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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전선 이상없다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5. 7. 14:21

동경이 가을이다. '간다神田' 어느 철물전에서 한 개의 네일 클리퍼를 구한 구보는 '진보초神保町, 그가 가끔 드나드는 끽다점을 찾았다. 그러나 유식을 위함도 차를 먹기 위함도 아니었던 듯싶다. 오직 오늘 새로 구한 것으로 손톱을 깎기 위하여서 만인지도 몰랐다.

그중 구석진 테이블. 그 중 구석진 의자. 통속 작가들이 즐겨 취급하는 종류의 로맨스의 발단이 그곳에 있었다. 광선이 잘 안 들어오는 그곳 마룻바닥에서 구보의 발길에 채인 것. 한 권 대학 노트에는 ‘윤리학’ 석자와' 임姙'자가 든 성명이 기입되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죄악일 게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그만한 호기심은 허락되어도 좋다. 그래도 구보는 다른 좌석에서 잘 안 보이는 위치에 노트를 놓고, 그리고 손톱을 깎을 것도 잊고 있었다.
제1장 서론. 제2절 윤리학의 정의. 2. 규범과학. 제2장 본론. 도덕 판단의 대상. C 동기설과 결과설. 예 1. 빈가貧家의 자손이 효양孝養을 위해서 절도함. 2.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자선 사업. 제2학기. 3. 품성 형성의 요소. 1. 의지 필연론……
그리고 여백에, 연필로, 그러나 '수치심은 사랑의 상상 작용에 조력을 준다. 이것은 사랑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 스탕달의  '연애론'의 일 절. 그러고는 연락 없이, '서부전선 이상 없다'. 길옥신자吉屋信子. 개천룡지개芥川龍之介. 어제 어디 갔었니. '라부 파레드'[Love Parade]를 보았니, …… 이런 것들이 쓰여 있었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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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하순의 어느 일요일, 아침밥을 먹고 새로 도착한 '룬드샤우'[독일의 신문]를 드러눈 채로 펴들고 있는데 마당에서 게다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보니 그것은 의외에도 무슨 책을 옆에 낀 스즈끼였다. 스즈끼가! 하고 김강사는 잠깐 뜨끔했으나 도리어 일종의 흥미가 생겨서 곧 방으로 불러들였다. 
스즈끼라는 학생은 키가 크고 광대뼈가 내밀고 아래턱이 큰 것이 마주앉아 보면 조선사람같은 인상을 주었다. 이 얼굴이 T교수의 마음에 안드는 것인가 하고 김강사는 생각해보았다. 스즈끼는 처음에는 머뭇머뭇하고 있더니 이야기가 독일문학으로 돌아가자 기운이 나서 떠들기 시작하였다. 될 수만 있으면 S전문학교 따위는 집어치우고 동경으로 가서 독일문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희망이었다. 스즈끼의 어학 힘으로는 아직 독일어 같은 것은 잘 알지 못할 터인데 그는 독일문학, 그중에서도 독일 현대문학에 대해 몹시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해 봄에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의 일은 김강사보다도 도리어 잘 알고 있었다. 
"에른스트 톨러, 게오르그 카이서, [루드비히] 렌[,] [에리히] 레마르크, 심지어 토마스 만 형제까지도 예술원을 쫓겨났다지요?" 
"그랬지요." 
김만필은 작년 이래로는 취직운동에 쪼들려 독일문단의 최근 사정을 알아볼 여유가 없었던이만큼 스즈끼의 지식에는 감복했지만 그와의 이야기에는 별로 흥을 낼 수 없었다. 그것은 스즈끼가 불량학생이라는 T교수의 귀띔이 있었기 때문뿐 아니라 다른 본능적인 경계심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두 사람의 이야기는 나치스 독일에서의 문학자 박해로부터 그것의 정치조직에 대한 공격으로 옮겨갔다. 스즈끼는 열을 띠어 히틀러의 문화유린을 욕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김만필은 차차로 스즈끼에 대해 부정을 느끼게 되어 이번 가을 후로 감추기에 애써오던 그의 보다 진실한 반면―그가 지금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든간에 그 감추어진 반면이야말로 정말 자기라고 남몰래 생각하고 있는 그 반면을 하마터면 토설해서 동경 유학시대 이후로 울적했던 기분을 풀 뻔했으나 마음을 다시 고쳐먹고 스즈끼의 얼굴을 경계하는 눈으로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유진오, '김강사와 T교수',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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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봉이는 제가 거처하는 건넌방에서 아침 출근 채비가 한창이다.

