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 10시에 다옥정 셋방을 나온] 산월이는 종로네거리에 나서서는 우선 어느 길을 잡아야할지 몰랐다. 그래서 전차 타려는 사람처럼 안전지대에 올라서 보았으나 황금정 편으로부터 전차가 오는것을 보고는 얼른 찻길을 건너 종각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산월이는 몇 걸음을 가지 않아서 중년신사 두 사람과 마주쳤다. 둘이 다 인바네스를 입은 큰키를 꾸부정하고 산월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산월이도 한 사람과 맞딱뜨린 것만큼은 반갑지 안았지만 아모튼 해죽해죽 웃어보였다. 그러나 그만 웃음은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다는 듯이,
"나는누구라구..."
하면서 다시는 돌아보지도 않고, 저희끼리 수근거리며 밝은 큰 길로 나가버렸다.
산월이는 또 얼굴이 화끈하였다. 한참 동안은 지나치는 사람도 끊겼다. 백합원[관철동 207번지] 앞을 지나려니까 한 자는 시궁창에 소변을 보고 섰고, 한 자는 가만히 서 있는 것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흐느적거리더니 노는 계집 같은 것이 제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성낸 소처럼 씨근거리고 산월이가 미처 망토에서 손을 빼기도 전에 달려들었다.
"이런… 이게 무슨 짓이야?..."
술내가 후끈거리는 사나이 입술은 어느 새엔지 산월이의 입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뭐야 이년! 더러운년! 쌍년! 개딸년!... 투엣."
"이사람 보게 고‥ 고걸 먹구 이래, 이‥. 이런"
한녀석도 같은 바리에 실을 녀석이었다.

산월이는 그 녀석과 입 맞춘 것쯤은 그다지 분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그 녀석은 술김에 아무에게나 해버리는 주책 없는 욕설이겠지만 '더러운년! 쌍년!' 하고 하필 더러운 년이라고 박는것이 자기 밑구멍을 들쳐보고 하는 욕처럼 살을 에이는 듯한 모욕을 느꼈다. 그러나 마침 그때에 우미관[관철동 89번지]이 파하여 골목이 뿌듯하게 사람이 쏟아져 올라왔다.
산월이는 새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물결같이 올라 쏠리는 사람 틈을 쑤시고 한가운데 들어섰다. 그리고 입으로 부르지 않을 뿐이지 눈이 뒤집히도록 찾아보았다. 외투를 입었거나 인바네스를 입었거나 나까오리를 썼거나 캡을 썼거나 나이가 이십이 되었거나 사십이 되었거나 기름끼만 도는 사내 사람으로 자기의 눈웃음을 알아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의 그 누구를 우미관 앞이 다시 비여지도록 찾아보았다. 그러나 산월이의 발등을 밟고 퉁명스럽게,
"잘못됐소"
하고 힐끔처다보든 노동자 한 사람밖에는 그를 아는 체하는 사람이 없었다.

