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게 을미년이니까 지금부터 치자면 서른아홉 해 전이렷다."
노인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시 내무대신이 지금 후작 박영효였느니…… 관비 동경 유학생을 뽑는데 지원자가 천여 명이라……."
"무려 천여 명이로군요."
"나두 나중이야 어찌 됐든지 지원을 하지 않었겠소."
"그때 최주사께서는 무얼 하구 계셨습니까?"
흰 두루마리가 팔짱을 끼며 묻는다.
" 그때요? 경무청에 다녔지요. 내가 경무청 순검이라오. 이때나 그때나 순검이 호기는 있었지요. 그래 시험을 보지 않았겠소. 지원자는 천여 명인데 뽑기는 백 명을 뽑는구먼. 일인日人 의사가 온통 빨거벳겨 놓구 신체검사를 허구, 거기서 뽑힌 놈을 일제히 또 작문을 한 장씩 짓게 하는데 전라도 문자로 어떻게 이까짓 놈두 한몫을 꼈구려."
"최주사께서 이발을 그때 하셨다네."
하고 양복 입은 젊은이가 일러주는 것을, 노인은 곧 이어서,
"이발이야 조선서 그중 먼저 한 축이지. 조선 단발령이 내린 것이 을미년 동짓달인데 나는 삼월에 일본 건너가자마자 깎었으니까, 하하하하……"
"가실 때 단체로 가셨겠군요?"
"아암, 박영효가 인솔자로구료. 도보로 백여 명이 인천을 가는데……"
"경부선이 개통이 안 되었군요?"
"경부선은커녕 경인선두 안 깔렸을 때지. 아─ 서른 아홉해 전이구려."
"딴은……"
"그래 도보로 인천을 가는데 노돌 모래사장에 이르자 박영효가 호령을 걸어 백여 명을 뺑 둘러서게 하구 자기는 한가운데가 서서……"
"이발들을 하라구 명령이죠?"
양복 입은 젊은이가 앞질러 말하는 것을 노인은 손을 내저으며,
"이발은 일본 건너가서 했다니까 그러는군."
"그래두 지난번 이야기하실 때는 노돌 모래사장에서 이발을 하셨다구 하시더니요."
"언제 그랬었나. 잘못 들은 게지……"
하고 노인은 딴전을 한다. (박태원, '낙조',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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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대문 밖 콩나물 장수의 아들 김ㅇ근 선생이 구한국시대 군대의 일 병정이던 몸으로 보성소학교 체조 부교원으로 가지가지의 무용을 떨치던 그때는, 조선에 학교란 것이 처음 생기던 때였다. 교원도 망건 감투 갓 속에 커다란 상투를 달고 다녔고 학생도 상투 위에 갓을 쓰고 다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의 여학교 처녀처럼 편발을 길다랗게 늘이고 다니는 총각들이 더러 있었고 머리를 깎은 학생이라고는 교장님 댁 아드님하고 철 모르는 필자인 나하고 겨우 3,4인밖에 없었다.
그때는 머리를 깎으면 생명이 없어지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단순히 보기가 싫다든지 부모 상에 머리를 풀 수가 없어서 안 되었다든지 그만 정도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모가지가 달아날 정도로 무서원 생명 문제였었다.
그래서 구세군에 들고도 머리를 못 깎아서 상투를 모자 속에 쭈그려 박고 다녔고 길거리에서 순검이 가위를 감추어 들고 몰래 쫒아와서 지나가는 지게꾼의 상투를 반 동강 싹둑 잘라놓고 도망하면 지게꾼은 쫒아가다가 잡지 못하고 그냥 길거리에 앉아서 버려진 상투를 붙들고 통곡하곤 했다.
이런 판이라 머리를 깎으려면 학교를 퇴학하고 안 다닐 판이니까 학교에서는 감히 학생들을 단발시켜볼 꿈도 못 꾸고 있었다.
