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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5. 17. 13:39

 

▲ 매일신보(1917.10.2.)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오후 두시 사년급 영어 시간을 마치고 내려쪼이는 유월 볕에 땀을 
흘리면서 안동 김장로의 집으로 간다. 김장로의 딸 선형善馨이가 명년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하여 영어를 준비할 차 이형식을 매일 한 시간씩 가정교사로 고빙하여 오늘 오후 세시부터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음이라.

(...)

장로와 부인은 저편 방으로 들어가고 형식과 두 처녀가 마주앉았다. 형식은 힘써 침착하게,
"이전에 영어를 배우셨습니까." 
하고, 이에 처음 두 처녀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두 처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대답이 
없다. 형식도 어이없이 앉았다가 다시,
"이전에 좀 배우셨는가요." 
그제야 선형이가 고개를 들어 그 추수같이 맑은 눈으로 형식을 보며,
"아주 처음이올시다. 이 순애는 좀 알지마는." 
"아니올시다. 저도 처음입니다." 
"그러면 에이, 비, 시, 디도……? 그것은 물론 아실 터이지오마는." 
여자의 마음이라 모른다기는 참 부끄러운 것이라 선형은 가지나 붉은 뺨이 더 붉어지며,
"이전에는 외웠더니 다 잊었습니다." 
"그러면 에이, 비, 시, 디부터 시작하리까요?" 
"녜" 

하고 둘이 함께 대답한다.
그러면, 그 공책과 연필을 주십시오. 제가 에이, 비, 시, 디를 써 드릴 것이니. 
선형이가 두 손으로 공책에다 연필을 받쳐 형식을 준다. 형식은 공책을 펴놓고 연필 끝을 조사한 뒤에 똑똑하게 a, b, c, d를 쓰고, 그 밑에다가 언문으로 에이, 비, 시  하고 발음을 달아 두 손으로 선형에게 주고 다시 순애의 공책을 당기어 그대로 하였다.
"그러면 오늘은 글자만 외기로 하고 내일부터 글을 배우시지요. 자 한번 읽읍시다. 에이." 

그래도 두 학생은 가만히 있다.
"저 읽는 대로 따라 읽읍시오. 자, 에이, 크게 읽으셔요. 에이." 
형식은 기가 막혀 우두커니 앉았다. 선형은 웃음을 참느라고 입술을 꼭 물고, 순애도 웃음을 참으면서 선형의 낯을 쳐다본다. 형식은 부끄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여 당장 일어나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난다. 이때에 장로가 나오면서,
"읽으려무나, 못생긴 것. 선생님 시키시는 대로 읽지 않고." 
그제야 웃음을 그치고 책을 본다. 형식은 하릴없이 또 한번,
"에이." 
"에이." 
"비." 
"비." 
"시." 
"시." 
이 모양으로  와이, 제트 까지 삼사 차를 같이 읽은 후에 내일까지 음과 글씨를 다 외우기로 하고 서로 경례하고 학과를 폐하였다. (이광수, 『무정』, 1917)

 

**

"어머니, 골이 좀 아파서 누어야겠어……"
꽃분이는 아픈 표정을 한다는 것이 신 살구 먹는양을 하면서 어머니의 눈치를 훔쳐 보았다.
"눕든지 자빠지든지 뒈지든지 하렴 경칠 년……"
어머니가 부엌으로 나가자 꽃분이는 미지근한 아랫목에 아랫배를 깔아붙이며 땀내 나는 이불을 뒤집어 썼다. 그리고 얇은 벽을 통하여 부엌에서 풀 끓는 소리가 풀럭풀럭 울려 오는 것이 자동차의 '모터'소리 같아서 자동차면 이렇게 흔들리겠지 하고 궁둥이를 겁실겁실 놀려도 보았다.