산월이는 그 길로 조선극장 앞으로 갔다. 거기는 벌써 파한지 한참되어 더욱 쓸쓸하였다. 산월이는 그제야 우미관 앞에서 밟힌 발등을 톡톡 털어내고 다시 종로 큰 행길로 나서고 말았다.
산월이는 밝은 골목이나 컴컴한 골목이나 바람만 마주치지 않는 골목이면 발길 내치는 대로 다녔다. 순경꾼의 딱따기 소리에 공연히 질겁을하고 돌아서다가 얼음 강판에 무릎을 찢기도 하면서 이놈이 그럴듯하면 저놈의 옆도 서보며 밤이 어느덧 새로 두 점에나 들어가도록 싸다녀보았다.
그러나 사내들은 계집이라면 수케 때 몰리듯 한다는 것도 산월이에겐 거짓말 같았다. 서울 바닥에 이처럼 사내가 귀할까 하고 산월이는 이날 밤에도 낙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월이는 피곤하였다 돈! 돈보다도 이제는 악에 받쳐서 사람이, 사내 사람이 몸이 달도록 그리워졌다.
'돈 없는 녀석이라도!'
하고 굵다란 팔로 제 몸을 꿀어안어줄 사내 사람이 못 견디게 그리움을 느꼈다. 그래서 산월이는 동관 앞으로 와서 색주가집들이 많이 있는 단성사[수은정(묘동) 56번지]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렇게 산월이가 제 몸이 달아서 아무놈이라도 걸려라 하는판이어서 그랬던지 의외에도 훌륭한 신사 하나가 산월이를 기다렸던 것처럼 어디서 불거졌는지 열빈루[돈의동 114번지] 앞을 들어서는 산월이 길을 딱 막고 서있다. 검은 외투에 검은 털모자에 수염은 구렛나루이나 살결이 흰, 어떤 방면으로 보든지 중역이나 간부급에 속할 사십 가까운 신사였다.
"오래간만입니다 혼자 이런 데를 오세요‥‥ 저 모르시겠어요?"
구레나룻 신사는 산월이에게서 벌써 말인사를 받기전에 서로 눈으로 문답이 있은 뒤라 왕청스런 대답은 나올 리가 없었다.
"왜 모르긴‥‥ 어디서 이렇게 늦었소?"
"난봉이 좀 나서요. 호호.. 그런데 벌서 전차가 끊어졌구먼요..어느 쪽으로 가시는지 저 좀 대려다주셨으면!"
"가만있자 집이 어디더라...?"
"다옥정이지 어디예요. 좀 바래다주세요, 네?"
산월이와 구레나룻은 말로는 아직 여기까지밖에 마치지 않았으나 걸음은 벌써 큰 행길까지 가지런히 붙어 나왔다.
구레나룻은 자동차를 불렀다 그리고 자동차 속에서 산월이의 언 손을 주물러주며,
"집이 조용하우?"
하고 운전수는 안 들릴 만치 은근하게 물었다. 구렛나루의 입에서는 약간 서양 술내가 퍼져나왔다.
"나 혼자얘요... 혼자"
구레나룻은 산월이의 목을 끌어 안아보았다. 산월이는 눈치를 따라 하자는 대로 비위를 맞춰주었다.
자동차는 어느 틈에 광교에 머물렀다. 산월이는 먼저 차를 내렸다. 그리고 차 속에 앉은 채 차삯을 꺼내주는 구레나룻의 지갑속엔 푸른 지전장이 여러 갈피나 산월이 눈에 비칠 때 산월이는 뛰고 싶도록 만족하였다.

산월이는 구레나룻을 데리고 가운데 다방골[옛 중다동, 천변쪽]로 들어섰다. 걸음이 날아갈듯이 거뜬하였다. 구레나룻도 그러하였다. 그들은 정말 나는 사람처럼 이리 성큼 저리 성큼 뛰며 걸었다.
"길바닥에 이게 웬 흙물이얘요?"
산월이가 물었다.
"글쎄... 어디 수통이 터졌을까?"
"아이 흙물이라니까 그래요."
"아까 참 이편에 불이 난 모양 같더니..."
"불이요?"
산월이는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이 가까이에서 불이 났든, 물이 났든, 내 방만 그대로 있으면' 하고 깔아놓고 나온 자리가 따뜻할 것밖에는 더 행복스러울 것이나 더 불행스러울 것이나 더 상상할 여지가 없었다.
"어딜 자꾸 먼저 가세요. 호호, 이 골목인데..."
산월이는 수통박이 골목을 들어서면서 벌써 습관이 되어 속곳 허리띠에 달린 자기 방 열쇠부터 더듬었다. 그러나 웬일인가? 주인집 대문간에 달린 전등 때문에 셋밤중에 들어서도 대낮같이 환하던 골목 안이 움 속처럼 캄캄할 뿐 아니라 발을 내놓을 수가 없이 물천지였다. 산월이는 그만 가슴이 덜컹하고 내려앉았다. (『별건곤』, 19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