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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팔호東八號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5. 13. 09:36

차는 서고, 또 움직였다. 구보는 창 밖을 내어다보며, 문득 대학병원에라도 들를 것을 그랬나 하여 본다. 연구실에서, 벗은 정신병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를 찾아가 좀 다른 세상을 구경하는 것은 행복은 아니어도 어떻든 한 개의 일일 수 있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

 

**

그 이듬해 오월까지 나는 레인코트 입은 사나이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도처에서─ 저녁 산보 나간 길거리에서, 먼 곳에서 돌아오는 벗을 마중 나간 정거장에서, '제팔예술第八藝術'을 감상하고 있는 군중 속에서…… 그리고 진실로 몇 번인간 나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서─ 레인코트 입은 사나이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나에게는 아직까지도 기억이 새로운 서력西歷 일천구백삼십년 유월 하순, 저 장마가 시작되기 전 마지막 가만한 비가 옛 서울을 힘없이 축이던 날 저녁이었다.
나는 레인코트 주머니에 팔을 꽂고 황혼의 거리를 정처없이 산책하였다. 그러나 저도 모를 사이에 나의 마음은 언젠가 레인코트 입은 사나이를 좆고 있었다. 
오! 외로운 벗이여.
그대는 지금 어디 있나
[...]
내가 입안말로 이렇게 중얼거리자 나는 언뜻 어느 신문사 게시판 앞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였다. 나는 거의 기계적으로 그 앞으로 다가가서 삼면 기사에 눈을 던졌다. 그리고 그곳에, 작년 가을에 동팔호실을 탈출한 정신병자가 어젯밤에 한강에 투신자살하였다는 것과 오늘 아침에 건진 그의 시체에는 낡은 레인코트가 걸쳐 있었다는 기사를 발견하였다. 
나는 갑자기 나의 마음이 공허하여지는 것을 깨달으며 그 앞을 떠났다. 
그예 그는 가고 말았다.
그예 그는 가고 말았다. (박태원, '적멸', 1930)

 

**

"왜 남까지 끌어 넣어?"
종엽이는 한참 만에 종알종알한다. 남이 원영이 말을 눈치만 뵈어도 기고만장을 해서 싸우려고 덤비는 종엽이었다. 공연한 소문만 나는 것이 분하고 창피도 하지만, 같은 신문사 속에서 이번에는 원영이와 어떻다─ 하는 말은 차마 듣기 싫은 때문도 있는 것이었다. 
"끌어 넣긴 무얼 끌어 넣었단 말요. 성인이라야 능지성인이거든! 종엽 씨가 미쳤기에 남더러 미쳤다는 말이 아니냐는 거지."
"응, 그래 정신병 의사는 모두 미쳤더라."
하고 종엽이는 엇먹다가 혼잣말처럼,
"좀더 미치게 해주쟀더니 고만둬라"
하고 상긋한다.
"무언데……?"
"무언 알아 무얼 해! 들으면 정말 동팔호로 가거나……."
"동팔호로 가거나…… 또 어디로 갈 말인데?"
"글쎄 거기 안 가면 어디로 갈꾸? 한강철교로 갈지도 모르지."
하고 종엽이는 혼자 웃으나, 봉익이는 눈이 뚱그래지며 궁금증이 나서 무슨 이야기냐고 조른다.
"미쳐나거나 빠져 죽을 일이 무어람?"
봉익이는 마담이 자기 흉을 본 거나 아닌 하여, 내심으로는 절망을 느끼면서 종엽이 눈치만 보고 앉았다. 
"죽는 것도 여러 가지거든."
"여러 가지겠지. 생활난으로 죽고, 실연을 해도 죽고, 병들어도 죽고!"
"병들어서 한강 가서 일차하는 사람도 있던가 뵈."
"그럼, 정사도 하고……."
"흥, 시인인걸!"
하고 종엽이는 웃어 버리다가,
"그래 정사하겠소?"
하고 다진다. 
"하게 되면 하지, 무어 알뜰한 세상이라구……." (염상섭, 『무화과』, 1932)

 