꽃분이는 정말 골이 아파서는 아니었다. 한참이라도 낮에 미리 자놓아야 밤에 정신이 나고 더욱 눈을 샛별처럼 빛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그램 대로 잠은 날래 오지 않었다.
'어서 어두었으면! 얼른 보았어도 꽤 잘 생긴 사내야! 안집 아들녀석 따위는 피―. 그런데 요전 그녀석처럼 영어나 자꾸 지껄이면 어쩌나?'
하고 속으로 끌탕을 하면서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백을 끌어드렸다. (이태준, '모던걸의 만찬', 1929)

 

▲ 매일신보 (1922.6.9.)

**

손님들이 모이기를 시작하였다. 손님은 다 학생들이었다. 맨 처음 온 이가 경성대학 문과에 다니는 김상철金相哲이었다. 그는 키가 작고 얼굴이 가무잡잡한 사람이었다.
이어서 경성의전, 세브란스의전, 보성전문, 고등상업, 고등공업 등 정모와 정복을 입은 학생들이 오고, 이화전문의 여학생이 둘이 왔다. 한 여학생은 미인이라고 할 만하였으나, 한 여학생은 체조 선생이라고 할 만하게 다부지게 생긴 여자였다. 그들은 심순례沈順禮, 정서분鄭西芬이라는 이름이었다.
전기가 들어오고 시계 바늘이 여섯 시를 가리킬 때에 세비로 입은 두 청년이 왔다. 하나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혈색이 좋은, 눈이 어글어글한 서양식 하이칼라 신사요, 하나는 키가 작고 몸이 가냘프고 눈만 몹시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이건영李健永 박사와 윤명섭이라는 발명가였다.
곰국을 끓이고 갈비와 염통을 굽고 뱅어저냐까지도 부쳐 놓았다. 정란은 수놓은 앞치마를 입고 얌전하게 주인 노릇을 하였다.
“자, 변변치 않지마는 다들 자시오.”
하고 한 선생이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오래간만에 조선 디너를 먹습니다.”
하고 미국으로부터 십여 년 만에 새로 돌아온 이건영은 극히 감격한 모양으로 감사하는 인사를 하였다.
“미국 계실 때에도 조선 음식을 잡수실 기회가 있어요?”
하고 체조 교사같이 생긴 정서분이가 입을 열었다.
“예스, 프롬 타임 투 타임(예, 이따금).”
하고 이 박사는 분명한 악센트로, 영어로 대답을 한다. 그리고는 이어서 조선말로,
“서방(캘리포니아 등지)에 있을 때에는 우리 동포 가정에서 조선 음식을 먹을 기회가 있습니다. 김치도, 그렇지마는 이렇게 김치 맛이 안 나요. 선생님 댁 김치 맛납니다.”
하면서 김칫국을 떠서 맛나게 먹는다.
“김치 맛이 아마 조선 음식에 있어서는 가장 조선 정신이 있지요.”
하고 대학 문과에서 조선 극을 전공하는 김상철이 유머러스한 말을 한다.
“브라보우!”
하고 이박사가 영어로 외치고,

▲ 동아일보 (1926. 2.24.)

