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들의 놀이라 그러한지 사랑문을 닫아걸어버리고 조용히들 앉아서 조름 보양으로 수군수군할 뿐이요, 마장 짝 부딪는 소리만 자그려댄다.
"내년에도 또 풍년 들겠군. 올해는 대체 눈도 퍽 온다."
"풍년이라도 들어야지. 조 선생 같으신 분은 머리를 내두르겠지만."
"요따위로 풍년만 들어서 무얼 한담."
마장과는 딴판으로 이런 수작들을 한다.
전등불이 들어오자 안에서 주인 밥상이 나왔다. 그러나 아무도 밥상을 거들떠보는 사람은 없었다.
[...]
요새는 낮잠 자는 게 일이다. 추우면 추워서 그렇고, 배가 고프면 배가 고파서도. 그러나 두 끼니를 먹는 날도 할 일이 없다. 동지가 모이는데는 난롯불도 못 피우는 먼지 구덩이에 들어가서 뿌연 책상만 바라보고 앉았을 수 없으니 가기 싫고, 겨울 들어가면서부터 모이던 두셋 친구의 여관도 한 동지가 붙들려 들어간 뒤로는 위험해서 모이지들을 않는다. 얼마간은 누구나 잠잠히 들어앉아서 물계만 보는 판이다. 그야말로 동면상태다. 무료하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으나 그렇게 한 모퉁이 해보지 못하고 어설피 붙들려 들어가고는 싶지 않다.
요새 며칠은 불도 뜨뜻이 때고 마음놓고 밥도 먹으니까 심신이 편해 그런지 잠이 많아졌다. 어쩐둥 잠이 든 것이 전등불 들어올 때까지 잤다. 눈을 떠보니 필순이 들어와서 깼는지 앞에 오도카니 섰다.
"무슨 잠을 이렇게 주무세요? 이젠 동이 텄으니 어서 일어나 진지 잡수세요."
하고 나무라듯 하며 웃는다. 팔을 것도 손에는 거멍 검댕칠을 하고 한 모양이 벌써 공장에서 와서 부엌일을 하다가 들어온 모양이다. (염상섭, 『삼대』,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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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이는 이탁이가 좌중에서 중심이 되는 것을 보고, 한층 더 몸이 달아서 긴하게 보이려고 애를 쓰며 말참견을 하나, 아무도 잘 대거리를 안 해주고, 이탁이의 눈이 이리 오기보다도 문경이에게로 더 가는 데 속이 바짝바짝 탔다.
그래도 참다못해서 발딱 일어나서 이탁이의 양복 소매를 끌어오니까, 하는 수 없는 듯이 마작판으로 다가앉았다. 문경이만은 못해도 그래도 모던걸이 끌어 가는 데는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봉익이도 딸려 가서 막 시작을 하려니까, 전등불이 확 들어온다.
"어구, 불이 벌써 들어오네."
문경이는 불 들어온 것이 군호인 듯이 일어나 버렸다.
[...]
자정 가까이나 두 여자는 소곤거리며 깨어 있었으나, 원영이는 들어오지 않고 만 모양이다.
'사랑에 들어와 자나? 채련이 집에서 자나?'
종엽이는 안방 아씨가 할 걱정을 맡아서 하면서, 갖은 공상을 은근히혼자 하다가 나중에는 공연히 잤다고 후회도 하였다. 모르면 상관이 없는 일이건만, 알고 보니 공연히 시기가 나고 애가 쓰이고 속이 끓는 것이다.
아침 불이 언제 나갔는지, 종엽이가 눈을 떠보니까 방장과 병풍으로 휘둘러 막고 덧문 한 짝 안 열어 논 방 안은, 옆에 누운 문경이의 얼굴도 간신히 보일 둥 말 둥할 만치 컴컴했다.
"깨셨소?"
옆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에 문경이는 까만 눈을 반짝 하고 웃는다. 이때까지 깨어 드러누워서 혼자 오늘 할 일을 궁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몇 시나 됐나? 퍽 늦었지?"