그러니까 학생들도 갓을 쓰고 다니고 선생들도 갓을 쓰고 다녔는데, 학교가 다른 곳에도 있어서 어느 학교 학생인지 분간을 못하게 되는 관계상 교표를 붙일 수 없어 두통을 앓게 되니까 어떤 학생은 궐련갑을 길다랗게 말뚝처럼 오려서 거기다가 '사립 보성학교'라고 붓으로 써서 갓에다 풀로 붙이고 다니기까지 했다. 한 해 또 한 해, 그럭저럭 머리를 깎지 못하고 그냥 지내는 터인데, 하루는 콩나물 김선생이 무슨 일인지 싱글벙글하면서 운동장으로 나오더니 전교 학생의 총집합 명령을 내렸다.
심술 많은 선생의 명령이라 체조 시간도 아닌데 또 웬일인가 하고 궁금해 하면서도 설설 기어서 학년 수대로 늘어섰다.
"차렷! 우로 나란히!"
각대 번호가 끝난 후에 콩나물 선생 말씀이
"정초가 되었건만 교주校主님 댁에 세배를 못 갔으니까 오늘은 세배를 가긴 가는데 소학교, 중학교, 전문학교까지 일시에 갈 테니까 일일이 대청에 올라가서 절을 할 수는 없고 내가 호령을 할 테니, 일제히 마당에서 예禮를 하되 고개만 숙이지 말고 허리까지 숙여서 코가 무릎에 닿도록 공손히 해야 한다. 어디 지금 여기서 두어 번 연습을 할 테다."
하고 무릎에 코가 닿도록 허리를 굽히는 법을 시키고 나서 소학교 1,2,3년 중학교 1,2,3년 차례로 4열 종대로 길거리로 인도했었다.
우리는 그때 소학생이라 교주님 댁에 세배 간다는 것을 퍽 기뻐했다.
학생들이 기뻐하는 데는 세 가지 까닭이 있었다. 첫째는 그날 오후 공부를 안 하게 된 것이요, 둘째는 오랜만에 행렬을 지어 큰길로 나가니 행인들이 부러워하면서 구경해줄 것이요, 셋째는 교장님만 한 번 학교에 다니러 와도 반드시 백로지 두 장에 연필 한 자루씩이나 공책을 몇 권씩 주는 시절이었으니까, 한층 또 올라서 교주님 댁이요 또 정초 세배니까 약식을 한 그릇씩 주시거나 과자라도 한 보통이씩 주실 것을 믿는 까닭이었다.
그때의 교주는 이용익 씨의 손자 이종호 씨였다. 그 집이 지금의 매일신보 바로 뒤에 있었고 그 옆에 평양 병정의 영문營門이 있었다.
대오를 나란히 해서 그 집에 들어가니 마당은 좁은데 소학교 중학교 따로 딴 집에 있던 전문학교까지 와서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이 빡빡했다. 조금 있더니 대문으로 중문으로 무언지 흰 보자기를 덮은 물건을 지게에 지어서 산같이 한 짐씩 자꾸 날라 들어오는 고로
"옳다, 저것이 우리에게 나누어줄 과자다. 과자야."
하고 한없이 기뻐했다.
그 산 같은 짐이 몇 십 짐인지 들어온 후에 대문을 안으로 잠그고 또 중문을 안으로 잠그고 그 앞에 학감 영감이 딱 선다.
이윽고 교주님이 대청에 나왔는지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데, 목소리 큰 콩나물 선생이 대청 앞 축대에 올라서더니 호령을 크게하여 세 학교 학생이 일시에 허리를 굽혀 코를 무릎에 댔다.
'이제는 과자를 나누어줄 차례다."
하고 기다리고 있자니 별안간 대청 앞에서 폭탄이 터진 것처럼
"아이구머니, 아이구머니."
하고 곡성을 내면서 우왁 하고 학생들이 뒤로 밀려나왔다.
그러나 뒤로 밀려 나갈 데가 없고 저마다 아이구머니 아이구머니 소리를 치면서 살아날 구멍을 찾아서 이리 덤비고 저리 덤비고 난리가 났으니, 뒤에 섰던 학생은 무언지 까닭도 모르고 돌아서서 어쩌지어쩌지 하고 도망할 구멍을 찾았다.
"왜 그래, 가만 있지 않고……. 가만히 있어."
무얼 가만히 있어. 여기 저기서 자꾸 사람 살리라는 소리가 일어나고 돼지 목 따는 소리 같은 사람 죽는 소리가 귀가 아프게 나는데. 가만히 있어서 무슨 말이냐.
