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으나 많으나 전화만 하시면 금시로 배달해드리고 즉전이나 다름없이 본값으로 해드립니다."
덕기는 목소리가 귀에 익어서,
"어느 집이오?"
하고 다시 한 번 내다보다가 문을 활짝 열며,
"사─람은! 이게 무슨 장난인가? 연극하나?"
흰 두루마기를 입은 덕기는 일변 놀라며, 웃으며 뛰어나온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늘이 개신데, 한 자국 떼주십쇼그려."
병화는 싱글거리며 연해 허리를 굽실거린다.
"정말인가? 허허허... 사람두!"
덕기뿐 아니라 방 안 사람이 번갈아가며 내다보고 빙긋빙긋 웃으나 병화는 반죽 좋게 버티고 서서 조른다.
"그런데 이건 별안간 어디서 얻어 입었나? 지금 무슨 연습을 하는 건가? 이러고 어디를 갈 모양인가?"
덕기는 여러 가지 의혹이 창졸간에 들었다. 닷새 전의 장삿날 반우返虞터에서 잠깐 만난 후로는 못 보았지마는 그때도 멀쩡히 양복을 입고 왔었는데, 그동안에 또 무슨 객기를 부리고 이 꼴로 돌아다니는지 우스운 것보다도 궁금하다.
"어서 올라오게. 도무지 왜 그리 볼 수가 없나?
"가만히 계십쇼, 내 일부터 하고요."
하고 병화는 가슴에 찔렀던 광고를 쓱 빼내어서 한 장 준다.
"흥, 정말인가? 자네가 허나?"
"서방님 같은 분이 한밑천 대주시면야 모르겠습니다마는, 두 불알만 가진 놈이 웬걸 제 손으로 하겠습니까. 배달꾼입죠."
"말씀 좀 낮춰 하시지요."
"황송한 처분입니다."
"허허... 그만하면 주문도리로는 급젤세. 자, 그만하고 이젠 좀 올라오게."
"바빠서 올라갈 새는 없어와요. 그럼 통장 하나 두고 갑니다."
하고 가슴패기에서 이번에는 통장을 꺼낸다. '조' 자까지 미리 쓰고 한 장 넘겨서는 3전 수입인지까지 붙여서 도장을 딱딱 찍어놓은 것이다. (염상섭, 『삼대』,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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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창은 ― 6척×1척 5촌 5푼의 그 창은 동쪽을 향하여 뚫려 있었다. 그 창 밑에 바특이 붙여 쳐 놓은 등탁자 위에서 쓰고 있던 소설에 지치면, 나는 곧잘 고개를 들어, 내 머리보다 조금 높은 그 창을 치어다보았다. 그 창으로는 길 건너편에 서 있는 헤멀슥한 이층 양옥과, 그 집 이층의 창과 창 사이에 걸려 있는 광고들이 보인다. 그 광고등廣告燈에는,
醫療機器 義手足
이러한 글자가 씌어 있었다.
그러나 그 창으로 보이는 것은 언제든 그 살풍경한 광고등만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
덜컥! 하고 버스는 또 급격하게 정거하였다. 나는 창 밖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 곳이 연병장練兵場임을 알았다. 나는 잠깐, 새로운 궤도 부설軌道敷設이 아직 끝나지 아니한 '구용산선'[舊龍山線]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나의 눈에 전차 선로를 횡단하여 오는 한 어린이의 모양이 보였다. 그 어린이는 행길을, 호떡을 먹으면서 걸어 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나는 갑자기 나도 무엇인지 먹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원정 일정목엔가 이정목에 있는 조그만 음식점이 머리에 떠올랐다.
언젠가 나는 그 곳에,
金百圓 デモ 傳授セヌ 금백원이라도 전수하지 않음 ライスカレ─ 라이스카레 一皿十五錢 한 접시 십오 전 |
이러한 광고판을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물론 그야 그 동안에 이삼 년의 시일이 경과되었고, 더구나 서울 어느 구석이라도 찾아들기를 주저하지 않는 경제 공황은, 혹은 그 음식점 주인으로 하여금 단돈 십 원을 받고──아니, 어쩌면 단돈 일 원조차 받는 일 없이 ──그 영업 밑천인 '특제 라이스 커레이' 제법製法을 아무에게든 전수하여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아무렇든 좋았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보잘 것 없는 이 겨울의 한강을 나가는 것이 무의미한 것을 막연히 느끼면서, 이 곳에서 버스를 내리리라고 마음먹었다. (박태원, '피로',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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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이 마코를 꺼내 놓고 붙여 문다. P는 포켓 속에 들어 있는 해태를 차마 내놓기가 낯이 따가워 M의 마코를 집어 당겼다.
[...]
P는 설명을 시작한다. P 자신 그러한 장난 비슷한 공상은 하면서 일단 해보라고 하면 주저할 것이지만 어쨌거나 그랬으면 통쾌하리라는 것이다.
