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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白馬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5. 13. 20:00

 

내가 신호神戶[고베]를 떠나 이곳 명고옥名古屋[나고야]으로 흘러온 지도 벌써 반년! 아 - 고향을 떠난 지도 벌써 꿈결 같은 삼 년이 지나갔네 그려. 그 동안에 나는 무엇을 하였나. 오직 나의 청춘의 몸 닳는 삼년이 속절없이 졸아들었을 따름일세 그려! 신호 xx조선소造船所 시대의 나의 생활은 그 가운데 비록 한 분의 어머니를 잃은 설움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여 본다면 그것은 참으로 평온 무사한 안일한 생활이었었네. 악마와 같은 이 세상에 이미 도전한 지 오래인 나로서는 이 평온 무사한 안일한 직선생활直線生活이 싫증이 났네. 나는 널리 흐트러져 있는 이 살벌의 항巷이 고루고루 보고 싶어졌네. 그리하여 그곳에서 사귄 그곳 친구 한 사람과 함께 이곳 명고옥으로 뛰어온 것일세. 두 사람은 처음에 이곳 어느 식당 '뽀이'가 되었었네……

나의 지금 목줄을 매이고 있는 식당은 이름이야 먹을 식자 식당일세마는 그것을 먹기 위한 식당이 아니라 놀기를 위한 식당일세.  안에는 피아노가 놓여있고 라디오가 있고 축음기가 몇 개씩이나 있네. 뿐만 아니라 어여쁜 여자가 이십여 명이나 있으니 이곳 청등靑燈 그늘을 찾아드는 버러지의 무리들은 '만하탄'과  '화이트 호스'에 신경을 마비시켜 가지고 난조亂調의 재즈에 취하며 육향분복肉香忿馥한 소녀들의 붉은 입술을 보려고 모여드는 것일세. 공장의 기적이 저녁을 고할때면 이곳 식당은 그런 광란의 뚝게를 열기 시작하는 것일세. 음란을 극한 노래와 광대에 가까운 춤으로 어우러지고 무르녹아서 그날 밤 그날 밤이 새어가는 것일세. 이 버러지들은 사회 전 계급을 망라하였으니 직업이 없는 부랑아 · '샐러리맨' · 학생 · 노동자 · 신문기자 · 배우· 취한, 그러한 여러가지 계급의 그들이나 그러한 촉감의 향락을 구하며 염가廉價의 헛된 사랑을 구하러 오는 데에는 다 한결같이 일치하여 버리고 마는 것일세. (이상李箱, '12월 12일', 1930)

 

▲ 1932년 광고

**

갑진은 공원을 나와서 이박사와 두 동무를 끌고 낙원동 어느 카페로 들어갔다.
붉은 등, 푸른 등, 등은 많으나 어둠침침한 기운이 도는 방에는 객이라고는 한편 모퉁이에 학생인 듯한 사람 하나가 웨이트리스 하나를 끼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 아직 손님은 많지 아니하였다.
“이랏샤이.”
하는 여자,
“어서 오십시오.”
하는 여자, 사오 인이나 마주 나와서 네 사람을 맞았다. 모두 얼굴에는 횟됫박을 쓰고, 눈썹을 길게 그리고, 입술에는 빨갛게 연지를 발라 금시에 쥐를 잡아먹은 고양이 주둥아리 같고, 눈 가장자리에는 검은 칠을 해서 눈이 크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고개를 갸우듬하고 엉덩이를 내어두르고, 사내 손님에게 대해서는 마치 남편이나 되는 듯이, 적어도 오라비나 되는 듯이 응석을 부렸다.
“아이, 왜 요새에는 뵙기가 어려워요?”
하고 양복 입은 계집애는 갑진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아다가 제 뺨에 비볐다.
“요것이 언제 보던 친구라고 요 모양이야?”
하고 갑진은 주먹으로 그 여자의 볼기짝을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아야, 아야, 사람 살리우!”
하고 그 여자는 갑진의 뺨을 꼬집어뜯고 성낸 모양을 보이며 달아났다.
네 사람은 테이블 하나를 점령하였다. 의자는 푸근푸근하였다. 테이블에는 오일 클로오드를 깔아서 살을 대기가 불쾌하였다.
위스키, 위스키!
하고 갑진은 집이 떠나갈 듯이 호령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갑진은 예쁘장한 계집애 하나를 무르팍 위에 앉히고 으스러져라 하고 꼭 껴안았다. 다른 사람 곁에도 계집애들이 하나씩 앉아서 껴안아 주기를 기다리는 듯하였다.
유리잔에 위스키 넉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이년들아, 너희들은 안 먹니?”
하고 갑진은,

“에이! 멘도우쿠사이! 병째로 가져오너라. 백마표, 응!
“오라잇!”
하고 한 여자가 술 벌여 놓은 곳으로 갔다. 거기는 회계 당번인 여자와 남자 사무원 하나가 점잔을 빼고 앉아 있었다. 여덟 잔에 노르무레한 위스키가 따라진 뒤에 갑진은 술잔을 들며,
“제군! 미국 철학박사 이건영 각하와 한은경 양과의 약혼을 축하하고 두 분의 건강을 빕니다.”
하고 잔을 높이 들었다. 다른 두 사람도 갑진과 같이 잔을 높이 들었다. 오직 이 박사만이 술잔을 들지 아니하였다. (이상, 『흙』, 1932)

 

▲ ' 1934년 광고 

**

"백년 낭군 말이 났으니 우리 집에도 백년 낭군이 또 하나 있다네."

