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나는 지금 '죽음'과 더불어 놀고 있다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5. 17. 10:02

"... 연전에 자살한 일본 문사文士 모씨의 '어느 옛벗에게 주는 수기'[아쿠타카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或旧友へ送る手記'(1927, 7. 유고)]란 (글) 속에, ……  나는 지금 '죽음'과 더불어 놀고 있다 ─ 이러한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죽음과 더불어 놀고 있다'는 것, 그 '경지'야말로 우리 인간으로서 맛볼 수 있는 '참된 기쁨'을 주는 '오직 한곳'이 아닐까요? 참말의 법열경이 아닐까요? 그리고 참말로 축복받은 용사가 아니고는 엿볼 수 없는 경지가 아닐까요? (...) 현재의 나에게 있어서 '죽음의 나라'는 가장 '행복스러운 나라'인 것이요, 그 나라로 간다'는 것은 '가장 큰 행복을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 행복을 획득하려 함에 주저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은 '그 행복이 참으로 크나큰 것이다' 하는 것을 그것에 지지 않을 만한 큰 '기대'로 대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기대가 크니만큼 그곳에서도 나는 '환멸'을 또 맛보지 않으면 안 되지나 않을까요? ..." 

[...]

그 이듬해 오월까지 나는 레인코트 입은 사나이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도처에서─ 저녁 산보 나간 길거리에서, 먼 곳에서 돌아오는 벗을 마중 나간 정거장에서, '제팔예술第八藝術'을 감상하고 있는 군중 속에서…… 그리고 진실로 몇 번인간 나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서─ 레인코트 입은 사나이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
나에게는 아직까지도 기억이 새로운 서력西歷 일천구백삼십년 유월 하순, 저 장마가 시작되기 전 마지막 가만한 비가 옛 서울을 힘없이 축이던 날 저녁이었다.
나는 레인코트 주머니에 팔을 꽂고 황혼의 거리를 정처없이 산책하였다. 그러나 저도 모를 사이에 나의 마음은 언젠가 레인코트 입은 사나이를 좆고 있었다. 
오! 외로운 벗이여.
그대는 지금 어디 있나
[...]
내가 입안말로 이렇게 중얼거리자 나는 언뜻 어느 신문사 게시판 앞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였다. 나는 거의 기계적으로 그 앞으로 다가가서 삼면 기사에 눈을 던졌다. 그리고 그곳에, 작년 가을에 동팔호실을 탈출한 정신병자가 어젯밤에 한강에 투신자살하였다는 것과 오늘 아침에 건진 그의 시체에는 낡은 레인코트가 걸쳐 있었다는 기사를 발견하였다. 
나는 갑자기 나의 마음이 공허하여지는 것을 깨달으며 그 앞을 떠났다. 
그예 그는 가고 말았다.
그예 그는 가고 말았다. (박태원, '적멸', 1930)

 

**

"내가 잿골 서방님허구 오류장 갔다가 밤에 늦게 온 이야기도 네가 했지, 요년?"
고 정선의 말은 더욱 날카로웠다.
“전 오리장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하고 유월은 속으로는 토라졌다.
정선은 얼른 책상에 돌아앉아서 편지 한 장을 써서 유월에게 주며,
“너 이것 가지고 다방골 병원댁에 갔다 온. 얼른 오시라고.”
하고는 체경에 제 꼴을 비추어 보았다. 머리는 부하게 일어나고 옷은 유치장에서 나온 것같이 꾸겨지고 얼굴은 앓다가 뛰어나온 것 같았다.
'내가 어쩌다가 이 꼴이 되었나?'
하고 정선은 낙심이 되었다.
'이러다가 내가 어찌 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났다.
[...]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났다. 이 생각은 팔자 좋게 자라난 정선으로는 도무지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오류동 철롯길에서 차에 치어 죽은 홍, 김 두 여자(그들은 정선과 동창이었다)를 정선은 비웃었었다. 
'죽기는 왜, 봄 같은 인생에 꽃 같은 청춘으로 죽기는 왜?' 
이렇게 생각한 것이었다.

[...]

하지마는 이태도 다 못 되는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에 정선은,
'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망신, 이 욕.'
하고 정선은 제 앞에 닥쳐오는 것이 망신과 욕뿐인 것을 보았다. 도무지 망신이나 욕을 맛보지 못한 정선에게는 망신과 욕은 죽기보다 싫은 것이었다. 정선은 세상이 저를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것을 보고는 살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죽어 버리자.'
하고 정선은 체경에서 물러나 방바닥에 펄썩 주저앉았다.
기찻길, 양잿물, 칼모틴 등등 죽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물에 빠지는 것, 목을 매는 것, 칼로 동맥을 따는 것. 정선은 소설에서와 신문에서 본 자살의 여러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물에 빠져 죽은 시체, 목매어 죽은 시체, 철도에 치어 사지가 산란한 시체― 이러한 것도 눈앞에 떠나왔다. 그 어느 것도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다. (이광수, 『흙』, 1932)

 

**

하숙 이층 그의 방에서 그는 몹시 게웠다. 말간 맥주만이 올라왔다. 나는 송 군을 청결하기 위하여 한 시간을 진땀을 흘렸다. 그를 눕히고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유월의 밤바람이 아카시아의 향기를 가지고 내 피곤한 피부를 간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멕시코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토하면서 울고 울다가 잠이 든 든 송 군을 생각했다. 순영에게 전화나 걸어볼까.

