은근히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다 객관적 정세는 날로 복잡다단해졌다. 임시정부는 민중이 꿈꾸는 것 같은 위용은커녕 개인들로라도 쉽사리 나타나 주지 않았고,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일본군을 여지없이 무찌르며 조선인의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충분히 이해해서 왜적에 대한 철저한 소탕을 개시한 듯 들리나, 미국 군은 조선민중의 기대는 모른 척하고 일본인들에게 관대한 삐라부터를 뿌리어 아직도 총독부와 일본군대가 조선민중에게 '보아라 미국은 아직 일본과 상대이지 너따위 민족은 문제가 아니다' 하는 자세를 부리기 좋게 하였고, 우리 민족 자체에서는 '인민공화국'이란, 장래 해외세력과 대립의 예감을 주는 조직이 나타났고, '조선 문화건설 중앙협의회'와 선명히 대립하여 '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이란 좌익문학인들만으로 문화운동 단체가 기어이 일어나고 말았다.

▲ 선일악기점 (한청빌딩 1층, 1937)
▲ 수향상회 (한청빌딩 1층, 1937)

이 '프로예맹'이 대두함에 있어, 현은 물론, '문협'에서 들은, 겉으로는 '역사나 시대는 그네들의 존재 이유를 따로 허락지 않을 것이다' 하고 비웃어버리려 하나 속으로는 '문화전선 통일'에 성실하면 성실한만치 무엇보다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당면과제의 하나였다. 현이 더욱 불쾌한 것은 '프로예맹'의 선언강령이 '문협'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점이요, 그렇다면 과거에 좌익작가들이 과거에 자기들과 대립존재였던 현을 책임자로 한 '문학건설본부'에 들어 있기 싫다는 표시로도 생각할 수 있는 점이다. 하루는 우익측 몇 친구가 '프로예맹'의 출현을 기다리었다는 듯이 곧 현을 조용한 자리에 이끌었다.
"당신의 진의는 우리도 모르지 않소. 그러나 급기야 당신이 거기서 못 배겨나리다. 수포에 돌아가 리니. 결국 모모某某들은 당신 편이기보단 프로예맹 편인 것이오. 나증에 당신만 지붕 쳐다보는 꼴이될 것이니 진작 나와 우리끼리 따로 모입시다. 뭣허러 서로 어정버정한 속에서 챙피만 보고 계시오?"
현은 그들에게 이 기회에 신중히 생각할 여지가 있다는 것만은 수긍하고 헤어졌다. 바로 그 다음 날이다. 좌익대중단체 주최의 데모가 종로를 지나게 되었다. 연합국기 중에도 맨 붉은 기뿐이요, 행렬에서 부르는 노래도 적기가赤旗歌다. 거리에 서 있는 군중들은 모두 이 데모에 냉정하다. 그런데 '문협' 회관에서만은 열광적 박수와 환호로 이 '데모'에 응할 뿐 아니라, 이제 연합군 입성 환영 때 슬 연합국기들을 다량으로 준비해 두었는데, '문협'의 상당한 책임자의 하나가 묶어놓은 연합국기 중에서 소련 것만을 끄르더니 한아름 안고 가 4층 위로부터 행렬 위에 뿌리는 것이다. 거리가 온통 시뻘개진다. 현은 대뜸 뛰어가 그것을 막았다. 다시 집으러 가는 것을 또 막었다.
"침착합시다."
"침착할 이유가 어디 있소?"
양편이 다 같이 예리한 시선의 충돌이었다. 뿐만 아니라 옆에 섰던 젊은 작가들은 하나같이 현에게 모멸의 시선을 던지며 적기를 못 뿌리는 대신, 발까지 구르며 박수와 환호로 좌익데모를 응원하였다. 데모가 지나간 후, 현의 주위에는 한 사람도 가까이 오지 않었다. 현은 회관을 나설 때 몹시 외로왔다. 이들과 헤어지더라도 이들 수효만 못지 않은, 문학단체건, 문학단체건 만들 수 있다는 자신도 솟았다.
'그러나...... 그러나......'
현은 밤새도록 궁리했다. 그 이튿날은 회관에 나오지 않았다.
'마음에 맞는 친구끼리만? 그런 구심적求心的인 행동이 이 거대한 새 현실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새 조선의 자유와 독립은 대중의 자유와 독립이라야 한다. 그들이 대중운동에 그처럼 열성인 것을 나는 몰이해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배우고 그것을 추진시키는 데 티끌만치라도 이바지하려는 것이 내 양심이다. 다만 적기만 뿌리는 것이 이 순간 조선의 대중운동이 아니며 적기편에 선 것만이 대중의 전부가 아니란 그것을 나는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런 내 심정을 몰라준다면, 이 걸 단순히 반동으로밖에 해석할 줄 몰라준다면 어떻게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것인가?'
다음날도 현은 회관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 방에서 혼자 어정거리고 있을 때다. 그날 창밖에 데모를 향해 적기를 내어 뿌리던 친구가 찾아왔다.
"현형, 그저껜 불쾌했지요?"
"불쾌했소"
"현 형, 내 솔직한 고백이요. 적색데모란 우리가 얼마나 두고 몽매간에 그리던 환상이리까? 그걸 현실로 볼 때, 나는 이성을 잃고 광분했던 거요. 부끄럽소. 내 열 번 경솔이었다. 그날 현형이 아니었다면 우리 경솔은 휠씬 범위가 커졌을 거요. 우리에겐 열 사람의 우리와 똑 같은 사람보다 한 사람의 현형이 절대로 필요한 거요."
그는 확실히 말끝을 떨었다. 둘이는 묵묵히 담배 한 대씩을 피우고 묵묵히 일어나 다시 회관으로 나왔다. 그 적색 데모가 있은 후로 민중은, 학생이거나, 시민이거나, 지식층이거나 확실히 좌우 양파로 갈리는 것 같았다. 저녁이면 현을 또 조용한 자리에 이끄는 친구들이 있었다. 현은 '문협'에서 탈퇴하기를 결단하라는 간곡한 충고를 재삼 받았으나, '문협'의 성격이 결코 그네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한쪽에 편향한 것이 아니란 것을 극구 변명하였는데 그 이튿날 회관으로 나오니, 어제 이 친구들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자네가 말한 건 자네 거짓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본 대로 자네는 저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걸세. 그 회관에 오늘 아침 새로 내걸은 대서특서한 드림[걸개]을 보면 알 걸세."
하고 이쪽 말은 듣지도 않고 불쾌히 전화를 끊어 버리는 것이었다. 현은 옆엣 사람들에게 묻지도 않았다. 쭈루루 밑엣 층으로 내려가 행길에서 4층인 회관의 전면을 쳐다보았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현은 미처 보지 못하고 들어왔는데 옥상에서부터 이 2층까지는 어떤 표어나 구호보다 그야말로 대서특서한 것이었다. 안전지대에 그득한 사람들, 화신 앞에 들끓는 군중들, 모두 목을 제끼고 쳐다보는 것이다. 모두가 의아하고 불안한 표정들이다. 현은 회관 4층을 십분이나 걸려 올라왔다. 현은 다시 한번 배신을 당하는 심각한 우울이었다. 회관에는 '문협'의 의장도 서기장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문학건설본부'의 서기장만이 뒤를 따라 들어서기에 현은 그의 손을 이끌고 옥상으로 올라왔다. (1946)