옷은 마악 갈아입었고, 그 다음에는 언제고 하는 버릇으로 마지막, 거울에다가 바투 얼굴을 대고서 이이, 이빨을 들여다본다. 그리 잘지도 않고 고른 위아랫니가 박속같이 새하얗게 드러난다. 아무것도 없다. 잇념 밑에 빨간 고춧가루 딱지도 박히지 않고, 잇살에 밥찌꺼기도 끼지 않았다.

소매 끝에서 꺼내 쥐었던 손수건을 도로 집어넣고, 이번에는 방 안을 한 바퀴 휘휘 둘러본다. 방금 벗어 내던진 양말짜박이야 치마야 속옷 들이 여기저기 제멋대로 널려 있다.

셈든 계집아이가 몸 담그고 있는 방 뒤꼬락서니 하고는 조행에 갑甲은 아깝다. 그러나 계봉이 저는 둘러보다가 만족하대서,

"노이에스 니히츠!"

하고 아 베 체 데도 모르는 주제에 독일말 토막을 쌔와린다.

미상불 뒤가 어수선한 품이 종시 그 대중이지 서부전선처럼 아무 이상이 없기는 하다. 그러나 계봉이 저는 나갈 채비에 미진한 게 없다는 뜻이요 하니 오케이라고 했을 것이지만, 요새 그 오케이란 말이 자못 속되대서 이놈이 그럴싸한 대로 응용을 하던 것이다.

팔걸이시계를 들여다본다. 여덟시에서 십 분이 지났다. 지금 나서서 ××백화점까지 가자면 십 분이 걸리니, 여덟시 반의 출근 정각보다 십 분은 이르다. 그놈 십 분은 동무들과 잡담으로 재미를 본다. 되었다.

"노이에스 니히츠!"

한마디 부르는 흥으로 또 한번 외우면서, 샛문을 열고 마루로 나가려다 말고 문득 이끌리듯 환히 열어 젖힌 앞문 문지방을 활개 벌려 짚고 서서 하늘을 내다본다. (채만식, 『탁류』, 1937-8)

 


독일의 인기작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세계대전 이후의 수많은 전쟁 소설 중에서 한층 빼어난 작품으로 이미 전세계 20여개 국어로 번역되어 수천만 독자를 얻었고 조선말로도 번역되었으니 아마 읽은이가 꽤 많을 것이다. 혹 읽지 못한 이에게라도 '서부전선 이상없다'라는 이름만은 벌써 귀에 익었을 것이다. '이상이 없다'[異状なし]란 말이 유행어로 충분히 행세하는 것만 보아도 넉넉히 알 것이다.
이 소설이 이렇게 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것은 전장에서 일어난 일을 아무 과장함 없이 실상대로 만 그려놓아 독자의 마음을 힘있게 붙잡아 흔드는 까닭이다. 그리고 작자의 의도가 전쟁반대에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전쟁을 여실히 그린 까닭으로 많은 독자를 얻은 이 소설은 같은 이유로 많은 구속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거의 완부完膚 없다 하리만치 가위를 받은 것이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난 아메리카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이다. 
아무 동정 없는 가위를 뼈에까지 받기는 하였으나 깎고 깎아도 본래의 생명은 잃지 아니하여 나머지 토막토막에서나마 전쟁영화로서의 강미强味는 손상됨이 적다. 그러므로 의연히 좋은 영화의 부류에 속한다 하겠다. -후략- (동아일보, 193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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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5월 8일 금요일, 쾌청.

모트 박사에게 '공산주의 X·Y·Z"라는 책을 보내준 것에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 공산주의"에 관한 이야기는 "서부전선 이상없다"에 나오는 얘기만큼이나 끔찍하군요.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읽고서 며칠 심란했었지요. "공산주의 X·Y·Z"가 또 신경을 자극할까 두렵군요. 결국 러시아 공산주의라는 것도 세계대전의 결과 말고 무엇이겠습니까? (『윤치호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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