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씨 계시냐?"
우선의 말.
"아씨께서 오늘 아침 차로 평양을 내려가셨어요!"
한강 보트장 (1937년경) →
우선은 놀랐다. 형식도 놀랐다. 더구나 우선은 아주 낙담한 듯이 고개를 흔들며,
"왜? 무슨 일로?"
모르겠어요, 제가 압니까? 어젯저녁 열한점이 친 다음에야 들어오시더니만…… 한참이나 울음 소리가 나더니…… 그 담에는 잠이 들어서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요…… 오늘 식전에 마님께서 구루마를 불러오라 하세요. 그래 아씨께서 어느 연회에를 가시는가…… 연회라면 퍽도 이르다…… 아마 노들 뱃놀이가 있는 게다 했지요. 했더니 아홉점 반 차로 아씨께서 평양엘 가신다구요."
하고 어멈은 아주 유창하게 말한다. 형식은 '숫보기는 아니로다' 하고 놀라면서도 그 어멈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어멈의 얼굴에는 의심하는 빛이 있다. 형식은 평양! 평양은 무엇 하러 갔는가 하였다. (이광수, 『무정』,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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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교를 건너가요?”
하고 운전수는 임검 구역에서 잠깐 차를 세우고 물었다. 숭은 턱을 들어서 가자는 뜻을 표하였다. 맘 같아서는 운전수를 두들겨패고도 싶었다. 어차피 아내의 자동차를 따라잡지 못할 줄을 알지마는, 그래도 혹시나 인도교에서나 만날까 하고 따라가는 것이었다.
‘만나면 어쩔 테야?’
하고 숭은 스스로 물었다.
열시가 넘은 겨울의 한강 인도교에는 짐마차와 노동자,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들밖에 별로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용산, 삼개에 반짝거리는 전등, 행주산성인가 싶은 산머리에 걸린 반달, 그것이 모두 쓸쓸한 경치를 이루었다.
자동차가 노들을 향하고 철교를 건너가는 동안에, 또 서울을 향하고 다시 건너오는 동안에 숭은 바쁘게 이쪽 저쪽을 돌아보았으나 정선인 듯한 사람은 없었다.
“문안으로 들어갑시다.”
하고 숭은 운전수에게 명을 내렸다. (이광수, 『흙』,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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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공일날인데다 길한 꿈을 얻은 날이었다. 한강철교 밑으로 연꽃 한 송이가 둥실둥실 떠내려오는 것을 덤뻑 건져 옷깃에 꽂고 깨니 꿈이었다. 속으로 '옳다! 오늘은 성원이 되나보다' 하고 아침 일찍이 백화점에 들러 수영복을 새로 사가지고 한강으로 나갔다.
강에는 아침부터 보트가 세가 났다. 여자들만 탄 것도 헬 수 없이 많이 떴는데, 뒤집힐 듯 뒤집힐 듯 노질이 위태로운 배도 적지 않았다. 오군은 으쓱하여 기대가 가장 컸다. 한강이 자기 품안에 든 듯 실오리만 하여 보였다.
그러나 긴긴 여름날 하루, 강에는 사고라고 신 한짝 빠진 것 없이 해가 저물었다. 보트도 남자들이 탄 것만 몇 척 남은 듯 여자들의 것은 또박또박 선창에 들어 닿아 나비 같은 처녀들이 보송보송한 구두들을 털어 신고 우리 오군 같은 것은 본체만체 뛰어나갔다.
"저런 것이 하날 빠지지 않구…… 하긴 밤에 사고가 많은 법이니까……."
오 군은 혼자 중얼거리며 강가 어느 음식점에 들어갔다. 그리고 비싼 우나기돔부리[장어덮밥]를 반도 못 먹은 때 어디선지 돌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 빠졌다! 여학생이!"
"뭐?"
"여학생이 보트에서 떨어졌다."
그야말로 대기중이었던 오군은 나는 듯 자신 있는 응급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태준, '미어기',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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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君에게 끌려 한강으로 나갔다. 목선을 하나 빌어 맥주도 싣고 상류로 거슬러 동작리 갯가에다 대어놓고 목노 찾아 취토록 먹었다. 황혼에 수평은 시야와 어우러져서 아물아물 허공에 놓인 비조처럼 이 허망한 슬픔을 참 어디다 의지해야 옳을지 비철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응- 넉달이 지나서 인제? 네가 내게 헐 말은 뭐냐? 애 더리고 더리다."
"이건 왜 벤벤치 못하게 이러는거야."
"아-니, 아-니, 일테면 그렇다 그말이지, 고론 앙큼스런 놈의 계집이 또 있을 수가 있나."
"글쎄 관 둬 관 둬."
"관 두긴 허겠지만 이채피 말을 허자구 자연 말이 이렇게쯤 나가지 않겠느냐 그런 말이야."