5백여 명 학생의 갓이 벗겨지고 신발을 잃어버리고 저마다 눈이 뒤집혀서 살 구멍을 찾는다. 우리는 그때 나이가 어리니까 어머니를 부르며 울고만 있었다.
그 소란 중에 한참 후에야 알고 보니 그 집에 있던 평양 병정들과 사무원들이 손에 가위 하나씩을 들고 나서서 하나씩 붙잡아서 상투를 자르고 머리채를 자르는데, 그것이 무서워서 도망하려고 그 야단이 일어난 것이었다.
나는 기왕부터 머리를 깍고 다니던 터라 그제야 안심하고 가위 들고 쫒아가는 꼴을, 이리저리 눈이 뒤집혀 쫒기다가 붙들려서 죽는 소리를 지르는 꼴을 구경하고 있었다.
담은 높고 문은 잠기고 머리만 깎으면 아주 죽는 줄 아는 학생들이 변소 구멍으로라도 달아나려 하다가는 거기서도 지키고 있던 병정에게 붙들린다. 그 중에 몇 학생은 어찌나 급하던지 내사內舍로 뛰어 들어가서 뒤꼍 장독대 뒷담을 넘어서 기어코 도망했다.
그 도망해 달아난 학생 입으로 금방 소문이 퍼졌는지 자기 아들 죽인다고 학부형 집에서 어머니 아주머니 할아버지들이 울며 불며 큰길로 통곡하면서 모여들었다.
대문이 잠겨서 들어오지는 못하고 한길 바깥에 몇 백이 모여
"무슨 원수가 있어서 내 아들을 죽이느냐."
"남의 집 독자를 왜 너희가 죽이느냐."
하고 발악하는 소리, 부르짖는 소리, 통곡하는 소리.
그러니까 대문 안에서는 상투 잘리고 머리를 잘린 학생들이 어머니 아버지를 부르며 통곡하는 소리…….
지옥도 그런 지옥은 없었다. 한길에 기절해 쓰러졌다는 여자가 많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학감 영감은 눈이 휘둥그래서
"나가보아야겠다."
하고 문을 열려 하는 것을 어디서 알고 뛰어온 콩나물 선생님,
"안 됩니다 안 돼요. 지금 문을 열면 아무 일도 다 틀려요. 으레 이런 소동이 있을 줄 알고 한 일인데 그저 모른 체하고 계세요."
싸우듯 말렸다.
안팎의 울려 퍼지는 곡성은 더욱 처참해 가고 나중에느 대문을 두드리며
"이놈들아, 그러면 너희들 원수를 안 갚을 줄 아느냐."
하고 노호怒號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그러는 동안에 해가 지고 도망하던 학생들까지 거의 모두 머리를 깎아놓았다. 물론 한 학생을 병정 2,3인이 붙들고 깎아도 안 깎으려고 고개를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드는 까닭에 가위로만 싹둑싹둑 자르는 것이라 쥐가 뜯어먹은 것처럼 되었지만 그래도 밤 들기까지 대강은 잘랐다.
아까 흰 보자기를 덮어서 몇 십 번 날라 들어온 짐은 모두 모자였다. 그 모자를 머리에 맞는 대로 하나씩 골라 씌웠다. 소학교는 그냥 흑색 둥근 모자, 중학생은 그 모자에 가는 금테 하나, 전문학생은 사각 모자.
그런데 이 통에 교원들까지 깎였다. 그리고 소학교 교원은 소학생 모자에 굵다란 금테 하나, 중학교 교원은 그 모자에 가는 금테 하나와 굵은 금테 하나, 전문학교 교원은 사각모에 굵은 금테 하나.
그때의 소학교 교장이었던 이동휘 씨도 동그란 소학생 모자에 굵다란 금테 하나, 마치 시골로 다니는 약장수와 같은 모자를 썼다. (방정환, '호랑이똥과 콩나물 선생', 『학생』, 1929.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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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가 불끈 자동차 속에 먼저 들어가 앉았으려니까,
"어디란 말인가? 이때까지 문밖에서 있다던 사람이 예까지 나왔을 리가 있나?"