순영이? 나 상이야. 송군 집에 잘 갖다 두었으니 안심헐 일. 
오늘은 어쩐지 그냥 울적해서 견딜 수가 없단다. 집으로 가 일찍 잠이나 자리라 했는데 멕시코에 와두 좋지. 헐 이얘기두 좀 있구.

 

조용히 마주보는 순영의 얼굴에는 사 년 동안에 확실히 피로의 자취가 늘어 보였다. 직업에 대한 극도의 염증을 순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호소한다. 나는 정색하고, 
송군과 결혼하지 응? 그야말루 송 군은 지금 절벽에 매달린 사람이오. 송 군이 가진 양심, 그와 배치되는 현실의 박해로 말미암은 갈등, 자살하고 싶은 고민을 누가 알아주나. 
송 선생님이 불현듯이 만나 뵙구 싶군요.

십분 후 나와 순영이 송 군 방 미닫이를 열었을 때 자살하고 싶은 송 군의 고민은 사실화하여 우리들 눈앞에 놓여져 있었다. 
아로나르 서른 여섯 개의 공동 곁에 이상의 주소와 순영의 주소가 적힌 종이조각이 한 자루 칼보다도 더 냉담한 촉각을 내 쏟으면서 무엇을 재촉하는 듯이 놓여 있었다. 
나는 밤 깊은 거리를 무릎이 척척 접히도록 쏘다녀보았다. 그러나 한 사람의 생명은 병원을 가진 의사에게 있어서 마작의 패 한 조각 한 컵의 맥주보다도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한 시간 만에 나는 그냥 돌아왔다. 순영은 쩡쩡 천장이 울리도록 코를 골며 인사 불성 된 송군 위에 엎뎌 입술이 파르스레하다. 
어쨌든 나는 코고는 '사체'를 업어 내려 자동차에 실었다. 그리고 단숨에 의전병원으로 달렸다. 한 마리의 세퍼드와 두 사람의 간호부와 한 분의 의사가 세 사람(?)의 환자를 맞아주었다. (이상李箱, '환시기', 1936)

 

**

연姸이는 내 뒤를 서너 발자국 따라 왔든가 싶다. 그러나 나는 예년例年 십 월 이십사일 경에는 사체가 며칠만이라도 상하기 시작하는지 그것이 더 급했다.

"상箱 어디 가세요?"

나는 얼떨결에 되는 대로

"동경"

물론 이것은 허담이다. 그러나 연이는 나를 만류하지 않는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나왔으니, 자 ─ 어디로 어떻게 가서 무엇을 해야 되누.

해가 서산에 지기 전에 나는 이십삼일내로는 반드시 썩기 시작해야 할 한개 '사체'가 되어야만 하겠는데, 도리는?

도리는 막연하다. 나는 십년 긴─ 세월을 두고 세수할 때마다 자살을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나는 결심하는 방법도 결행하는 방법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다.

나는 온갖 유행약을 암송하여 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인도교, 변전소, 화신상회 옥상, 경원선, 이런 것들도 생각해 보았다. (이상李箱, '실화', 유고)

 

**

여름이 극성스럽게 덥더니, 추위도 그럴 징조인지 예년보다 무서리가 일찍 내리었다. 서참의가 늘 지나다니는 식은관사殖銀官舍에들 울타리가 넘게 피었던 코스모스들이 끓는 물에 데쳐 낸 것처럼 시커멓게 무르녹고 말았다. 
참의는 머리가 띵―하였다. 요즘 와서 울기 잘하는 안초시를 한번 위로해 주려, 엊저녁에는 데리고 나와 청요릿집으로, 추탕집으로 새로 두 점을 치도록 돌아다닌 때문 같았다. 조반이라고 몇 술 뜨기는 했으나 혀도 그냥 뻑뻑하다. 안초시도 그럴 것이니까 해는 벌써 오정 때지만 끌고 나와 해장술이나 먹으리라 하고 부지런히 내려와 보니, 웬일인지 복덕방이라고 쓴 베 발이 아직 내어걸리지 않았다. 
"이 사람 봐아…… 어느 땐 줄 알구 코만 고누……." 
그러나 코고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미닫이를 밀어 젖힌 서참의는 정신이 번쩍 났다. 안초시의 입에는 피, 얼굴은 잿빛이다. 방 안은 움 속처럼 음습한 바람이 휭― 끼친다. 
"아니?" 
참의는 우선 미닫이를 닫고 눈을 비비고 초시를 들여다보았다. 안초시는 벌써 아니요, 안초시의 시체일 뿐, 둘러보니 무슨 약병인 듯한 것 하나가 굴러져 있다. 
참의는 한참 만에야 이 일이 슬픈 일인 것을 깨달았다. (이태준, '복덕방', 1937)

 

**

"원수는 외나무다리서 만난다더니! 저승을 가도 [형보와] 같이 가야 하나!"

