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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6년 전

 

동렬이와 박진(본이름은 아니다)이는, 고향은 다를망정 서울 어느 사립중학교에서 사 년 동안이나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동창생으로 막역한 사이였다. 동렬이는 박진의 불덩이 같은 정열과 모험이 있는 것을 사랑하였고, 박진이는 무슨 일이든지 의지적이요 침착하여 함부로 덤비지 아니하는, 자기와 반대되는 성격을 동렬에게서 발견하고 너무 과격한 자기의 성질을 조화시키려는 생각이 그와 친근해진 원인의 하나였었다. 그들은 흡사히 동성연애나 하는 사람처럼 예산 없는 학비나마 내 것 네 것 없이 나누어 쓰고 이불 한 채를 둘이 덮고 한겨울을 난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졸업하게 된 해가 바로 기미년! 당시의 의학생이요 그들이 형님이라고 부르던 이경재는 자기 집 골방에서 xx공보의 원고를 쓰고, 동렬이는 등사판질을 하는 한편 진이는 밤을 타서 배달부 노릇을 하다가 그만 한끈에 묶여서 경찰서를 거쳐 처음으로 감옥에 입학하였다.

그때에 진이는 정면으로 반항을 하다가 오른편 팔을 비틀려서 쓰지를 못했었고, 동렬이는 주범으로 몰려서 맨 나중으로 호송되었다. 그날은 아직도 남산 '누에머리'에는 눈 자취가 스러지지 않은 음산한 아침이었는데 처음 타보는 자동차 속에는 여학생 한 사람이 포박을 당한 채 먼저 타고 있었다. 양옆으로 순사가 끼어 앉은 통에 그 여학생과 동렬이는 몸이 바싹 다붙지 않을 수 없었다. 숫보기 총각이었던 동렬이는 부드러운 감촉과 따뜻이 스며드는 체온으로 여러날 동안 극도로 날카로워졌던 전신의 신경이 가닥가닥 풀리는 듯하였다.

...

그러나 두 사람의 로맨스는 추후에 자세히 적기로 하자.

─ 진이와 동렬이는 일년이 넘는 형기를 마치고 옥문을 나섰다. 그동안에 치른 가지가지의 고초는, 한풀이 꺾이기는커녕 그들로 하여금 도리어 참을성을 길러주고 의기를 돋우기에 가장 귀중한 체험이 되었던 것이다.

"넓은 무대를 찾자! 우리가 마음껏 소리 지르고 힘껏 뛰어볼 곳으로 나가자!"

하고 부르짖은 것은, 서대문 감옥문을 나서자 무악재를 넘는 시뻘건 태양 밑에서두 동지가 굳은 악수로 맹세한 말이었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정의의 심장이 뛰놀고 새로운 희망은 그들의 혈관 속에서 청춘의 피를 끓였다. (심훈, '동방의 애인', 1930, 미완)

 

**

(그리고) 공덕리 위를 지날 때에는 멀리 독립문 밖 무학재 넘어 홍제원洪濟院 시내溪의 모래밭까지 보이는데 그곳은 내가 보통학교에 다닐 때에 운동 연습으로 또는 원족회遠足會[야유회]로 자주 갔던 곳이라 마음에 그윽이 반가웠습니다. 
거기서 경의선京義線 철로의 중간을 끊고 새문 밖 금화산金華山 부근의 하늘에서 나 어릴 때의 세월을 보내던 미동보통학교渼洞普通學校의 불타고 없어진 옛 터나마 살피려 하였으나 그 부근에 신건축이 많은 탓인지 얼른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바로 또렷이 보이는 것은 모화관慕華館 뒤 무악재 고개와 그 앞에 서 잇는 독립문이었습니다. 독립문은 몹시도 쓸쓸해 보였고 무악재 고개에는 흰옷 입은 사람이 꼬믈꼬믈 올라가고 있는것까지 보였습니다. 그냥 지나가기가 섭섭하야 비행기의 머리를 조금 틀어 독립문의 위까지 떠 가서 한발 휘휘 돌았습니다. 독립문 위에 떴을 때 서대문西大門 감옥에서도 자기네 머리 위에 뜬 것으로 보였을 것이지마는 갇혀 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거기까지 찾아간 내 뜻과 내 몸을 보아주었을런지... 붉은 높은 담 바깥에서 보기에는 두렵고 흉하기만 한 이 감옥이 공중에서 내려다 보기에는 붉은 담에 에워싸인 빛 누른 마당에 햇빛만 혼자 비추고 잇는 것이 어떻게 형용할 수 없이 한없이 쓸쓸하여 보일 뿐이었습니다. "어떻게나 지내십니까." 하고 공중에서라도 소리치고 싶었으나 어떻게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섰습니다. (안창남,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 『개벽』, 1923.1)