"아직 일러요. 아홉시 전. 몇 시에 신문사에 가슈?"
[...]
모친은 인사 정신 없이 얼굴이 그저 해쓱해서 잔다. 그래도 숨이 고된 것 같고 주름살이 누빈 이마에는 허한이 번지르르하다.
문경이는 수건으로 가만히 썻으려다가 고만두었다.
세시가 거진 들어가건만 졸립지도 않고 이대로 지키고 앉았다가 깨시기만 기다리려 하였더니, 충주 마님이 다시 건너와서 아까 광경을 늘어놓으려는 기색을 보고 자기 방으로 내려가 버렸다.
뜨뜻한 자리에 두 다리를 뻗고 앉으니까 노곤해서 눈이 감기는 바람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머리에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거니와 생각하는 것도 싫을 만큼 피로하였던 것이다.
잠깐 눈을 붙였었거니 하며 깨어 보니까 벌써 전등불이 나갔다. 벌써 아홉시를 들어간다. (염상섭, 『무화과』,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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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더워!”
하고 숭은 제일 먼저 더위를 깨달았다. 말만한 방에 문을 꼭꼭 닫아 놓았으니 이 복염에 아니 더울 리가 없다. 숭의 몸에서는 땀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숭의 눈에는 서울 정동 집에 앞뒷문 활짝 열어 놓고도 선풍기를 틀어 놓던 것을 생각하였다.
숭은 더위를 참고 잘 생각을 하고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갑자기 변한 환경은 숭의 맘을 도무지 편안치 못하게 하였다.
[...]
산월은 미인이었다. 재주도 있었다. 더구나 기생으로 닦여 난 그의 친절하게 감기는 맛이 숭에게는 잊힐 수가 없었다. 숭은 여관에서 물끄러미 이런 생각을 하고 앉았을 때에 전등이 들어왔다.
‘아뿔싸, 내가 타락한다.’
하고 숭은 머리를 흔들었다. 거기 붙은 부정한 무엇을 떨어 버리기나 하려는 듯이.
‘내가 내 몸의 향락을 생각하느냐.’
하고 숭은 벌떡 일어나 몸을 흔들었다.
[...]
현의사가 가려고 일어설 때에 숭이가 돌아왔다. 숭은 사랑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유월이가 다방골서 현의사가 왔다고 해서 안방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오셨어요?”
하고 숭은 현이 내어미는 손을 잡아 흔들었다.
“그렇게 왔단 말씀도 아니 하세요? 전화라도 거시지.”
하고 현은 숭의 손을 뿌리쳤다.
“참 미안합니다.”
하고 숭도 웃었다. 다들 앉았다.
“그래, 농촌 재미가 어떠세요?”
하고 현은 일부러 좌석을 유쾌하게 하려고 하는 듯이,
“난 도무지 시골생활은 몰라. 석왕사 한 이 주일 가본 일이 있나. 제일 불편한 게 전등 없는 게야. 안 그래요?”
하고 말을 시킨다.
“왜 석왕사는 전등이 없소? 있다우.”
하고 정선도 기운을 얻어 말대꾸를 한다.
“모두 불편하지요.”
하고 숭도 유쾌하게,
“도회에는 편리하도록 편리한 것을 다 만들어 놓았지마는, 농촌에는 아무것도 만들어 놓는 이가 없거든요. 도회 설비 십분지 일만 해 놓아 보세요. 도회에 와 살기보다 나을 테니. 푸른 하늘, 맑은 물, 산, 신선한 풀, 새들, 신선한 공기, 순박한 풍속, 이것이야 농촌 아니면 볼 수 있어요?”
하고 열심으로 말한다. (이광수, 『흙』,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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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은 안방에서 윤직원 영감이 태식을 데리고 앉아서 저녁을 먹으면서 잔소리를 씹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 태식이 딸그락딸그락 째금째금 하는 소리, 그 외에는 누구 하나 기침 한 번 크게 하는 사람 없고, 모두 조심을 하느라 죽은 듯 조용합니다.
