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이 다시 그의 옆으로 왔다. 어디를 가십니까. 구보는 전차가 향하여 가는 곳을 바라보며 문득 창경원에라도 갈까, 하고 생각한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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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삼월 중순, 내일모레 창경원의 '야앵夜櫻'이 시작되리라는 하늘은, 매일같이 얕게 흰 구름을 띄운 채, 환하게 흐리다. (박태원, 『천변풍경』,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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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옥은 도망하는 사람같이 빠른 걸음으로 그 골목을 나와서 연못골[연지동] 오빠의 하숙을 찾았다. 영옥이가 나가버린 뒤에 순옥은 정신 잃은 사람 모양으로 멀거니 영옥이가 스러진 중문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경원으로부터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려 왔을 때에야 순옥은 방이 식는 생각을 하고 쌍창을 닫았다. (이광수, 『사랑』,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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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이 또 울렸다. 벗은 신경질하게 상반신을 일으키다 말고, 다시 앉으며, 뜻없이 구보에게 웃어 보이고, 그러나 전화 받는 아이 쪽으로 귀는 향하여 있었다.
"네. 아직 안 오셨습니다. 어디루요? 네, 오시는 대루 그렇게 말씀하죠, 네."
벗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실망이 떠올랐다.
"여보, 참말, 어디 나갑시다. 언제 올지 알 수두 없는 전화를 이렇게 기다리구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위생에 해로워."
구보의 말에, 벗은 외롭게 웃음을 띄우고,
"가면, 어디루?"
"갈 데야 많지. 오래간만에 절밥을 먹으러 나가두 좋구……."
"참, 그거 좋군. 또……."
"또 가까이 동물원엘 가두 좋지. 참 얘 멫 시냐, 지금."
"세시 오 분 전입니다."
"여보, 동물원엘 갑시다. 참, 좀처럼 구경 못 할 거 구경시켜 주께."
"무어게?"
"사자, 호랭이, 표범, 곰 그런 것들 쇠고기 뜯어먹는 거 언제 봤겠소? 참 볼 만하지. 으르렁 그르렁거리구, 이른바 맹수의 야성."
"딴은 참 볼 만하겠군."
벗이 참말 흥미를 느낀 듯싶었을 때, 벨이 또 울렸다.
"네? 누구요? 강상이요? 장상이요? 장상, 한점쯤에 댕겨가셨습니다. 네? 그건 모르겠습니다."
벗은 촘촘하게 수염난 턱을 손가락으로 비볐다.
구보는 다 탄 담배를 사기 재떨잇전에다 비벼 끄고,
"호랑이 날뛰는 꼴은, 지금 곧 가야만 볼걸."
"내일 이맘때 가두, 보구……."
구보는 이윽히 벗의 얼굴을 돌아보다가,
"참말 하웅은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소?"
"어째 꼭 그런 것 같애, 하하하."
웃음 소리가 쓸쓸하다. (박태원, '애욕',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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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스시를 싸들고 식당을 나서니 창경원 앞 큰길에 병원과는 아무 인연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그득히 왔다갔다 한다. 창경원 속에서는 야앵 준비하느라고 야단들이었다. 병원 언덕에 서서 나는 그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듯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그 소동이 한차례 지난 후로는 병실 안은 도로 사람 하나 없는 듯이 고요해졌다. 고요해지니까 창경원에서 울리는 재즈 소리가 한창 요란스럽다. 갑자기 꽃이 만발한 바람에 수만 명 관중이 모여든 것이었다. 웅대한 벌의 떼같이 웅성웅성하는 사람들의 소음 그 사람들의 흥을 돋우느라고 다음다음 미친 듯이 울리는 환의 재즈. 그들의 환락이 짙어 가면 짙어 갈수록 이곳 전염병실은 점점더 깊은 침울 속으로 가라앉아 간다.
[...]
복도에서는 야앵의 소음이 한층 뚜렷하게 들린다. 그 소리가 들려오는 서편 문 쪽으로 나는 발을 옮겼다. 소리는 출렁거리는 물결같이 금시로 우렁차게 들리다가는 금시로 가늘어지곤 한다. 복도 맨 끝 문설주에는 간호원 두 사람이 어깨를 걸고 기대 서서 정신없이 창경원 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열을 지어 늘어선 꽃등. 수천 촉 조명등에 비치어 화려한 구름을 이룬 벚꽃. 밑에 무리를 지어 이 봄의 한저녁을 누리는 사람들의 떼 노래 노래. 그리고 환희의 절정에서 흥을 못이겨 외치는 소리.
[...]
열시가 지나고 열한시가 가까워 오니까 야앵에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흩어져 창경원 일대는 도로 잠잠해졌다. 웅성거리던 끝이라 병실에 안앉노라면 그 잠잠한 것이 한층 뼛속으로 스며 들어오는 것 같다. (유진오, '봄', 1940)
▲ 대한뉴스 210호(1959. 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