 

▲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의 이육사 (19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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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계신 줄을 몰랐군! 김 군은 있나요?"
덕기는 하여간 들어섰다.
"이리 올라앉으세요. 이제 곧 오시겠죠."
조그만 다다밋방에는 이전 병화 방에서 보던 일깃거리는 밥상만 한 책상이 놓이고, 화로 앞에는 방석 한 개가 깔려 있다.
덕기는 신기한 듯이 상점 안을 이 구석 저 구석 돌려보다가,
  "어디 배달 나갔나요?"
하고 방문턱에 걸터앉았다.
"아녜요. 서대문 감옥에 나가셨에요. 이제 곧 오시겠지요."
필순은 부리나케 방 안을 치우고 방석을 내놓으며 권하였다.
"감옥에는 왜?"
"저번에 들어간 이들을 면회도 하고, 식사 차입도 하려고요. 벌써 가셨으니까 좀 있으면 오시겠죠."
필순은 덕기가 곧 간다고 할까 보아 애를 쓰면서, 

복제당한 인사를 하고 싶으나 무어라고 한지 몰라 얼굴이 또 발개졌다.
감옥 친구에게 차입을 할 만큼 셈평이 핀 것도 고마운 일이지마는, 셈이 좀 돌렸다고 감옥 친구들을 잊지 않고 없는 돈에 차입이라도 하는 것은  무던하다고 덕기는 생각하였다. (염상섭, 『삼대』,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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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원을 나와서 단 한 군데라는 약국을 두들겨 깨우고, 껌껌한 등잔 밑에서 망건을 벗고 앉은 늙은이를 붙들고 일장 이야기를 하니,
"허, 놀라서 동태가 된 모양인데 맥을 봐야지 함부로 약을 쓸 수는 없소이다."
하고 좀처럼 얼른 지어 주려고 아니한다.