바깥은 황혼이 또한 소리 없이 짙어 가고, 으슴푸레하던 방 안에는 깜박 생각이 난 듯이 전등이 반짝 켜집니다.
마침 이 전등불을 신호삼듯, 집 안의 조심스런 침정을 깨뜨리고 별안간 투덕투덕 구둣발 소리가 안중문께서 요란하더니, 경손이가 안마당으로 들어섭니다. (채만식, 『태평천하』,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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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청으로 올라가서, 주인의 소개로 칠팔 명이나 되는 젊은 여자들과 인사를 하였다. 여자들은 입 속으로만 제 이름을 대서 하나도 기억은 할 수 없다. 남자 회원은 아직 한 사람도 아니 온 모양인데, 웬일인지 안내역인 영신은 그림자도 나타내지를 않는다.
'그저 아니 왔을 리는 없는데…….'
동혁은 매우 궁금하기는 하나 이구석 저구석 기웃거리며 찾을 수도 없고, '채영신은 왜 보이지를 않느냐'고 누구더러 물어 보기도 무엇해서, 한구석 의자에 걸터앉아서 분통같이 꾸며 놓은 마루방 치장만 둘러보았다. 백씨가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는데, 반쯤 열린 침실이 언뜻 눈에 띄었다. 유리 같은 양장판 아랫목에는 새빨간 비단 보료를 깔아 놓았고, 그 머리맡의 자개 탁자는 초록빛의 삿갓을 씌운 전등이 지금 막 들어와서 으스름 달처럼 내리비친다. 여자의, 더구나 독신으로 지내는 여자의 침실을 들여다보는 것이 실례인 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주인이 제가 앉은 바로 맞은쪽의 미닫이를 열고 드나들기 때문에 자연 눈에 띄는 데야 일부러 고개를 돌릴 까닭도 없었다. (심훈, 『상록수』,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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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리에 대한 내 인상을 맨처음으로 상해 놓은 것은 전기회사 공부工夫다. 계량기를 달러 온 그는 내가 묻지 않은 것을
"두꺼비집이 이 관동館洞에 한해서는 이렇게 두 개씩이죠."
하고 객쩍은 말을 하였다. 그것은 웬 까닭이냐 물었더니, 경성 시내에서 전기 사용하는 사람이 이 동리같이 많은 곳은 없어 그래 그 까닭으로 하여 이렇게 '두꺼비집'을 두 개를 만들어 놓았다 한다.
도전盜電을 하느라면 흔히 전기가 끊어지기 쉬운데 그 경우엔 회사에 신고하는 일 없이 간단히 철선鐵線 등을 가져다 수리한다든가 그렇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따로 두꺼비집을 또 하나 달아 놓고
"자- 이렇게 딱지를 붙여 꼭 봉해 놓지요."
그리고 이 동리에서 전등선의 고장을 호소할 때 출정한 회사원은,
"어떡하다 줄이 끊어졌소?"
"그냥 제절루……"
"제절루 왜 끊어진단 말요. 대리미를 썼든 게로구려. 곤로를 사용했든 게로구려."
바로 으르딱딱어리기를 죄인 다루듯 한다 하고 내 집에 계량기를 달고난 젊은 공부는,
"하지만 댁에서는메-도루시니까 고장만 났다고 전화 한 번만 걸어 주시면 즉시 달려올 겁니다."
그러나 그도 2,3주일 지나 우리가 전기풍로를 사용하다 줄이 끊어졌을 때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회사원은 게으르게 오고 나는 내 자신 입을 열어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가 메터제임을 설명하지 않았으므로 회사원이 제 자신 아랫방 벽에가 계량기가 달려 있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우리는 제법 언성을 높여 전기풍로와 같은 것은 사용하면 안 되지 않느냐거니 어쨰 사용하여서는 안 되는 거냐거니 하고 얼마 동안 다투었다. 마침내 그는
"아, 메- 도루시군요? 모르고 실례했습니다."
