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의 의심도 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으면서도, 역시 자신을 분명히 갖고자, 어미니와 같이 부인병원에 가서 확실한 진단을 받고 난 이제, 그의 가슴속에 있는 것은 오직 샘솟득 하는 행복감 뿐이었다.
"내가 애를 뱄어. 내가 이제 어머니가 됐네." (박태원, 『천변풍경』,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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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대문 부인병원
아내가 큰딸 설영이를 낳은 것은 소화 11년[1936년] 1월 16일 오후이었습니다. 지금도 눈앞에 당시의 정경이 서언합니다만은 눈이 제법 오고 매섭게 춥던 날입니다.
나는 아내를 동대문 부인병원[현 이화여대 부속 동대문병원 전신]에 맡겨 두고 그대로 거리를 헤매 돌았습니다. 더욱이 초산이라 하여서 진통도 심한 모양이었는데 그러한 때 남편된 사람은 마땅히 산실 밖에 지키고 있어 아내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여야만 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차마 그곳에 머물러 있지 못하였습니다. 나의 어머니와 아내의 어머니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나는 그대로 병원에서 뛰어나왔습니다.
지금도 이 생각은 변치 않습니다만은 그때 나는 자식이란 아비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어미된 이의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열 달 동안 뱃속에서 기르고 크나큰 아픔 속에 한 생명을 세상에 내어 놓는 기뿜을 알고다시 이를 몇 해씩 품안에서 키우는 것을 생각할 때 자식은 아비의 것이기보다도 정녕 좀더 어미의 것이라 할밖에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설영이 경우에 있어서 나는 내가 이미 한 명의 어버이가 되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다방 '낙랑'에서 이상李箱이와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하기야 '낙랑'으로 가기 전에 들린 조선일보사 학예부에서 전화를 빌어집에다 병원에서 무슨 기별이나 없었느냐고 물어는 보았던 것입니다. 그때가 오후 4시 10분- 아직 아무 소식이 업다고 알고 나는 다방으로 갔던 것이나 그 뒤 5분이 지나지 못하여 내가 딸자식을 가진 몸이 될 줄은 꿈밖이었습니다.
▲ 조선일보(오른쪽 아래)
나중에야 집에 들어가서 알고 어쩐지 마음이 슬펐습니다. 왜 슬펐던 것인지는 설명하기 힘듭니다만은 분명히 가슴 한구석에 슬픔이 솟던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물론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기 때문이라는 그러한 까닭은 결코 아닙니다. 이를테면 분명 저의 자식이면서도 어미가 아니라 아비된 설움으로 그것을 전연 깨닫지 못하고 다방 한구석에서 언제나 한가지로 벗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데서 느껴진 감정일지도 모릅니다. (박태원, '결혼 5년의 감상', 『여성』193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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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에 태원이 첫따님을 낳았다. 아주 귀얘죽겠단다. 명명왈命名曰 '설영雪英' ─ 장내 기가맥힌 모던껄로 꾸미리라는 부친 태원의 위대한 기업企業이다. (이상李箱, 『시와 소설』 1호, 편집후기, 19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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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경향신문 1996.2.16. (우) 한겨레신문 2006.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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