병일은 무심코 섭적 이런 말을 하였다.

"백년 낭군이 자네 댁에도 있어?"

병일은 섭적한 말이나 지나쳐 들을 석호가 아니다. 의아한 듯이 한 마디 묻고 나서 무엇을 골똘하게 생각할 때 버릇으로 눈을 깜박깜빡하며 손톱을 물어뜯는다. 병일의 일이라면 자기가 모를 것이 없겠거늘 이번 수수께끼만은 얼른 풀기가 어려운 듯하였다.

'백년 낭군이 댁에도 있어요? 아이 야릇해라."

초월은 혼잣말같이 종알거리고 이상하다는 듯이 말끄러미 쳐다본다. 명화도 고개를 돌려 갸웃이 병일을 보며 어서 말 뒤끝을 이으라고 눈으로 재촉한다.

병일은 무심코 한 말이 지나치게 방안의 주의를 끄는 것을 깨닫고,

"아니야 아니야, 너희들은 알 일 아니야."

어름어름해서 넘기고 손뼉을 쳐서 보이를 불렀다. 병일은 백마 위스키를 명하였다. 술은 곧 들어왔다.

"에그 또 위스키는, 또 술이 취하시겠네."

하고 명화는 눈썹을 찡그린다.

"아이, 언니도 자그만치 위해요."

하고 초월이가 턱을 들며 입을 비쭉한다.

"그럼 옜다. 네 영감께는 병째로 권해라."

명화는 병일의 곱뿌에 가득히 따르고 난 술병을 초월에게로 밀어 준다. (현진건, 『적도』, 1939)

 


환락의 서울, 신장新裝한 사교장 백마白馬*를 찾아!


우울한 겨울철도 어느덧 스러지고 적막한 황야의 마른 나무가지에 단물이 오르는 생명의 봄! 푸른 잔디 사이사이 진달래꽃 개나리꽃 침침한 방에서 우리를 부르는 봄! 휘느러진 수양버들이 동풍東風을 안고 멋드러지게 춤을 추는 봄! 철철 흘러 내리는 시냇물 소리도 우리의 마음을 뛰게 하고 나직한 천공天空에서 종달새도 우리의 넋을 부르는 화창한 계절이다! 
복사꽃이 우리를 간지럽게 유혹하고 바람을 타고 도는 들썩한 우리의 가슴 속에는 제비떼가 지저귀기 시작하는 봄! 나는 이 시절을 호흡하는 꼿피는 환락가로 발길을 옮겨 보았다. 먼저 북촌北村으로, 순 조선인의 손으로 호화롭게 신장新裝한 사교장 백마白馬를 찾아 갔다. 백마는 건축계의 총아 박길룡朴吉龍 씨의 설계로 현대과학문명이 나은 고급 재료와 기술을 이용하여 7만원이라는 적지 안은 황금으로 만들었단다. 
작년 8월 달에 기공하여 금년 3월 5일에야 낙성한 이 백마의 면모는 누가 보던지 감탄하리만치 겉으로 화려 찬란하고 아담할 뿐 아니라 위생변소와 스팀 설비, 비상구, 제반 내부설비를 이모저모 속속들이 휘둘러 볼 때 또 다시 감탄을 금할 수 없으리라. 지하실까지 4층! 전기장식만 해도 8천여 원이란 큰돈이 들었으니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답게 되었는가를 짐작할 것이 아닌가! 윗층 베란다에는 푸르청청한 나무가 손님의 마음을 푸르게 하고 불원간不遠間 베란다에 또 분수구를 만들리라 하니 한층 더 시원한 느낌을 줄 것이다. 전기축음기에서 흘러 나오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선경仙境과 같은 각색 찬란한 네온사인 아래 백어白魚와 같이 헤엄치는 꼿다운 직업여성들의 정情이 뚝뚝 덧는 친절한 서비스! 이분들 중에는 외국 모 '땐스홀'에 있던 '땐사-'도 있고 무용가 배구자裵龜子 일행 속에 끼었던 어여뿐 열여덟의 소녀도, 또 상당한 인테리 여성도, 내 동생을 출세시키기 위하여 손[님]들이 한두닙 던져 주는 적은 돈을 알뜰살뜰이 모아가지고 동경東京 모대학에 입학시킨 맘 착한 여성도 있단다. 
신장한 대자연! 신장한 백마, 백마 속에 흐르는 음악소리! 사랑의 속삭임! 50여명의 아름다운 여급군女給群 ─ 사나이 심장을 뛰게 하는 여성들의 가벼운 치마자락에 생기는 부드러운 물결. 장미같은 입술. 가많이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박속같은 하얀 그들의 이빨. 호수같이 맑은 그들의 눈동자. 손님들에게 술을 따러 주는 분길같은 그들의 향기로운 손길. 개업 후로 늘상 만원! 워이트레스 외 다른 종업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하니 사교장 백마白馬의 면모를 가히 짐작할 것이 아닌가.  (『삼천리』, 1937.5.)

 

* 종로1정목 43번지에서 화신상회 재건축 이후 공평동으로 옮긴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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