하고 상훈은 술 취한 소리로 역정을 내며 동구 밖으로 나온다. 앞장을 선 운전사는 싱글싱글 웃으며,
"글쎄올시다. 먼첨 나오셔서 타셨나?"
하고 컴컴한 자동차 속을 들여다보며 문을 연다. 상훈이 달려 들여다보니까 경애가 해죽 웃으며 고개를 쑥 내민다.
"엉..."
상훈은 경풍한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더니,
"에이, 사람을 그렇게 속여!"
하고 경애에게 하는 말인지 운전사를 나무라는 것인지 이런 소리를 하고 머뭇머뭇 섰다.
"창피하니까 잠깐 들어오세요."
"이러구 어딜 갈 수는 있어?"
하며 상훈이 망단해하다가 올라서니까,
"가긴 누가 어디를 가재요?"
하고 경애가 자리를 비키며 운전사에게 눈짓을 한다. 운전사는 냉큼 뛰어올라서 불을 번쩍 켜고 고동을 틀려 한다.
"가면 안 돼! 모자두 안 쓰고 나왔는데……"
상훈은 당황히 소리를 지르며 엉덩이를 들먹거린다.
"걱정 마세요. 또 데려다드릴게."
자동차는 뚝 떠났다.
"감옥 자동차는 용수나 씌우더군마는 맨대가리로 어딜 가는 거야?"
상훈은 그리 취하지도 않았지만 배반이 낭자하게 벌여놓인 것을 그대로 두고 잠깐 나와서는 이렇게 끌려가는 것이 하도 어이없고 생각할수록 우스웠다. (염상섭, 『삼대』,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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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만 있거라……"
점룡이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 윗목 벽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 걸려 있는 점룡이의 단벌 나들이 양복
의 주머니를 뒤지다가,
"아아니, 이거, 웬 단발랑이……"
하고 의아스러이 중얼거리는 것에, 다시 씽씽이를 불던 점룡이는,
"아차!"
하고 후다닥 일어나서,
"아이 왜, 남의 주머니는 뒤지구 이러우?"
거의 얼굴이 벌개가지고 어머니의 손에서, 그 대지를 붙이지 않은 명함판 사진을 홱 뺏어 감췄다.
"아아니, 그게 웬 기집년 사진이냐?"
"……"
"어디, 갈보겠지?"
"갈본 왜? 알지두 뭇허구……"
"갈보가 아니면 그럼 뭐냐? 여학생이냐?"
"글쎄, 어머닌 몰라요."
"흥, 참, 늬가 바루 연애라는 걸 허는 모양이로구나? 시큰둥허게……"
코웃음을 한번 치고, 다시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내 보고는 이 마누라쟁이의 변덕도 변뎍이려니와, 놀란 것도 사실이어서,
"아아니, 모두 요것뿐이야?"
"……"
"오십 전, 육십 전, 칠십 전…… 모두 칠십삼 전밖에 없으니……"
"……"
"그래, 모두 어디다 내버리구 요것뿐이냐?"
"내버리긴 뭘 내버렸다구 그러우?"
"아아니, 내버리질 않었으면, 그럼 모두 어딜 갔단 말이냐?"
"……"
"너, 이 녀석. 장사를 헌다구 밑천을 들어먹으면 으쩌잔 말이냐? 그래 군밤장수도 이젠 구만둘 작정이냐?"
"구만두긴, 은제 누가 구만둔다구 그랬수?"
"그럼, 구만두는 게 아니구 뭐야?…… 오오, 그래 간밤에 술을 처먹구 온 것도 용돌이 녀석이 한턱 냈다구 날 쇡였지만, 그게 이녀석아, 실상은 니가 낸 거로구나? 응?"
"……"
"필시, 그 사진 백인 년, 그년한테 반해서 그래 이 녀석이 둔을 자꾸 쓰구쓰구 그러지……, 이 녀석아 정녕 그렇지?" (박태원, 『천변풍경』, 1936)

조령을 내리기를,
"짐朕이 머리를 깎아 신하와 백성들에게 우선하니 너희들 대중은 짐의 뜻을 잘 새겨서 만국萬國과 대등하게 서는 대업을 이룩하게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33권, 1895년 11월15일)
조령을 내리기를,
"짐이 조상들의 위업을 받들고 만국이 교통하는 시운時運을 당하여 천시天時를 상고하고 인사人事를 살펴보건대 500년마다 반드시 크게 변천하니 너희 백성들은 나의 계고戒誥를 들으라.