사과를 하였으나, 나는 관동 주민으로서 며칠 동안 매우 불쾌하였다. (박태원, '모화관잡필',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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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쯤 제호가 싱글벙글 털털거리고 들어오더니 빳빳한 십 원짜리로 오십 원을 착 내놓는다.
"자, 이게 우리 괭이 한 달 월급이다. 허허허허, 괭이 월급 주는 놈은 이 세상에 이 박제호 한 놈뿐일걸? 허허허, 제기할 것, 허허허허."
"이렇게 많이?"
초봉이는 반색을 하면서 웃는다.
아닌게아니라 이삼십 원 월급이나 받는 것보다 월등 낫다는 타산이야 종차 생각나겠지만, 우선 눈앞에 내논 한 달 용돈 오십 원이 푸짐하던 것이다.
"허허! 그게 그리 대단해서!"
제호는 초봉이의 볼때기를 가만히 꼬집어 주면서,
"……돈 오십 원이 그리 푸달지다구? 쓰기 나름이지…… 그걸랑 둬두구서 반찬거리며, 전등세, 수도세, 식모 월급, 그런 거나 주라구…… 집세는 내가 따루 줄 테구, 또 나무 양식두 따루 딜여 보낼 테니깐, 알겠지!…… 응, 그리구 참, 달리 무엇 살림 장만할 게 있다던지, 옷감 같은 걸 끊느라구 모갯돈이 들겠거들랑, 날더러 달라구 말을 하구."
초봉이는 따로 시방 약삭빠른 셈을 따져 보고 있다.
수돗세, 전등세, 식모 월급 다 치더라도 십 원이 채 못 될 것이고, 반찬거리라야 제호의 밥상을 어설프지 않게 하기로 하더라도 한 달에 이십 원이면 족할 것이고. (채만식, 『탁류』,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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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미니까 달랑달랑 하는 종소리를 내면서 제대로 열리었다. 식모가 나왔다. 자던 눈이다.
"아가씨, 지금 오세요?"
무경이는 대답지 않고 대청으로 올라서서 어머니 방을 건너다보았다. 자리에 누웠다가 일어난다. 아무 구석을 맡아 보아도 사람이 다녀 나간 기척이 없어서 그는 비로소 의심에 붙들렸던 가슴을 가라앉힌다. 그러나 제가 쓸데없는 억측에 붙들렸던만큼 제 마음에 대하여 염증과 혐오감이 따르는 것은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지금 오니?"
하고 어머니는 푸른 등을 끄고 촉수가 강한 전등으로 실내를 밝힌다.
"네."
나직이 무경이는 대답할 뿐. 그러나 대청 한복판에 유쾌하지 못한 심화를 품고 서 있은 채 그는 움직이지 못한다. (김남천, '경영', 1940)
우리 가정에서는 전기계량기를 쓰는 집이 참 적습니다.그러므로 가만히 보면 몇이고 켜논 채 밤새도록 그대로 자는 집이 많습니다.
전기를 이렇게 쓰면 전기회사에 손[損]이 가는 것과, 따라서 공중도덕을 못지킨다고 하는 말은 그만두더라도 이같이 전기를 켜두면 얼마나 손인가를 말씀하겠습니다.
그 증거로는 [첫째]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아픕니다.
둘째로 전등을 오래쓰면 수명이 짧을 뿐 아니라 불이 어둡게 됩니다.
셋째로 도적이 들었을 때 방 속 형편을 잘 가르쳐주는 것이 됩니다.
주의를 말씀할 것은 전등선을 직접 못에 걸어두지 말고 다른 줄로 매서 걸지 않으면 위를 하고 젖은 손으로 전기기구에 대면 감전하는 일이 있으며 또 불을 끌 때는 스위치를 돌리면 계량기 논 집에서는 전기를 더 쓰게 되는 것이니 전등을 돌려 끌 것이오, 소제할 때 잘못하여 총채로 치게 되면 전등선이 끊어지는 것이니 먼지는 걸레로 훔치게 할 것입니다.
('가정상식, 전등에 대한 지식', 동아일보, 1934.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