"그럼 좀 가보실 수 있을까요?"
"요 근천가요?"
"이 뒤 절에서 내려왔는데."
"글쎄요. 집을 비우고 나갈 수가 없는데요."
여러 가지로 졸라 봐도 소용이 없었다. 환자를 가보기 싫은 것보다도, 겁을 집어먹고 약을 쓰기가 싫어서 하는 눈치인 듯싶었다. 나중에는 무슨 약재인가가 자기에게 없으니까, 가보고 온대야 약을 지어줄 수 없다고 떼어 버리는 것이었다. 
봉익이는 골딱지가 나서 에이 하고 나와 버렸으나, 그대로 돌아가는 수도 없고 길가에 서서 생각을 하다가, 어린애를 들몰듯이 하여 무악재로 줄달음질을 쳤다. 
무악재를 넘어서 감옥 게를 바라보니까, 전등불이 반짝거리고 사람이 오락가락하는 것만 보아도 산 것 같고, 아무리 겨울이라 해도 열 시 열한 시면야 시내에서는 아직 낮일 듯싶다.
그 신통치 않은 한약을 짓는다 해도 나가서 달이고 어쩌고 하느라면 밤을 밝힐 것이니, 이왕이면 한시바삐 데려 들여오느니만 같지 못하다고 다시 생각하고, 인력거방을 간신히 찾아가서 두 대를 아이놈과 나눠 타고 되곱행을 쳐 나왔다. (염상섭, 『무화과』,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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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버지의 애원을 듣던 그때, 그리고 아버지의 파리해진 얼굴을 바라보는 그 순간에 자신의 그 비창한 결심이란 얼마나 약한 것이었던가? 신철이는 한숨을 후 쉬었다. 그때 이 형무소에 같이 들어온 밤송이 동무며 그 밖에 여러 동지의 얼굴들이 번갈아 떠오른다. 특히 인천에 있는 첫째의 얼굴이 무섭게 확대되어 가지고 그의 앞에 어른거려 보인다. 신철이는 그 얼굴을 피하려고 눈을 번쩍 떴다. 어젯밤만 해도 첫째의 얼굴을 머리에 그려 보며 그리워하였는데, 이 순간에는 어쩐지 첫째의 그 얼굴이 무섭게 보였던 것이다.
창문으로 쏘아 들어오는 붉은 실타래 같은 햇발이 벽 위에 아로새겨졌다. 유리, 철창, 굵은 철망, 가는 철망의 네 겹을 뚫고 들어오는 저 햇빛! 그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동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간수가 미하리(망) 구멍으로 들여다볼 때마다 시간을 물어 가지고 그 햇빛을 따라 벽 위에 가는 금을 그어 놓았다. 그래서 시간을 짐작하곤 하였던 것이다. 신철이는 저 햇발을 바라보면서 지금 열한 시 반이나 되었을 것을 짐작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지금 집에 돌아가셔서 몹시 번민하시겠지…… 하였다. 아버지의 모양을 보아 말하지는 않아도 그나마 학교에서도 나온 것임을 알 수가 있었다. 몇 식구가 오직 아버지만 바라보고 있던 터에 아버지마저 학교에서 나왔다면 그 생활의 궁함이야말로 보지 않았어도 능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어떻게 한담? 그의 집안을 돌아보아서 여기서 꼭 나가야 하겠고, 보다도 자신의 약한 육체를 보아서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때 그는 경찰서에서 고문받던 생각을 하고 소름이 쭉 끼쳤다. 두 번은 못 당할 노릇이었다. 그리고 모르고나 당할 노릇이지 지금과 같이 그 맛을 뻔히 알고서는 넙죽 죽으면 죽었지 그 노릇은 다시 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확실히는 모르나 미결에서 기결로 옮아가게 될 것도 일이 년은 걸릴 듯하였다. 그리고 다시 기결에 들어서는 십 년이 될지, 십오 년이 될지? 그것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십 년 밖이지 십 년 내로는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일생을 이 감옥에서 보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앞이 아뜩해졌다. 그때 그는 병식이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의 하던 말을 곰곰이 되풀이하였다. 어제 병식의 앞에서는 그의 말에 구역증이 나고 듣기도 싫더니 불과 하루를 지난 오늘에는 그 말이 그럴듯하게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병식의 앞에서 머리를 굽혀 보이기는 그의 자존심이 아직도 강하였다. 그는 한숨을 푹 쉬고 무심히 발끝을 굽어보았다. 그때 발가락에 개미 한 마리가 오르고 내리는 것이 보였다. 신철이는 반가운 생각이 들어 개미를 붙잡아 손바닥에 놓았다. 개미는 어쩔 줄을 몰라 발발 기어 달아난다. 달아나면 또 붙잡아다 놓고서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그가 개미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자신이 이 개미와 같이 헛수고를 하는 듯싶었다.
개미야말로 모르고서나 이 감방에를 찾아 들어온 것이지, 아무 먹을 것이 없는 이 쓸쓸한 감방에 들어올 까닭이 없었다. 오늘 이 개미는 먹을 것도 얻지 못하고 자기에게 붙잡혀서 고달플 것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 몸은 아무 소득도 없는 고생을 이때까지 해오다가, 또다시 여기까지 들어온 것 같을 뿐 아니라, 앞으로 몇십 년을 지나고 다행히 목숨이 붙어서 밖에 나간댔자, 벌써 자신은 그만큼 뒤떨어져서 여기도 저기도 섞이지 못하고, 결국은 일포나 기호 같은 그런 고리타분한 전락된 인텔리밖에 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 자리를 벗어날 것인가? 신철이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강하게 흔들리지를 않고 아주 약하게 흔들리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마침 버들피리 소리가 끊어질 듯 질 듯하게 들리므로 그는 벌떡 일어났다. 신철이는 얼른 미하리 구멍부터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디서 간수의 신발 소리가 나는가 하여 귀를 쫑긋 세우며 창 앞에 다가섰다. 