전장법도典章法度는 천자天子로부터 나오는 법이다. 아! 짐이 등극한 지 33년에 세계가 맹약盟約을 다지는 판국을 맞아 정치를 경장更張하는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정삭正朔을 고치고 연호年號를 정했으며 복색服色을 바꾸고 단발을 하니 너희 백성들은 내가 새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말라. 넓은 소매와 큰 관冠은 유래流來한 습관이며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쓰는 것도 일시一時의 편의로, 처음 시행할 때에는 역시 신규新規였다. 하지만 세인世人의 취향과 숭상함에 따라 국가의 풍속 제도를 이룬 것이니, 일하기에 불편하며 양생養生에 불리한 것은 고사하고 배와 기차가 왕래하는 오늘에 와서는 쇄국하여 홀로 지내던 구습을 고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짐도 선왕의 시제時制를 변경하기를 어찌 좋아하겠는가마는 백성들이 부유하지 못하고 군사가 강하지 않으면 선왕들의 종묘 사직을 지키기 어렵다. 옛 제도에 얽매여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을 돌보지 않는 것은 때에 맞게 조치하는 도리가 아니니,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너희 백성들은 또 혹시 ‘선왕의 시제時制를 고치지 않고도 종묘사직을 지킬 방도가 반드시 있다.’고 하겠지만 이것은 한 구석의 좁은 소견으로서 천하 대세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짐이 이번에 정삭을 고치고 연호를 세운 것은 500년마다 크게 변하는 시운에 대응하여 짐이 국가를 중흥하는 큰 위업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며, 복색을 바꾸고 머리를 깎는 것은 국인國人의 이목을 일신시켜 옛것을 버리고 짐의 유신하는 정치에 복종시키려는 것이니, 이것은 짐이 전장법도로써 시왕時王의 제도를 세우는 것이다. 짐이 머리를 이미 깎았으니 짐의 신민인 너희 백성들도 어찌 받들어 시행하지 않겠는가? 나라는 임금의 명령을 듣고 가정은 가장의 명령을 들으니, 너희들 백성들은 충성을 다하고 분발하여 짐의 뜻을 잘 새겨서 서로 알리고 서로 권하여 너희들의 머리카락과 구습을 한꺼번에 끊으며 모든 일에서 오직 실질만을 추구하여 짐의 부국강병하는 사업을 도울 것이다.
아! 나의 어린 자식들인 너희 백성들이여!"
하였다. (고종실록 34권, 1896년 1월11일)
조령을 내리기를,
"을미년(1895) 11월 15일에 내린 조령과 조칙(詔勅)은 모두 취소하라."
(고종실록 35권, 1897년 8월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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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발을 주장합니다.
- 우리의 실생활에 비추어 편의한 점으로
여자가 단발한다면 "말세가 되니 별 일이 다 많다!"
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신문에는 주먹 같은 활자로 '단발미인이니 신여성이니 여류○○주의자이니' 하고 떠들어 사진까지 박아냅니다. 하여간 지금 조선에 있어서는 단발에 대하여 여러가지 비난이 많습니다. 혹은 단발은 호기심에서 나온 일종 유행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고 혹은 몰각沒覺한 부르주아적 남녀평등론자류의 행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발이 그러한 모든 비난을 들을만치 중대하게 취급되는 것을 우습게 압니다. 비단 단발에만 한限하지 않고 모든 인류생활의 풍습은 각기 시대를 따라 문물제도와 생활방식이 변화됙 진화되는 것은 필연의 세勢입니다. 그러면 종래 여자가 단발하는 풍습이 없었지만은 금일에는 이것이 한 풍습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 단발하는 것이 머리를 길게 느리거나 쪽지는 것보다 더욱 편하고 또한 기분이 좋고 머리 치장하는 데도 시간이 절약되는 여러가지 편의를 발견한 까닭이겠습니다. 단발을 반대하는 사람의 말은 머리는 여자의 미를 표현하는 것이므로 단발은 곧 여자의 생명인 미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완롱玩弄의 대상이 되는 객관적 미는 점차 소멸되는 것이니 별로 상대방의 염려를 바라지 않지만은 그 미야 말로 부르주아지의 '욕망의 자유'에 대한 수단이 된다 하면 주저할 것 없이 속히 없애야만 할 것입니다.
