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예술가'라는 것을 한 개의 '직업'으로 혹은 '지위'로 대접하여 주는 것은, 나의 기억으로는 오직 도서관이 있을 뿐이다. 열람권, 직업란에는 '기자 급 예술가'라 인쇄되어 있는 곳이 있어 확실히 '무직'과 사이에 명료한 구별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가 한번 집을 떠나 어느 지방의 여관에 투숙한다 하자. 우리는 그 여관의 '숙박부'에, 우리는 "씨명' '원적' '현주現住'와 함께 당연히 우리의 '직업을 기입하지 안 되는 운명에 봉착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우리가 '예술가' 혹은 '작가' 또는 '시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단지 그만한 이유를 가져 '시인'이라 또는 '작가'라 혹은 '예술가'라 기입하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때'와 그 '곳'을 이곳에서 밝혀야 할 아무런 까닭도 나는 발견하지 못한다. 다만, 언젠가 내가 어느 곳으로 여행하였을 때의 일이라고만 독자는 알라. 그곳에서 나는 어리석게도, 혹은 대담하게도, (물론 나로서는 잀항 다반사이었으나, 여관 주인으로 보면 분명히 그러하였을 것이다.) 숙박부 직업란에다 '소설가'라고 해서로 기입하였다.
그러나 유식하고 경험 있는 여관 주인은, 가장 민망하게 내 얼굴을 본 다음에, 다행히 내가 손에 잡고 있었던 것이 연필이라 알자 그는 방으로 들어가 책상 서랍에서 한 개의 낡은 '고무'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는 나의 직업을 장부 위에서 말살하여 버리고 부디 처세함에 있어 좀더 신중하기를 간곡히 내게 충고하였다. 내가 생각 끝에 그곳에 '무직'이라 역시 정확한 해서로 기입하였을 때 그는 황망히 또 한번 고무를 사용하고 아무 것이든지 좋으니 직업을 가령 '상업' 하면 '상업'이라든지 그러하게 기입하여 주면 좋겠노라고 거의 애원하였다.
나는 그의 간청을 물리치기 어려워 내 자신 어데서 무엇을 경영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무렇게나 '상업'이라 이번에는 특히 특히 초서로 썼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물론 그러한 것에서 '우울'을 맛보지 않아도 좋도록 감정이 둔하지도 신경이 굵지도 않다. 나는 그곳에서 무한한 굴욕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까닭에 그 뒤에 이무영李無影과 만났을 때 나는 상세히 그 이야기를 하고 이후에는 단연코 그러한 경우에 있어 '소설가' 혹은 '작가' 또는 '예술가'로 행세할 작정이라고 정말 결심하였노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역시 외롭게 웃고 그 자신이 어느 기회에 '저술가'라고 행세하려 하였을 때 그는 미지의 인사의 심방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리고 그의 여행 일정표는 드디어 변경되지 않으면 안 되었든 예를 들어 나의 생각이 얼마나 꾀 없는 것인가를 친절히 일러주었다.
나는 조선의 작가가 무슨 까닭에 그의 직업에 충실하고 또 정직할 때 그러한 불유쾌한 대우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를 도저히 해독하지 못한다. (박태원, '궁향매문기窮巷賣文記', 조선일보, 1935.1.19.)
* 그림 두 점은 박태원의 '점경'(1940.11.-1941.2, ,『 家政之友』)에 수록된 정현웅의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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