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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만의 독주회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5. 21. 10:52

엘만은 내가 싫어하는 제금가였었는데 그의 꾸준히 지속되는 성가의 원인을 이번 실연을 듣고 비로소 알았오. 소위 엘만톤이란 무엇인지 사도의 문외한인 이상으로서 알 길이 없으나 그의 슬라브적인 굵은 선은 그리고 분방한 데포로마시옹은 경탄할만한 것입디다. 영국 사람인줄 알았드니 나중에 알고 보니까 역시 이미그란트입디다. (이상李箱, 동경 히비야 공원 공회당에서 미샤 엘만의 공연을 감상한 후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937.2.10.)

 


미샤 엘만 회견기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 제금가提琴家 엘만의 독주회날 밤[주: 1937년 2월 23일 7시 30분, 부민관 공연] 나는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무대 뒤로 그를 찾았다. 그것은 봄비가 구슬픈 정조를 몹시 도와주는 밤이었건만 그는 명랑한 태도로 베토벤의 소나타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잠깐 찾아온 뜻을 고하니 지금은 무대에 나갈 시간이 급하니 내일 오전 11시에 조선호텔서 만나자고 한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객석으로 돌아와 그날밤을 감격속에 그의 바이올린 솔로를 듣고 그 다음날인 2월24일 오전 11시 반 그를 조선호텔로 찾았다. 시내 구경을 떠났다 하여 잠깐 기다리고 있노라니 정오가 되어 엘만의 적은 체구가 현관에 나타난다.

나는 곧 찾아온 뜻을 고하고 그를 붙들어 사진을 박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감격된 엘만의 심정

"어젯밤은 나는 감격속에 당신의 바이올린을 들었소. 나뿐 아니라 수많은 청중이 모두 도취가 되었었소."

"나도 감격하였소. 어떻게 청중이 내게 호의를 가지는지 나도 다시 조선 오고 싶은 생각에 가슴이 뛰었소."

하고 그 편에서도 감격된 표정을 짓는다.

"그럼 언제 다시 오시겠소?" 

하니 

"구미 각지에 약속이 있으니 어디 어느 때 오겠다고 단정은 못하겠소만 기회 있는 대로 오렵니다." 

한다.

"그러면 우리 조선일보에서 초빙하면 꼭 오시겠소?"

하고 한번 다지니

"오구말구요"

하며 맹세라도 할 것처럼 몸을 도사린다. 나는 그의 긴장된 표정을 바라보며 다시

"그런데 어제 청중 가운데 특히 여자들이 더 많이 감격이 되었소. 한번 조선여자들을 만나 이야기 할 생각은 없소?"

하였더니

"있다 뿐이겠소. 그러나 나는 오늘 오후 세 시에 꼭 떠나야 하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하하. 왜 미리 준비를 해두었다 보여주시지 않고……"

하며 퍽 애석한 듯이 입맛을 다신다. 그는 한참이나 그 적은 체구에 러시아 사람 독특한 제스쳐를 하고 웃는데 나는 다시 화제를 돌려

 

▲ 매일신보, 1937.2.24.

조선의 인상

"조선에 어떻게 오게 되었소?"

하고 물었다.

"일본에는 세계적 제금가로는 내가 맨 먼저 찾아 왔소. 그것이 십칠년 전이었소. 그래 한번 다시 오고 싶어서 왔었소. 그런데 그때 왔을 때는 조선을 그저 통과했기 때문에 꼭 이번은 조선서 연주를 하고 싶어 내리게 되었소."

그의 대답은 여전히 조리정연하다.

"그럼 조선서의 인상은 어떠하오?"

"첫째 아름답고 장엄하고 또 관대해 보이고 훌륭합니다. 참말 조선서 느낀 감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감격되었소."

"조선사람의 의복은"

"특히 여자의 의복이 좋았소. 그러나 그 제도가 다르니 만큼 미에 대한 감상은 말하기 곤란하오. 그저 편리해 보이는 것같소"

"조선 여자의 표정은?"

"퍽 유순해 보이었소."

"그것은 조선 여성이 오랜 유교도덕으로 자기의 표정을 마음대로 이성에게 표시하지를 못하였소. 그렇기 때문에 그 표정에 있어서도 적극성이 없고 소극적이오."

"아! 그랬소? 어떻든 퍽 온순하고 우아해 보이었소. 여하간 나는 그렇게 느낄 뿐이오. 더 긴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슬프오. 나는 아내 있는 사람이니 더 길게 말하단 큰 일이 날 것 아니오. 허허……"

퍽 사람이 명쾌한 게 또 유머러스하여 좋았다.

 

가족은 몇 분?

"가족은 몇이오?"

하고 다시 나는 화제를 돌리었다.

"아내와 딸 하나 아들 하나!"

"그럼 왜 아내는 데리고 오지 않았소?"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내 아내는 아주 현모양처요. 아들,딸 교육시키기에 몸과 마음을 다 쓰기 때문에 같이 올 마음을 내지 못하였소."

그는 아내의 자랑을 한참이나 늘어놓는다. 이때 마침 무용가 최승희 여사가 오빠 최승일씨와 우리 앉은 건넌 박스로 와  앉는다. 나는 그들이 와 앉으며 인사하기에 답례를 하고 나서

"저이가 조선의 무용가 최승희요. 당신이 연주하기 전 삼일 동안 대인기를 끌었소."

하였더니 

"아! 그런가"

하고 머리를 끄덕인다. 잠깐 말이 끊어졌다가 우리는 다시 책상 위에 향그런 꽃내음새를 맡으며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미국에 이주케 된 동기

"러시아는 언제 떠났소?"

"1904년이니 이제 삼십삼년이 되었소."