그 러하고 나는 단발로써 부르주아지의 욕망의 자유를 조금이라도 제지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미는 진미眞美가 아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발로써 미가 없어진다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이는 단발이 미를 더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 결코 단발로써 미의 표현이 적어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단발을 주장하는 것이 하등 새 사상이나 주의를 표방함이 아니오, 또한 일시 유행에 감염되어 기분으로나 양풍洋風중독으로써 주장함이 아니외다. 실생활에 비추어 편리하고 또한 위생에 적합한 여러가지 이점을 발견할 까닭입니다. 남 자들이 양복을 입은 것이 편리한 점이 있기 때문이외다. 여자의 단발도 역시 그렇습니다. 나는 이러한 의미에서 단발을 주장합니다. 또 단발로써 많은 편의를 얻는다는 것을 더욱 말하여 둡니다. (주세죽, '나는 단발을 주장합니다', 『신여성』, 19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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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여 단발하시오
" 어서 단발하시구려" 하고 내가 만약에 어떤 여학생에 권한다면 그는 아마도 얼굴을 붉히고 그의 위신을 상한 듯이 노할는지도 모릅니다. 아직까지도 단발은 진한 루즈, 에로, 곁눈질 등과 함께 카페의 웨이트리스나 서푼짜리 가극의 댄스 걸들의 세계에 속한 수많은 천한 풍속들 중의 하나로만 생각되고 있는 조선에서는 그의 분노도 당연합니다. 다음에는 댕기 장수와 달비月子 장수가 그들 자신의 생활옹호의 입장에서 나의 단발론에 맹렬한 반박을 던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작년에 상해 량강兩江 농구단이 조선에 원정을 왔을 적에 그 긴 머리채를 휘두르면서 날뛰던 조선여학교의 농구선수들의 흉한 모양을 보고는 더한층 단발론을 주장하고 싶었습니다.
누구인가 현대를 3S시대(스포츠, 스피드, 섹스)라고 부른 일이 있었지만 나는 차라리 우리들의 세기의 첫 삼십년은 단발시대라고 부르렵니다. 봅브[bob]는 노라[Nora]로서 대표되는 여성의 가두 진출과 해방의 최고의 상징입니다. 호리즌탈, 싱글 커트, '보이쉬 컷' 등 단발의 여러모양은 또한 단순과 직선을 사랑하는 근대 감각의 세련된 표현이기도 합니다. 지금 당신이 단발하였다고 하는 것은 몇천 년 동안 당신이 얶매여 있던 하렘[Harem]에 아주 작별을 고하고 푸른 하늘 아래 나왔다는 표적입니다.
얌전하게 따서 내린 머리, 그것은 얌전한 데는 틀림없지만 거기는 이 시대에 뒤진 봉건시대의 꿈이 흐릅니다.
그렇지만 수천 년 동안 썩고 남은 케케묵은 정신을 그대로 봅브한 머리속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 모던 걸이라는 백주의 유령은 아주 싫습니다.
새 시대의 제일선에 용감하게 나서는 미스코리아는 선인장과 같이 건강하고 튜울립처럼 신선하여야 합니다. 그는 벌써 모든 노예적 미학에서 자유로울 것이며 그의 활동을 구속하는 굽 높은 구두, 크림빛 비단양말, 긴 머리채는 벗고 끊어 팽개칠 것입니다.
더 도 말고 그 몸서리 나는 전족纏足의 번풍[蕃風]을 차버리고 삼종사덕의 옛 인습을 긴머리와 함께 문척 끊어버린 후 걸스카우트로 '타도 xxX주의'로 'X선'을 달려다니는 인방[隣邦] 중국의 자매들의 강철의 다리를 보세요. 그 머리를 보세요. 지금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은근히 학대받고 있는 봅브의 편을 들고 싶은 생각이 안 나십니까? (김기림, '미스코리아여 단발하시오',『동광』, 19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