그전 말로 하면 총독부 병원 동팔호실이요, 지금 말로 하면 대학병원 정신병실이다. 
동팔호실…… 정신병실…… 미친 사람을 잡어 가두는 곳…… 이러한 이름이 결코 우리의 귀에 달게 울니지 아니한다. 미치는 사람이 어찌 즐겨 미치며 또한 즐겨서 동팔호실…… 정신병실…… 미친 사람을 가두어 두는 곳……에를 갔으랴! 생각하면 아무리 미쳐 정신이 없다 하더라도 ─ 아니 미쳤음으로 해서 이 세상과 떨어져 외롭고 고달피 살아가기 때문으로 해서 더욱이 그들은 불쌍하고 가엽다는 것이다. 
봄이 평화를 가득 안고 인간을 찾아왔다. 이 화평스럽고 즐거운 봄을 화평스럽고 즐겁게 맞이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 중에도 정신에 이상이 생겨 우리들 성한 사람과는 딴 생각 딴 마음으로 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그들을 한 번 찾아봄도 떳떳치 아니한 일은 아닐 것이다. 
처음 갔을 때는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내부를 자세하게 보지 못하고 두 번째 갔을 때에 비로소 샅샅이 볼 수가 있었다. 대학병원에서도 맨 뒤 늙은 소나무가 우거진 속에 앞뒤로 두 채의 붉은 벽돌집이, 즉 옛말로 하면 호실이요. 지금 부르는 정신병실이다. 
우선 남자병실을 먼저 보기로 하고 안내하는 의사를 따라 뒤채로 갔다. 초인종 소리를 따라 편지 넣는 구멍만한 곳으로 눈 두 개가 나오더니 자물쇠가 열린다. 처음 생각에는 별 이상한 세상이 나타날 줄 알았더니 웬걸 그저 병색이 얼굴에 박혀 있는  그저 병자들뿐이다. 떠들고 웃고 울고 노래하고 춤추고 때리고 차고…… 이러한 일이 대번 눈 앞에 나타나리라는 생각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척 들어서서 그 안의 공기를 들여마실 때에는 비록 요란스러운 야단법석은 없으나 무엇인지 모를 바깥 세상과는 다른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넓은 다다미방 한편 구석에 댓 사람이나 둘러 앉았다. 요전에 잠깐 창 밖으로 볼 때 그 방에서는 바둑을 두는 것을 보았다. 정신병자가 바둑을 두어? 나는 그 때에 이렇게 놀라고 의아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둘러앉은 다섯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이 마주앉아 화투를 치고 있다. 굽어다 보느라니까 화투 중에도 가장 복잡한 '육백'을 하고 있다. 기가 맥힐 일이다. 미친 사람이 바독을 두고 화투를 치고…… 
화투치는 옆에 얼굴이 도럄직하고 예쁘장스럽게 생긴 소년 하나가 앉아서 굽어다 보고 있다. 들으니 전간[癲癎], 즉 지랄병이라고 한다. 아직 꽃같으면 채 봉오리가 버러지지도 아니한 시절인데 그렇듯 모진 병에 걸리다니! 석가여래가 아니라도 인생의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인간고人間苦가 뼈에 박히도록 느끼어진다.  
북편으로 문에 쇠빗장을 해 놓은 방을 굽어다 보니 꿈에 보면 가위라도 눌릴 만큼 험상궂은 친구 하나가 단정히 앉아 무어라고 혼자 웅얼거리고 있다. 생긴 것으로 보아 문에 철창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들으니 지금 있는 환자들 중에 제일 난폭하다고 한다. 