창의 높이는 신철의 턱을 지나쳐 입술과 거의 맞닿았다. 신철이는 한숨을 푹 쉬면서 인왕산을 바라보았다. 따스한 햇볕을 안고 반공중에 뚜렷이 솟은 저 인왕산…… 그때 가까이서 새소리가 나므로 시선을 옮겼다. (강경애, 『인간문제』,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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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큰길로 나왔다. 상기가 되었던 뺨을 스치는 밤바람이 여간 시원하지가 않다.
"우리 산보나 헐까요?"
"기차 시간이 되지 않었어요?"
"오늘 못 가면 내일 첫차루 가지요. 하룻밤쯤 새우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영신 씨가 또 쫓겨나실까 봐서……."
"전 괜찮아요. 쫓겨나면 고만이죠."
영신은 동혁이가 또 그대로 뿌리치고 갈까 보아 도리어 겁이 났던 판이라 '어디로 갈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그럼 목두 마른데 악박골루 가서 약물이나 마실까요?"
하고 독립문 편짝을 향해서 앞장을 선다.
"참, 악박골이 영천이라구두 허는 덴가요?"
"여태 한 번도 못 가보셨어요?"
"온, 시굴뜨기가 돼서……."

▲ 해방 후 서대문형무소 앞

"누군 시굴 사람이 아닌가요. 우리 고장은 옛날에 서울 양반들이 귀양살이나 하러 오던 동해변의 조그만 어촌인데요. 동혁 씨의 고향은 저번에 소개를 해주셔서 잘 알었지만 거기두 어지간히 궁벽한 데드군요."
두 사람은 천천히 걸어가면서 서로 자기네 고향의 풍경과 주민들의 생활하는 형편을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버스는 그친 지도 오랜 듯, 큰길 양 옆의 가게는 빈지를 닫기 시작한다. 독립문을 지나 서대문 감옥 앞 넓은 마당까지 오니까 전등불이 겅성드뭇해지고, 오고 가는 사람도 드물어서 어두운 골목 속으로 드나드는 흰 옷자락만 희뜩희뜩 보일 뿐.

떠오른 지 얼마 안 되는 하얀 달은 회색빛 구름 속에 숨었다가는 흐릿한 얼굴 반쪽을 내밀고 감옥의 높은 담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악박골 물터 위의 조그만 요릿집에서는 장구 소리와 함께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건달패와 논다니들이 어우러져서 약물이 아닌 누룩 국물을 마시고 그 심부름을 하는 모양이다. (심훈, 『상록수』,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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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모화관[독립관]으로 살림을 나와 산 지도 이미 일 년이 되어 온다. 십팔 평짜리 여덟 칸 집-물론 옹색은 하다. 그러나 나와 아내와 딸 설영이와 이렇게 세 식구가 할멈 하나를 데리고 가난한 살림살이를 경영하여 가기에는 우선 이만해 좋다. [...]

이곳의 어린아이들도 다른 동리의 아이들이나 한 가지로 할 장난들은 다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최근에 그 어린이들이 좀 유다른 장난을 하고 즐기는 것을 발견하고 마음에 좋지 못하다.