“참 그렇습니다. 김치는 음식 중에 내셔널 스피릿(민족 정신)이란 말씀이야요.”
하고 그 지혜를 칭찬한다는 듯이 상철을 보고 눈을 끔쩍한다. 상철은 픽 웃고 갈비를 뜯는다.
“갈비도 조선 음식의 특색이지요.”
하고 어떤 학생이,
“갈비를 구워서 뜯는 기운이 조선 사람에게 남은 유일한 기운이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응, 그런 말이 있지.”
하고 한 선생이 갈비 뜯던 손을 쉬며,
“영국 사람은 피 흐르는 비프스테이크 먹는 기운으로 산다고.”
하고 웃는다.
“딴은 음식에도 각각 국민성이 드러나는 모양이지요.”
하고 또 한 학생이,
“일본 요리의 대표는 사시미(어회)지요. 청요리의 대표는 만두, 양요리의 대표는 암만해도 토스티드 치킨(닭고기 구운 것)이지요.”
“여기는 토스티드 하앗(염통 구운 것)이 있습니다, 하하.”
하고 이건영 박사는 염통 구운 것을 한 점을 집어 먹으며, 서분과 순례 두 여자를 본다. 순례의 입에는 눈에 띌 듯 말 듯 적은 웃음이 피었다가 번개같이 스러진다.
“김군, 어째 오늘 그렇게 얌전하오?”
하고 한 선생이 김갑진을 바라본다.
“제야 언제는 얌전하지 않습니까.”
하고 커다란 배추김치를 입에 넣고 버적버적 요란하게 소리를 내고 씹는다.
“이 사람은 변덕쟁이가 되어서 그렇습니다.”
하고 어느 동창이 웃는다. 다들 따라 웃는다. 사람들, 더구나 처음 보는 두 손님의 시선이 갑진에게로 향한다.
“그런데.”
하고 갑진은 입에 물었던 밥을 김칫국과 아울러 삼키며,
그런데 미국 유학생들은 왜들 다 쑥이야요? 그놈들 영어 한마디 변변히 하는 놈도 없으니 웬일야요?
하고 아주 천연스럽게 이 박사를 본다. 이 박사는 하도 의외의 말에 눈이 뚱그래지고, 순례는 제가 창피한 꼴이나 당하는 듯이 고개를 푹 수그린다. 다른 학생들은 픽픽 웃는다. (이광수, 『흙』, 1932)

 

 

**

강아지의 반쯤 감은 두 눈에는 고독이 숨어 있는 듯 싶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모든 것에 대한 단념도 그곳에 있는 듯 싶었다. 구보는 그 강아지를 가여웁다 생각한다. 저를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일지라도 다방 안에 있음을 알려 주고 싶다 생각한다.
그는 문득 자기가 이제까지 한 번도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거나, 또는 그가 핥는대로 손을 맡기어 둔다거나, 그러한 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한 일이 없었던 것을 생각해내고, 손을 내밀어 그를 불렀다.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휘파람을 분다. 그러나 원래 구보는 휘파람을 안 분다. 잠깐 궁리하다가, 마침내 그는 개에게만 들릴 정도로 '캄, 히어' 하고 말해 본다.

강아지는 영어를 해득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머리를 들어 구보를 쳐다보고 그리고 아무 흥미도 느낄 수 없는 듯이 다시 머리를 떨어뜨렸다. 구보는 의자 밖으로 몸을 내밀어, 조금 더 큰 소리로, 그러나 한껏 부드러웁게, 또 한 번, '캄, 히어' 그리고 그것을 번역하였다. '이리 온'
그러나 강아지는 먼젓번 동작을 또 한번 되풀이하였을 따름. 이번에는 입을 벌려 하품 비슷한 짓을 하고 아주 눈까지 감는다. 구보는 초조와, 또 일종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맛보며, 그래도 그것을 억제하고, 이번에는 완전히 의자에서 떠나,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강아지는 진저리치게 놀라 몸을 일으켜 구보에게 향하여 적대적 자세를 취하고, 캥, 캐캥하고 짖고 그리고 제풀에 질겁을 하여 카운터 뒤로 달음질쳐 들어갔다.
구보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강아지의 방정맞은 성정을 저주하며, 수건을 꺼내어 땀도 안 난 이마를 두루 씻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당부하였건만, 곧 와주지 않는 벗에게조차 그는 가벼운 분노를 느끼지 않으면 안되었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

 

**

내가 학교에 다니는 것은 혹 시험 전날 밤새는 맛에 들렸는지 모른다. 내일이 영어시험이므로 그렇다고 하룻밤에 다 안다는 수도 없고 시험에 날 듯한 놈 몇 대문 새겨나 볼까하는 생각으로 책술을 뒤지고 있을 때 절컥, 하고 바깥벽에 자전거 세워 놓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행길로 난 유리창을 두드리며, 이상, 하는 것이다. 밤중에 웬놈인가 하고 찌뿌둥히 고리를 따보니 캡을 모로 눌러 붙인 두꺼비눈이 아닌가. 