그 곳을 굽어다보고 돌아서려니까 한 친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이 내 앞으로 걸어 온다. 그러나 아무 말도 말도 아니하고 지나친다. 요전에 갔을 때에 "게이사쓰부노 지도샤와 기마셍까?" (경찰부 자동차 아니 왔소?)하고 하고 묻던 친구다. 경찰부 자동차를 찾는 그 사람의 머리 속에는 어떠한 세상이 들어앉아 있을꼬? 
한편 방에서 일본사람 하나가 침대에 올라앉아 무엇이 그다지 즐거운지 연[連]해 싱글벙글 웃으면서 손가락을 꼽아 무엇인지 수를 세고 있다. 온종일 그러고 앉았다니 청승이지!  
한 사람 '조발성 치매'라는 이름의 정신병으로 얼마 전에 남의 집에 불을 놓았다는 사람이 있다. 정신병의 대부분이 '조발성 치매'라고 의사가 설명하는데 그렇다고 다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 사람은 세상에 아무 것도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도 재미있는 것도 슬픈 것도 없다.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놀고 해도 도무지 참견을 아니하고 온종일 부처님같이 앉아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진리를 깨달은 철학자와 같고 도를 얻은 생불과도 같다. 
순사를 다니다가 미처서 금년까지 팔 년째 이곳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일본말을 아느냐고 물으니까 '알겠지요'라고 남의 말같이 대답을 한다. 
이야기를 하고 섰는데 외양으로 보아 도무지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생긴 사람 하나가 설명해 주는 의사 옆으로 와서 씩 웃으며 "선생님. 장가 좀 들여 주시렵니까?" 한다. 그러니까 의사는 "네…… 아주 미인으로 하나 골라서 중매를 해 드리지요" 하고 역시 웃는다. 이 속에 들어오면 의사도 미쳐야 하는 모양이다.  중매를 들어준다는 의사의 말에 그 사람은 "미인은 해서 무얼함니까? xxx면 그만이지 히히." 한다. 자세히 보니까 요전번에 왔을 때에 영어로 쓴 책을 보고 있던 사람이다. 미국 가서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든가…… 그래 내가 옆에 섰다가 "미국 갔다 오셨소?" 하고 물으니까 씩 웃더니 "아이고 오줌 마려워." 하고 변소로 간다. 가면서 하는 소리가 "흥. 미국?! 흥 미친 놈……" 이라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보기에는 내가 미친 놈일지도 몰라! 
이층으로 올라가니 얼굴도 아주 미남자로 생긴 이십 안팎 되어 보이는 사람이 있다. 종교서류를 보는데 의사의 말을 들으니까 많이 나아서 지금은 완인完人이 되었다고 한다. 고마운 일이다. 
역시 이십 안팎 되어 보이는 일본사람 하나는 자꾸만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침대 위에서 이리뛰고 저리뛰고 야단을 한다. 
여자 병실이다. 
척 들어서니까 인물도 그다지 추하지 아니하고 한 스물 대여섯 되어 보이는 여인인데 의사를 붙잡고 무엇 셋집이 어떻고 장모가 어떻고 참 늘어놓는다. 생각하니 요전에 갔을 때에 나를 웃기든 여인이다. 그때에 같이 간 친구하고 막 문 안으로 들어서니까 생글생글 우스며 하는 말이 "xx전문학교 다니는 정xx라고 아세요?" 한다. "네. 압니다." 하고 그 친구는 시치미를 떼고 대답을 하니까 "그러면요. 그이가 오거던요. 꼭 나를 좀 만나게 해 주세요." 하고 신신부탁을 한다. 그러자 일본 여자 하나가 그 옆으로 오니까 히히 웃으면서 "이거 보세요. 이 일본 여편네가 미쳤어요. 그래 밤낮 웃어요. 히히. 그래 나도 동무 삼어서 같이 웃지요. 히히." 아! 무엇이 그다지 우스운고! 하고 나는 탄식하였다. 그랬는데 오늘도 여전히 웃으면서 종알댄다. 
넓은 다다미방으로 들어가니까 묻지 않아도 평안도 태생인 것 같은 노파 하나가 의사를 반가히 맞이한다.  
의사가 "돈은 어찌 되었소." 하고 묻는다. "네. 그저 차용증서를 썼지요." 하고 주머니를 뒤진다. 들으니까 밤이나 낮이나 돈타령을 부른다고 한다. 미상불 돈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채만식, '미친 이들의 나라, 동팔호실東八號室 잠입기, 이상異常남녀 사십여인四十餘人', 『별건곤』, 19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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