하고 쓰디쓰게 한마디, [초봉은] 입속말을 씹는다. 미상불 징그럽기도 하려니와 창피스런 깐으로는 작히나 하면 이놈의 집구석에서 약을 먹고 죽을 게 아니라 철도 길목이든지 한강이든지 나갔으면 싶었다. 
(...)
유서를 쓴다. 비회가 붓보다 앞을 서고 또 쓰기로 들면 얼마든지 장황하겠어서 아주 형식적이요 간단하게 부친 정주사와 모친 유씨한테 각각 한 장씩 썼다. 
(...)
유서까지 써놓았고 하니 준비는 다 된 셈이다. 인제는 계봉이가 돌아올 동안에 교갑에다가 약이나 재자고 ×××병을 앞으로 다가 놓다가, 먹고 죽을 사약이 쓴 걸 가리려는 저 자신이 하도 서글퍼 코웃음을 하면서 도로 밀어 놓는다. 
하고 그것보다는 나머지 십 분을 송희의 마지막 엄마 노릇을 할 것이긴 한데 잊어버렸던 것이 대단스러웠다. 그래 마악 책상 앞으로부터 아랫목의 송희에게로 돌아앉으려고 하는데 그때 마침 계봉이가 우당퉁탕 황급히 언니를 불러 외치면서 달려들었던 것이다. 달려드는 계봉이는 미처 방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마루로 난 샛문턱에 우뚝, 사라질 듯 목안엣소리로, 
"언니이!" 
부르면서 눈에는 눈물이 뚜욱뚝 형의 얼굴을, 송희를, 트렁크를, ×××병을, 이렇게 휘익 둘러보다가 다시 형을 마주본다.  (채만식, 『탁류』, 1938)

 

**

은주는 가장 자연스럽게 죽음을 생각하였다. 무서움과 부끄러움과 슬픔밖에 남지 않은 이 목숨을 끊어 버리는 외에 아무런 다른 도리가 없을 듯하였다. 그는 쥐잡는 약을 생각하고 단도를 생각하고, 기차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같이 목숨을 끊는 것이라고 하여도 어쩐지 징글징글하고 무시무시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강을 생각하였다. 그 푸른 물결에 풍덩실 몸을 던지는 것이 얼마쯤 시적이었다. (현진건, 『적도』, 1939)

 

**

P는 새삼스럽게 양복을 벗어 던지고 다시 자리에 파묻혔다. 이제는 잠이 십 리나 달아나고 눈이 초랑초랑하여진다. 그러면서 어젯밤 일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것은 마치 못 먹을 것을 먹은 것처럼 께름칙한 기억이다. 아무렇게나 씻어 넘겨 버리재도, 그러나 머리 한구석에 박혀 가지고 사라지려 하지 아니하는 어룽[班點]과 같다. 어떻게 해서라도 시원스러운 해석을 내리고라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
정조 대가로 일금 이십 전을 부르는 여자…….
방금 세상에는 한번 정조를 빼앗긴 것으로 목숨을 버려 자살하는 여자가 있다. 그러는 한편  이십 전도 좋소  하는 여자가 있다.
여자의 정조가 그것을 잃었다고 자살을 하도록 그다지도 고귀한 것이라면  이십 전에도 팔겠소  하는 여자가 눈을 멀끔멀끔 뜨고 살아 있는 사실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또 정조를  이십 전에도 팔겠소  하는 여자가 있도록 그것이 아무렇지도 아니한 것이라면 그것을 한번 빼앗긴 때문에 생명을 내버리는 여자가 있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이 두 여자가 모두 건전한 양심의 소유자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가운데 나무라기로 들면 차라리 정조를 빼앗긴 것으로 자살한 여자를 나무랄 것이지  이십 전에 팔겠소  하는 여자는 나무랄 수가 없다. (채만식, '레디메이드 인생', 1934)

 

2019/04/22 - [근대문학과 경성] - [이태준 - 사상의 월야 (1)] "잠간 참아주시오"

 

[이태준 - 사상의 월야 (1)] "잠간 참아주시오"

둘이는 전차로 한강으로 나왔다. 철교에서 한가한 사람들이 군데군데 늘어서 물구경들을 하였다. 그들은 은주와 송빈이를 유심히 보는 것이 은주도 송빈이도 부끄러워서 다른 사람들이 없는 데로 가서야 걸음을 멈..

gubo34.tistory.com

 

'친절한 구보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어  (0) 2019.05.17
신문  (0) 2019.05.17
살수차撒水車  (0) 2019.05.16
[천변풍경] 군함행진곡  (0) 2019.05.16
골동骨董  (0) 2019.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