(...)

그렇다 치면 내가 입때 옥화에게 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두꺼비한테 사랑편지를 썼구나, 하고 비로소 깨달으니 아무것도 더 듣고 싶지 않아서 발길을 돌리려니까 이게 꽉 붙잡고 내 손에 끼인 먹던 궐련을 쑥 뽑아 제 입으로 가져가며 언제 한번 찾아갈 테니 노하지 않을 테냐 묻는 것이다. 저분저분히 구는 것이 너무 성이 가셔서 대답 대신 주머니에 남았던 돈 삼십 전을 꺼내 주며 담뱃값이나 하라니까 또 골을 발끈 내더니 돈을 도로 내 양복주머니에 치뜨리고 다시 조련질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에이 그럼 맘대로 해라, 싶어서 그럼 꼭 한번 오우 내 기다리리다, 하고 좋도록 떼놓은 다음 골목 밖으로 부리나케 나와 보니 목롯집 시계는 한점이 훨씬 넘었다.
나는 얼빠진 등신처럼 정신없이 내려오다가 그러자 선뜻 잡히는 생각이 기생이 늙으면 갈 데가 없을 것이다, 지금은 본 체도 안 하나 옥화도 늙는다면 내게밖에는 갈 데가 없으려니, 하고 조금 안심하고 늙어라, 늙어라, 하다가 뒤를 이어, 영어, 영어, 영어 하고 나오나 그러나 내일 볼 영어시험도 곧 나의 연애의 연장일 것만 같아서 에라 될 대로 되겠지, 하고 집어치우고는 퀭한 광화문통 거리 한복판을 내려오며 늙어라, 늙어라, 고 만물이 늙기만 마음껏 기다린다. (김유정, '두꺼비',『시와 소설』, 1936)

 

**

NAUKA사가 있는 진보초神保町 스즈란도鈴蘭洞에는 고본古本 야시가 선다. 섣달 대목 ─이 스즈란도도 곱게 장식되었다. 이슬비에 젖은 아스팔트를 이리 디디고 저리 디디고 저녁 안 먹은 내 발길은 자못 창량하였다. 그러나 나는 최후의 이십 전을 던져 타임스판 상용영어 사천 자라는 서적을 샀다. 사천 자 ─

사천 자면 많은 수효다. 이 해양海洋만한 외국어를 겨드랑에 낀 나는 섣불리 배고파할 수도 없다. 아 ― 나는 배부르다. (이상李箱, '실화失花', 유고)

 

**

─ 오래간만에 어디 가 차나 한잔 먹을까?
생각하며 기호는 천천히 걷고 있는데 별안간 오른편으로 오색꽃이 눈이 부시게 피어 흩어진 진열창이 눈에 띄었다. 맑은 유리 속 대낮 같은전등불 밑에 한여름 대낮의 꽃밭같이 벌어진 아롱다롱한 색채. 아름답다느니보다도 신선한 풍경이었다.

Drear path, alas! where grows
Not even one lonely rose……

                        ─ E. 포우 'F에게'

찬란한 꽃다발 가운데 하얀 종이에 씌어진 글발. 기호는 발을 멈추고 서서 들여다보았다. 알아볼 사람이 별로 많지 못함직한 이런 시구를 이곳에 써 내놓는 이집 주인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것도 허영심을 노리는 교묘한 상업 정책일까. 그러나 어쨋든 아름다운 구절이라고 기호는 생각하였다. 어디서 본 듯도 한 구절이라고도 생각했으나 영어책을 내던진 지 벌써 십년이 넘는 그로서는 그것이 누구의 글인지 도저히 알아낼 수는 없었다. (유진오, '가을',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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