"이렇게 못생긴 건 내 보길 처엄 보겠네 원!"
"기집이란 놈의 물건이 아무리 독헌 물건이기루 고렇게 싹 칼루 어인 듯이 돌아설 수가 있나 고"
우리들은 술이 살렸다. 나야말로 술 없이 사는 도리가 없었다.
노들서 또 먹었다. 전후불각으로 취하여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려야겠어서 그랬다.
넉 달─ 장부답지 못하게 뒤끓던 마음이 그만하고 차츰 차츰 가라앉기 시작하려는 이 철에 뭐냐 부전 붙은 편지모양으로 때와 손자죽이 잔뜩 묻은 채 돌아오다니.
"요 얌체두 없는 것아. 요 요 요."
나는 힘껏 고성질타로 제 자신을 조소하건만도 이와 따로 밑둥치운 대목 기울듯 자분참 기우는 이 어리석지 않고 들을 소리도 없는 마음을 주체하는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넉 달─ 이 동안이 결코 짧지가 않다. 한 사람의 아내가 남편을 배반하고 집을 나가 넉달을 잠잠하였다면 아내는 그에 용서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요 남편은 꿀꺽 참아서라도 용서하여서는 안된다. (이상李箱, '공포의 기록', 유고)
한강 보트장 (1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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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른 벗은 내게 물과 친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우선 한강으로라도 달려나가, 벌거벗은 알몸뚱이를 물 속에 굴릴 때, 그것은 내 몸을 여러가지로 이롭게 하여 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한 개의 척서법斥暑法으로 누구에게나 주저함 없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이라는 벗의 의견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벗의 말이 있기 여러 해 전에 이미 몇 차롄가 그러한 목적으로 한강을 찾었든 것이요, 그리고, 그것은 결코 유쾌한 것일 수 없었습니다.
물 속에 들어간다드라도 일즉이 수영법의 연구를 등한히하였던 나의 상반신은 반드시 수면 위에 노출되어 있어야만 생명의 안전을 기할 수 있었으므로, 대낮에 뙤약볕은 무자비하게도 나의 얼굴과 가슴과 또 등어리를 나리쪼여, 나는 어처구니없이 '더위'를 먹고, 간신히 다시 옷을 주워 입고는 자연히 돌아오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벗들이 자연스러이 희롱할 수 있는 것에 소년과 같은 희망을 느끼던 나는 어리석게도 몇 번인가 그들의 지도하는 대로, "물 속에 머리를 푹 박고, 발장구를 치고", 그러느라 탁한 강물을 용이하게 나의 귀로 들어가 뒤에 여러 날을, 나는 이질耳疾로 고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박태원, '영일만어',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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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소문을 들으면, 무어 청계천 덮어 버린단 말이 있지 않어? 위생에 나쁘다든가…… 그러니, 정말 그렇게나 되구 본댐야, 인젠 삼순 구석[삼순구식]두 참 정말 어려울 지경이니…… 흥! 말두 말어.”
하도 기가 나서 하는 말에, 칠성 아범은 잠시 담배만 뻐억뻑 빨고 있다가, 새삼스러이 개천을 둘러보고,
“그것, 다 괜은 소리…… 덮긴, 말이 그렇지, 이 넓은 개천을 그래 무슨 수로 덮는단 말이유? 온, 참…….”
“아, 관가에서 허는 일이, 덮으러들면야, 노돌강은 못 덮어?……. 조만간 덮긴 덮을 모양야, 말이 자꾸 떠도는 게…….”
"……"
"그렇게 됐다간, 정말 굶어죽을 노릇 아냐? 쉬─ 무슨 도릴 채리긴 해야 헐 텐데, 그래 다소간 둔이 있으니 장사를 허나, 기술이 있어 쟁인 노릇을 허나, …… 참말이지 큰일났수."
한탄 비슷이 그러한 말을 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개천 건너를 바라보고,
"여, 신 첨지─. 더운데 어릴 이리 가나?" (박태원, 『천변풍경』,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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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으로 가는 길이다. 죽을 곳을 찾아 한강으로 가는 길이다……
속으로 스스로 타일러 보았다. 왜 죽지 않으면 안되는가. 이 추운 밤에, 이 바람 부는 밤에…… 이 의문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설움만 괴어 올랐다. 코끝이 맹맹해지며 눈물은 비오듯 흘렀다. 은주는 전차가 선 줄도 몰랐다.
"다 왔소. 내리우."
차장은 흔들흔들 피곤한 몸을 흔들며 차 안으로 들어와 부르짖었다. 은주는 아뜩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늙은 버드나무 가지가 흐트러진 머리칼같이 늘어진 가운데, 전차는 딱 서 있었다.