분명히 그렇게도 지척 사이에 '감악소'가 있는 까닭이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형리들은 죄인의 손을 얽고 몸을 묶어 이곳으로 안동按洞하여 왔고 또 한결같이 붉은 옷을 입은 전중이들은 개인 날 밭에 나와 부지런히 일들을 하였으므로 이 동리의 어린이들은 쉽사리 그것을 볼 수 있었고 본 것은 흉내 내는 것이 또한 재미있는 노릇이어서 그래 그들은 잘 순검이 된 한 아이가 새끼나 빨랫줄 등속으로 죄수가 된 몇 아이들을 잔뜩 묶어 가지고는 골목 안을 돌아다니는 그러한 형식의 장난을 하며 서로들 매우 만족한 듯싶다. (박태원, '모화관 잡필',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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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 세 사람 중에는 자기가 그 중 몸이 성하다고 해서 밥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밥그릇을 부시는 것이나, 밥 먹은 자리에 걸레질을 하는 것이나 다 제가 맡아서 하였고, 또 자기는 이러한 일에 대해서 썩 잘하는 줄로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아침이 끝나고 “벵끼 준비” 하는 구령이 나서 똥통을 들어낼 때면 사실상 우리 셋 중에는 윤밖에 그 일을 할 사람이 없었다. 그는 꺾꺾거리고 똥통을 들어낼 때마다 민을 원망하였다. 민이 밤낮 똥질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똥통이 무겁다는 불평이었다. 그러면 민은,

“글쎄 이 사람아, 내가 하루에 미음 한 공기도 다 못 먹는 사람이 오줌똥을 누기로 얼마나 누겠나? 자네야말로 죽두 두 그릇, 국두 두 그릇, 냉수두 두 주전자씩이나 처먹고는 밤새도록 똥통을 타고 앉아서 남 잠도 못 자게 하지.”

하는 민의 말은 내가 보기에도 옳았다. 더구나 내게 사식 차입이 들어온 뒤로부터는 윤은 번번이 내가 먹다가 남긴 밥과 반찬을 다 먹어버리기 때문에 그의 소화불량은 더욱 심하게 되었다. 

과식을 하기 때문에 조갈증이 나서 수없이 물을 퍼먹고, 그리고는 하루에, 많은 날은 스무 차례나 똥질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자기 말은,

“똥이 나왈 주어야지. 꼬챙이로 파내기나 하면 나올까? 허기야 먹은 것이 있어야 똥이 나오지.”