"먼점 경무국에 들어가서 아주 까놓고 이야기를 한단 말이야. 우리가 지금 대상으로 하는 것은 총독부가 아니라 조선의 소위 민간측 유지들이니까 간섭을 말어 달라고."
"그러면 관허(官許) 메이 데이로구만."
"그래 관허도 좋아…… 그래 가지고는 기에다가는 무어라고 쓰느냐 하면 우리에게 향학열을 고취한 놈이 누구냐? …… 어때? "
"조―치!"
"인텔리에게 직업을 대라…… 이렇게 노래를 지어 부르거든."
...
"응…… 유지와 명사의 가면을 박탈시키라고…… 한 몇십 명이 그렇게 데모를 한단 말이야! 하하하하."
M은 이렇게 웃고 H는 시원찮게 핀잔을 준다.
"드끄럽소, 여보…… 아 글쎄 멀끔멀끔한 양복쟁이들이 종로 네거리로 기를 받고 그렇게 다녀 봐! 애들이 와서 나 광고지 한 장 주, 하잖나."
하하하하.
허허허허.
창 밖에서 냉이장수가 싸구려 소리를 외치고 지나간다. M이 그에 응하여,
"이크! 봄을 덤핑하는구나!" (채만식, '레디메이드 인생',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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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행사변형대각선방향을추진하는막대한중량.
마르세이유의봄을해람한코티의향수의마지한동양의가을
쾌청의공중에붕유하는Z백호伯號. 회충양약蛔蟲良藥이라고씌어져있다.
옥상정원. 원후를흉내내이고있는마드무아젤.
[...]
(이상李箱, '건축무한육면각체,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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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헤벌어진 수채 속으로 비행기에서 광고 삐라. 향국鄕國의 동해童孩는 거진 삐라같이 삐라를 주우려고 떼지었다 헤어졌다 지저분하게 흩날린다. 마꾸닝[Macnin] 회충구제蛔蟲驅除 그러나 한 동해도 그것을 읽을 줄 모른다. 향국의 동해는 죄다 회충이다. 그래서 겨우 수채구멍에서 노느라고 배아픈 것을 잊어버린다. 동해의 양친은 쓰레기라서 너희 동해를 내어다버렸는지 모르지만 빼빼 마른 송사리처럼 통제 없이 왱왱거리면서 잘도 논다. (이상李箱, '산책의 가을', 유고. *1934-5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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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오늘도 놀리고 간다. 우산을 접으며 뛰어가려니까 출발해 버린다. 나는 굳이 버스의 뒤를 보지 않으려, 그 얄미운 버스 뒤에다 광고를 낸 어떤 상품의 이름 하나를 기억해야 할 의무를 가지지 않으려 , 다른 데로 눈을 피한다.
벌써 삼 년째 거의 날마다 집을 나와서는 으레 버스를 타지만, 뛰어오거나 와서 기다리거나 하지 않고 오는 그대로 와서, 척 올라탈 수 있게, 그렇게 버스와 알맞게 만나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태준, '장마', 조광, 19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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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생각 끝에 조선은행 앞을 잡아 본다. 별로 의식하지 않고 작중 인물의 청춘 남녀는 이 곳을 여러 번 내왕하게 된다. 지드나 펄 벅의 책이나 읽히려 마루젠[환선책방]으로 보내야 할 게고, 코티나 맥스맥터 곽이나 사재도 백화점[미쓰코시]으로 끌고가야 할 테고, 커피잔이나 소다수잔을 빨린다든가 극장 파한 뒤에 페디니 뚜비비에니 콜다[영국 영화감독]니 하고 잔수작을 시키재도, 한번은 이 광장을 통과시켜야 한다. 그러나 광고주廣告柱가 서고 새끼줄을 가끔 늘여 놓고 흰 팽키루다 차도 인도를 갈라 놓은 이 광장을 우리 사랑하는 되련님이라든가 아가씨를 거닐게 하기는 매우 위태하다. (김남천, '장안금고기관長安今古奇觀', 1938)
(남) 모시모시 아 모시모시 혼쿄꾸 후따센 나나햐꾸 하찌쥬 야빠요
(남) 할로우 할로우 당신이 정희씨요
(여) 네 네네 홧 이즈 유어 네임
(남) 엊저녁 속달편진 보셨을 테지요
(여) 아 약광곤줄 잘못 알고 불쏘시갤 했군요
(남) 저응 저응 아이 러브 유
(여) 아이고 망칙해라 아이 돈 노우 빠이 빠이
(남) 아차차차차 으응 으응 으응 으응 저 끊지 말어요 죠죠죠 죠또마떼
(합) 끊으면 나는 싫여 나는 몰라요 [후략]
(김해송·박향림, '전화일기', 박영호 작사·김해송 작곡 , 콜럼비아레코드 1938년 발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