와! 하고 모래와 먼지를 끼얹으며 세찬 강바람은 은주의 잠바자락을 날리었다. 양말 하나만 치켜 신은 정갱이와 종아리가 선뜻선뜻하게 쓰리었다. 은주는 바람과 싸우며 뒤로 불려 가려는 몸을 억지로 버티고 한 걸음 두 걸음 내어디디었다. 바람은 온통 눈 속으로만 들어오는 듯하여 쉴새없이 눈물을 흘리었다.
철교는 곧 나타났다. 밤눈에 거무스름한 난간이, 이승과 저승을 막은 한 겹 벽과 같이 흉물스러웠다.
은주는 비실비실 곱드러지려는 몸을 기대는 듯이 난간에 붙이고 한 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는 어찔어찔하는 눈으로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밑에는 아직 물이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 난간을 쓸며 무의식적으로 발길을 조금씩 옮기었다.
추운 봄밤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었다. 송판 위에 또닥또닥 떨어지는 유난히 분명한 제 발자취 소리와 이따금 우 하고 간 속까지 불어들어가는 듯한 바람 소리뿐이다.
'철교를 지나왔다' 하고 은주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제 앞에는 홍살문 같은 붉은 쇠둘레가 활개를 벌렸다. 그제야 지금 제가 지나온 것은 정작 인도교가 아니요 소한강교인 줄 알았다.
'인제 내 죽을 자리에 들어서는구나.'
은주는 정말 인도교로 옮아서며 생각하였다. 힘과 혼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듯하였다. 또 아까 모양으로 한손으로 난간을 짚고, 눈은 거의 감고 비칠비칠 걸었다. 출렁출렁하는 물결 소리에 제 디딘 것이 단단한 널조각이 아니요, 굽이치는 물결을 그대로 밟고 나선 것처럼 어지러웠다.
은주는 주춤 발길을 멈추고, 눈을 들었다. 사면을 괴괴하였다. 하늘은 베일로 슬쩍 가리운 듯이 어슴푸레하나마 구름 한 점도 없었다. 별이 총총 났다. 그들은 장차 일어나려는 인생의 비극을 구경하려는 것처럼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강 건너 언덕 위엔 포플라 숲이 한덩이 구름같이, 피어난 가지를 떠보이었따. 쓸쓸한 빛이 한 점 두 점 새어 흐르는 곳은 손님 없는 음식점들이리라.
은주의 눈은 강 위로 떨어졌다. 저 강물은 멀어갈수록 좁아들었다. 저 멀로 일렁일렁 흰 돛이 조으는 듯한 낚시배를 지나매, 물결은 곧 하늘 자락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내 시체가 제까지나 흘러갈까?'
문득 은주는 이런 생각을 하고 제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까지 그는 먼 눈만 살피고, 차마 던질 자리를 내려다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울긋불긋하게 휘장을 두른 놀이배들은 빈 상여와 같았다. 물 가장자리에 늘어놓은 보트들은 해골을 엎어놓은 듯하였다.
[...]
은주는 아찔하였다. 쇠난간을 짚고 가냘픈 팔이 휘청하고 넘어갔다. 와 하고 온통 은주에게로 몰려든 바람은 그 불쌍한 희생의 갈 길을 재촉하는 듯하였다.
삶과 죽음의 일순간!
은주는 아뜩 정신을 차렸을 때, 제 몸은 아직도 난간 이쪽에 곱드러진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한 발자국을 떼었다. 암만해도 저 섰던 그 자리는 제 죽을 곳이 못된다는 듯이. 그는 또 아까 모양으로 난간을 부여잡고 한 걸음 걷고 쉬고, 두 걸음 걷고 쉬었다. 쉬는 곳마다 밑을 내려다보았건만 제 몸 떨굴 만한 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손 밑에서 싸늘한 쇠난간이 끝났다. 그는 인도교를 건너온 것이다.
은주는 깜짝 놀라는 듯이 몸을 돌쳐서서 다시금 쇠난간을 쓸며 급한 듯이 오던 길을 도로 걸었다. 새로운 결심과 용기가 그를 채찍질하는 듯하였다. 저 멀리 문안이 꿈결같이 떠올랐다. 푸른 남산 등성이엔 기다란 전등불 줄이 서리를 친 듯하였다.
'저 속에는 우리 학교도 있고나, 우리 집도 있고나.'
은주는 안개 자욱한 속을 시름없이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
소한강교에 다다랐을 제, 병일은 그래도 동기의 정이라 엉거주춤하고 반쯤 일어서서 뚫어지라고 앞을 내다보았다. 어둑한 인도교 위에 어릿거리는 은주인 듯한 흰 점을 알아보았다.
"저기 있군, 저기 있군. 어서 어서!"