 

▲ 해방 이후의 종로네거리 (화살표시된 부분이 한청빌딩. 투시도 참고)

 


종로의 새명물 한청빌딩 완성
근일 종로네거리의 생명물은 개축중의 화신백화점과 서로 경쟁적으로 바라보며 새로 우뚝 솟아 있게된 근대식 건축물, 즉 한청빌딩이다. 이 집은 건축 초부터 종로 등을 거니는 경향 각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동시에 대체 무엇에 사용할 집인가 하고 궁금증을 일으키었다. 이 한청빌딩은 본래 부내 계동에 거주하는 고 한규설 씨의 손자 한학수 씨가 24만원을 던져 작년 가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오늘에 건평 520평 4층의 대건물을 준공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한청빌딩은 전기 한학수씨와 오케레코드 회사 경성출장소 사장 이철 씨의 공동경영에 의하여 종합식 백화점으로 사용하기로 되었다는 바 개점은 7월 초순경이라 한다. (조선중앙일보, 193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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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복판 안전지대에서 노량진 가는 전차를 기다리는데 어디선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소음 속에 들려온다. 머리를 휘휘 둘러 보신각 편, 한청쪽, 동대문쪽 또 화신 편을 찾아보아도 소리난 곳을 알 수 없어 내 귀의 오청인가 했더니 "여보 조기 아니우, 오 씨랑 저기" 하면서 처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른다. 얼떨해서 시골놈 표정으로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한청빌딩 3층 '조영朝映'[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사무소 유리칭으로 분간하기 어려운 젊은 남자의 얼굴이 다섯 여섯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내 눈이 겨우 그들을 붙들인 것을 알매, 아는 이 모르는 이 할 것 없이 모두들 파안破顔하고 웃는다. 아내와 같이 진고개 가는 길이라고 말하려고 하나 들릴 것 같지 않아 손을 들러 신호를 하는데 전차가 와서 나는 급한 김에 연신 우스며 모자를 내두르고 또 예의를 따라 H씨, 처의 뒤로 차에 올랐다. (김남천, '가정봉사', 1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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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박태원 저 정가 1원50전. 경성 종로 한청빌딩 3층 문장사 발행. 진체振替[우편대체郵便對替] 경성 25070번. (동아일보, 1938.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