이렇게 하루에도 몇 차례씩 혹은 민을 보고 혹은 나를 보고 자탄하였다. (이광수, '무명',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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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사령' 출소자를 기다리는 가족들 (1927)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끝이 없이 뻗어 나간 것 같은 붉은 벽돌의 높직한 담장에 위압을 느끼듯 하면서, 불광이 흐릿한 굳이 닫힌 출입구 앞에서, 최무경이는 벌써 한 시간 동안이나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너무 일찍이 찾아왔었다. 그러나 다른 데서, 언제라고 꼭 작정이 없는 시간이 오기를 멍청하니 보내고 있을 수는 없어서, 그는 해가 그믈그믈할 때 아파트의 구내식당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고는 곧 영천행의 전차를 잡아타고 예까지 쫓아와서, 이렇게 혼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내왕도 드문 언덕이었으나, 그가 와서 기다리고 있는 한 시간 남짓한 동안엔, 오늘 검사국에서 간단한 취조를 마치고 새로이 이곳에 입소하는 피의자의 패거리와, 공판정이나 예심정에 취조를 받으러 나갔던 피고들을 태운 자동차가, 두세 차례나 이 커다란 문을 드나들었고, 낮일을 여태까지 보고 늦게야 집으로 돌아가는 간수들도 작은 문을 열고는 안으로부터 꾸부정하니 허리를 꾸부리고 불쑥 양복 입은 몸뚱어리를 나타내곤 하였다. 이럴 때마다 문 열고 닫는 소리는 깜짝깜짝 무경의 신경을 때리고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 년 가까이 차입을 하느라고 드나든 관계로 그중에는 안면이나 어렴풋이 있는 간수도 있었으나, 문 밖에서 만나면 그들은 언제나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지나치곤 하였다. 
밖으로부터 들어갈 사람이 다 끝났으니까, 인제 안으로부터 석방되는 사람이 나올 시간도 되었을 게다, 혹시 오시형이를 석방하라는 검사와 예심판사의 영장을 아까 재판소에서 돌아오던 간수 부장의 커다란 가방이 가지고 들어간 것이나 아닌가, 지금쯤은 오랫동안 친숙해진 미결감의 한 방에서 영장을 받아 들고 밖으로 나올 준비에 바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 이런 공상에 취하였다가, 덜커덩하고 문에서 쇠 여는 소리가 나면 그는 깜짝 놀라서 그 편으로 쫓아가 보곤 하였으나 그때마다 문으로 나타나는 것은, 간수거나 사식집 사환 아이거나, 그런 사람들이어서 그는 번번이 속아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아홉 시가 넘어서 한참이 되니까 부탁하였던 자동차도 왔다. 자동차가 세가 나는 요즘 같은 때에 오랜 시간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미안해서 그는 자동차에서 내려서, 
"아직 시간이 멀었습니까?" 
하는 운전사에게로 가까이 가며, 
"인제 얼추 시간이 되었을 거야요. 미터를 돌려서 시간을 계산해 주세요. 바쁘신데 자꾸 무리를 여쭈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머 딱히 정한 시간이 아니니까 따로 도리가 있어야죠. 대개 아홉 시가량이면 나올 수 있다니까 인제 얼마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자꾸만 시계를 불에다 비추어 보면서 운전사에게 미안의 변명을 늘어놓아 보는 것이었다. 아파트에서 특약하고 쓰는 곳이어서 안면이 있는 운전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운전대에 올라가선 카드를 들고 연필로 무엇을 끄적거려 보고 앉았다. 미터의 시계가 짤각거리다가 딸깍 하고 십 전씩 넘어서는 소리가 조용한 가운데서 무경이의 초조한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나 십 분이 넘고 이십 분이 되어도 아무러한 소식이 없었다. 이러다가 오늘도 또 헛물을 켜는 것이나 아닌가 ─ 그렇게 생각하면 꼭 그럴 것만 같이 생각되어 그는 더욱더 초조하게 바지바지 타는 심정을 누를 길이 없었으나,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저만큼 전찻길 있는 데까지 뛰어내려 가서 변호사한테 다시 전화를 걸어 보고 싶은 조바심까지 생겨나는 것을 인내성 있게 안타까이 참아 보고 있는 것이다. (김남천, '경영', 1940)

 


그 아이는 전차 타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놀이를 가르쳐 주마고 하면서 전찻길을 건넜다전찻길 건너에는 너른 마당이 있었고 너른 마당에서 층층다리를 올라간 곳엔 큰길과 철대문이 보였고 철대문 좌우로 높디높은 벽돌담이 끝 간 데 없이 뻗어 있었다. 집 마당만 나서면 곧장 내려다뵈던 바로 그 큰 대궐 같은 집 담장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볼 땐 담장 속에 있는 여러 채의 큰 집들을 볼 수 있었지만 전찻길에서 쳐다본 그 집은 담장밖에 안 보였다.

전차 타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놀이란 한길 옆 너른 마당에서 큰 집의 붉은 담장까지를 잇는 층층다리 양쪽에 물이 흐르도록 패인 홀에서 미끄럼을 타는 것이었다. 그 홀은 아이들의 엉덩이가 들어갈 만큼 넓었고 바닥이 매끄러웠다. 우리뿐만 아니라 그 동네 아이들이 여럿 거기서 즐거운 환성을 지르면서 미끄럼틀을 타고 있었다. 미끄럼 타기는 꽁무니가 짜릿짜릿하도록 재미있는 놀이였다. 나는 그 놀이의 재미에 흠뻑 빠져서 날 저무는 줄 몰랐다. (박완서, '엄마의 말뚝',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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