운전수를 재촉하였다. 운전수도 급한 듯이 연해 찢어질 듯한 사이렌 소리를 외쳤다.
난간에 붙어선 은주와 자동차의 거리가 세 간 통도 남지 않았을 일순간 은주의 몸은 나비처럼 날아 난간을 넘으며 바람에 불리는 한송이 꽃과 같이 어둠 속에 번뜩하자 사라졌다. (현진건, 『적도』, 1939)
노들섬과 한강 백사장은 68년 시작된 한강개발계획으로 유원지의 기능을 상실했다. 당시 계획의 뼈대는 한강 북단 이촌동 연안을 따라 한강제방도로(현 강변북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경원선 철길을 따라 놓인 기존 둑의 바깥쪽에 새 둑을 쌓고, 두 둑 사이를 ‘한강 백사장’에서 퍼온 모래로 메웠다. 수자원개발공사는 69년까지 한강대교 동쪽에서 파낸 290만㎥의 모래로 새 둑 안쪽을 메워 12만1827평의 새 땅(동부이촌동)을 얻었고, 모래준설업체인 공영사도 서쪽 6만505평(서부이촌동)을 추가로 확보했다.
노들섬의 풍경도 확 달라졌다. 진흥기업은 73년 노들섬(당시 중지제1도) 매립공사를 시작해 1만평이 채 되지 않던 노들섬을 4만5천여평으로 확장했고 이 땅을 국가로부터 넘겨받았다. 주변 모래밭은 매립에 사용돼 사라졌고, 그 자리에 강물이 들어왔다. 섬 둘레엔 시멘트 둔치도 생겼다. 사유지가 돼버린 노들섬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 잦아들었다.
그나마 중지도 주변에 듬성듬성 남았던 모래 더미는 82년 제2차 한강종합개발 때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저수로 정비 사업이 실시돼 아예 자취를 감췄다. 매립지에는 한강맨션, 신동아아파트 등 이촌동 아파트단지가 한강을 병풍처럼 둘러쳤고, 80년대 초반까지 7천여가구가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절 한강 정비를 통한 도시 성장과 경제 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강홍빈 서울시립대 교수(도시공학·서울시 전 부시장)는 “이때부터 한강의 공공성과 접근성이 상처받았다”고 말했다. 눈부시게 펼쳐졌던 노들강변 모래벌판은 장미맨션(15층), 삼익아파트(12층) 등 최초의 고층 아파트단지 지하로 들어가버렸다. 80~90년대를 거치며 이 일대 아파트는 최고 20억원이 넘는 고급 주택으로 떠올랐다. 현재도 이 지역 아파트 주민들은 재건축을 통해 더 나은 ‘그들만의 조망’을 확보하려 들고 있다.
20일 가본 노들섬 서쪽에는 강의 퇴적작용이 활발히 이뤄져 시멘트 둔치를 따라 100여m 가량 자갈과 모래가 쌓여 있었다. 지금이라도 시멘트 둔치만 걷어내면 자연스런 모래밭이 다시 나타날 것 같았다. 청둥오리 등 철새는 도래지인 밤섬에서 이곳까지 날아들어 물고기를 낚아채고 있었다.
이촌동 토박이 김명희(58)씨는 “노들강 모래밭에 나가 냉이와 쑥을 캐 저녁 찬거리로 삼았던 시절이 있었다”며 “고층 아파트에 가려 한강조차 보이지 않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가 돼버렸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한겨레신문』, 2005.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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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한강 백사장은 지금의 용산구 동부이촌동이었다. 1960년대 후반에 김현옥 시장이 전개한 한강 개발계획으로 현재의 한강 재방이 축조되기 이전의 동부이촌동 제방은 경원선 철길 바로 옆에 있었다. 지금은 용산~성북 간 전철이 다니는 큰 백사장을 이루었고 강물은 겨우 흑석동~노량진 언덕에 붙어 가늘게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큰 백사장 끝에는 보트장이 있었고 겨울에 강물이 얼어붙으면 많은 시민이 백사장에 나와 스케이트를 즐겼다. 국군의 날 행사 때 여기에서는 낙하산 강하 쇼를 구경하였다. 그러했던 동부이촌등 한강 백사장 자리는 현재 거대한 아파트촌으로 바뀌어져서 지난날의 모습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게 변화되었다. (손정목, 『한국 도시 60년 이야기』 1, 2005, 83쪽)
노들강변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 메어나 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누나
노들강변 백사장 모래마다 밟은 자죽
만고풍상 비바람에 몇 번이나 쉬어 갔나
에헤요 백사장도 못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누나
노들강변 푸른 물 니가 무슨 망령妄靈으로
재자가인才子佳人 아까운 몸 몇몇이나 실어갔나
에헤요 네가 진정 마음을 돌려서
이 세상 쌓인 한이나 두둥 실고서 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