"어째서 러시아를 떠났소?"

"미국서 독주회를 하고 거기 퍽 기분이 좋아서 살았소. 이제는 아주 미국에 영주할 작정이오."

"스텐버그[Josef Von Sternberg]를 아오? 영화감독 말이오?"

"잘 몰으오."

"그이도 조선 와서 퍽 좋은 인상을 갖고 갔소."

"며칠이나 있었소?"

그는 흥미있게 내게 묻는다.

"이삼일 있었소. 그땐 조선 기생도 보고 다른 여자들도 만나보고 또 다른 영화관계자들도 많이 만나 여러가지로 많은 이야기를 하였소."

"나도 시간이 있었으면 당신에게 괴로움을 끼칠 것을……"

"어째 더 있을 순 없소?"

하고 나는 진심으로 그를 만류했더니

"약속이 있으니 어디 그럴 수 있소?"

하며 그는 유감스럽게 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본다.

 

조선 음악가에게 보내는 말

""그런데 당신의 팬이 조선에도 상당히 많소. 레코드를 통해 당신의 예술에 감화된 사람이 많소. 어떻게 그들을 위해 메시지를 보낼 수 없소?"

하니

"고맙소. 그러나 나는 특별히 말할 것은 없고 다만 한가지 부탁은 인류의 역사는 흥망성쇠의 역사이니까요. 오늘 조선 음악계가 보잘 것이 없어도 다시 왕성할 때가 있을 터이니 그저 열심히 낙심 말고 노력만하라는 것을 말하고 싶소."

하며 힘찬 어조로 똑똑히 말을 한다. 그래 기자도

"고맙소. 나는 이것을 당신의 말로 온 조선 음악팬에게 말하여 격려하겠소."

하고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당신의 호의를 무한 감사하오."

그도 내게 사의를 표하였다.

"그런데 조선음악을 들어보았소? 이왕직 아악부에 갔었다니 들었소?"

하니

"참 유감이오. 시간관계로 악기구경만 하고 그것을 연주하는 것은 듣지를 못했구려. 그래 무어라 말할 수 없소. 참말 미안하기 끝이없소."

"그런데 서양음아긩 경향은 어떻소?"

나는 시간관계로 어조를 빨리하여 일문일답을 시작하였다.

"서양음악은 고전음악으로 복귀하는 경향이 많소. 그런데 이것이 또 장래 음악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오."

"재즈음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오?"

"그것이 장래는 낙관할 수 없지만은 어떻든 재즈라는 것이 현대 정조를 표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므로 특히 이것이 미국에 있어서 많은 것이라 생각하오."

 

영화와 오락

"영화는 좋아하오? 그리고 영화가 가지는 특징을 어떻게 생각하오?"

"영화에 대해서 많이 생각은 못해봤지만 나는 그것이 후대後代 자손을 위해 좋은 도덕을 길러줄 만한 것이 되는 영화면 좋다고 생각하오."

"이제는 어디로 가오?"

"만주를 들러 구라파를 들러서 내 가족 있는 미주로 가겠소."

"취미는 무엇이오?"

"시간 있는 대로 장기를 두지요. 장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락이오."

"바이올린은 하루 몇 시간씩이나 연습을 하오?"

나는 질문을 무궤도적으로 하였다.

"그건 기분 나는 대로 하오. 그러나 열심히 나는 노력하고 있소. 결국 성공이라는 건 자기 노력에 있다 생각하오."

이때 최승희 여사가 일어서 돌아가려고 내게 인사를 한다. 그리하여 이건 좋은 기회라고 나는 최 여사를 '엘만'에게 소개하였다.

 

▲  비슷한 시기에 부민관에서 공연한 최승희(2.20, 2.21)와 엘만(2.23, 2.24?) (매일신보, 1937.2.18.)

 

최승희와의 회견

"이분은 조선이 낳은 무용가 최승희 여사요. 먼저도 말했지만 당신이 연주하기전 사흘동안 주야로 공연을 하여 최대 인기를 끌었소."

"영어를 아십니까?"

엘만씨의 웃는 말에 최승희 여사는 "잘 모릅니다" 하며 애교 있는 웃음을 띄운다.

"언제쯤 미국 가십니까?"

엘만씨 다시 최승희 여사와 이야기가 벌어진다.

"금년 연말쯤에나 갈 것 같습니다. 미국을 가면 많이 주선해 주십시오."

하고 경쾌하게 말을 하자

"녜. 오시면 되도록 많이 알선하겠습니다. 꼭 오십시오. 나도 이제 떠나 당신이 미국 올 때쯤 미국에 갈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그때 다시 뵙지요."

한다. 이것은 우연한 회견으로 세계적 제금가 엘만씨와 조선이 낳은 세계적 무용가 최승희 여사와의 회견은 기자로서 내게 커다란 수확을 얻게 하였다. 

후릿한 여사의 키가 엘만을 압도하는 듯 잠깐 인사를 하고 그들은 다시 나아간다. 우리는 그들을 보내고 나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때 나는 목이 말랐는지 '이태리 벨모트'를 청한다.

한잔을 잠깐 마시고나서 입을 열려는데 한 시부터(한 시 정각이다) 유지의 송별간담회가 있다 하여 그의 메니저가 인터뷰의 중지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더 묻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하고

"그럼 가시면 편지나 보내주오."

하였더니

"고맙소. 곧 쓰겠소."

하면서 흥분된 어조로 내 손을 잡는다.

그의 털 많은 손으로 굳게 악수할 때 나도 예술가로서의 그의 장래 행복을 빌고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대훈, ' 미샤 엘만 회견기', 『조광』. 1937.4.)


2019/03/06 - [친절한 구보씨] - 엘만을 듣는 구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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