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성북동과 혜화동에 짓느니 집이다. 작년 가을만 해도 보성고보에서부터 버스 종점까지 혜화보통학교 외에는 별로 집이 없었다. 김장 배추밭이 시퍼런 것을 보고 다녔는데 올 가을엔 양관洋館, 조선집들이 제멋대로 섞이어 거의 공지 없는 거리를 이루었다. 성북동도 지형이 고르기만한 데는 공터라고는 조금도 없다. 그래서 요즘은 조금만 집을 나서도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고 새로 짓는 집들이 자꾸 눈에 띄는 것이다.
그렇게 자꾸 눈에 띄는 것이니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몇 가지 건축에 관한 감상을 가져 보곤 하였다.
대체로 조선사람들은 집 짓는 것을 보아도 취미생활이 너무 없다. 조선 기와집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시뻘건 벽돌담을 쌓되 추녀 끝을 올려 쌓는다. 그리고 스스로 그 감옥 속에 들어앉기를 즐긴다.
또 멀쩡한 재목材木에 땀흐른 얼굴처럼 번질번질하고 끈적끈적해 보이는 기름칠들을 한다. 해어지기도 전에 버선볼부터 미리 받어 시는 격이라 할까, 그 끈적끈적해 뵈고 번질번질해 뵈는 기름칠을 돈 들여 가며 좋아하는 것은 무슨 유행병인지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에노구'[그림물감]가 생기면 된데 안 된데 함부로 칠해 놓는 것이다. 그런 기름이 공연히 안가安價[염가]로 수입되어 가지고 조선 건물을 모두 망쳐 놓는 것이다.
명치明治 때에 도쿄 교토 등지에서 그랬다한다. '뺑끼'를 처음 수입해 가지고 일본내지內地 건물에 당치않은 것을 섞지 않는다는 점과 색채를 내일 수가 있다는 점에만 끌려 된데 안 된데 막 칠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그것을 외국인이 와 보고 일본의 자랑인 일본 고유의 건축문화를 왜 저렇게 뺑끼로 정복해 버리느냐고 의문을 일으키어 식자간에서 곧 그 '뺑끼' 사조를 막기에 노력하였다는
말이 있거니와 우리 조선 건축들이야말로 벽돌담, 기름칠, 뺑끼칠 사조에서 좀 반성해야 될 시기다. 유리창도 편리하기는 하지만 큰돈을 들여 지을 바에는 조선 건물로서의 면목을 죽여가면서까지 유리창에 열광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건물은 그 속에 사는 사람의 교양, 취미, 모든 인격을 다 표현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기에 존 러스킨은 '훌륭한 건축은 청부업자의 기술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건축물 주인의 인격으로 되는 것이다' 하였다.
지난 봄에 창의문 밖에 있는 전 대원군의 별장을 구경한 일이 있다. 워낙은 김 모라는 당시 재상이 지은 것인데 첫째 이상한 것은 그렇게 좋은 재목으로 그렇게 아끼는 것이 없이 짓는 집을 왜 요즘 집장수들의 집처럼 간사[간사이]를 좁게 지었나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 까닭은 그때 사람들이라고 키가 더 적었던 것도 아니요, 재목을 아꼈음도 아니요, 다만 주인의 이만하면 족하다는 겸양에서 나온 것이다. 별장을 지을망정 고대광실에 거드럭거리지는 않겠다는 그 주인의 겸손이었다.
이렇게 조선 건물은 옛날부터 인격과의 교섭이 깊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엔 인격의 정도는커녕 취미로 보아도 얼마나 타락하였는가. 그 길길이 뻘건 담을 쌓고 그래도 못미디워서 세상을 다 도적으로 아는지 유리병을 깨트려 박은 것이라 참말 그집 주인을 위해 딱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민책 고민책 하니 그런 고민책, 고민생활이 있는가?
남의 집이라도 높은 취미로 지은 집을 보면 그 집 주인을 찾아보고 싶게 정이 드는 것이다.
늘 지나다니는 거리에 그런 아름다운 집들이 좀 있었으면 얼마나 걸음이 가뜬가뜬 할까. (『삼천리』, 19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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