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화학당 배치도 @이화여대
"참말, 모레 돌아가시렵니까?"
이화여고보의 긴 조선담.
"네. 그러나 또 며칠 있어두 좋구요."
마침 지나는 이화여고보 정문에 달린 외등을 쳐다본 여자는, 혹은, 남자나 마찬가지로 그 밝음을 저주 하였는지도 모른다. 또 긴 담을 끼고 가면서,
"너무 오래 계시면, 아버니께서 걱정 안 하시까?"
정동 13번지, 양인의 집 외등에는 전구가 없었다. 까닭에 그 맞은 편 전신주에 달린 전등은 그들에게는 좀더 원망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젊은 사나이가 저편에서 걸어왔다. 남자는 여자의 팔을 해방하려 하였다. 그러나 여자는 쫓지 않았다. "제가 어서 서울을 떠나는 게 조세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젊은 사나이는 눈에 모멸을 가지고 그들을 빠르게 훑어보고, 그리고 지났다.
"저……."
마침내 그들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정문 앞에까지 왔다. 역시 전신주에 달린 전등이, 또 맞은편 노서아 영사관의 외등이, 남자를 잠시 주저하게 하였으나, 그러나 이 골목에서 어둠을 찾는 것이 절망임을 아는 그는, 용기를 내어 여자를 이화여전 정문 지붕 밑으로 이끌려 하였다. (박태원, '애욕', 1934)
▲ (좌) 이화학당(이화여고보 및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전신)의 심프슨홀과 프라이홀(오른쪽 건물) (우) 손탁호텔. 프리아홀 자리에 있던 손탁호텔(1902-1922)을 이화학당에서 1917년 인수하여 사용하다 철거하고 1923년 프라이홀[이화여전 대학관] 을 신축. 프리이홀은 1975년에 화재로 소실. 현재 이화여고 주차장 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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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1935년 5월 30일자
"하루 일 원 오십 전이랍디다. 어디 담배값이나 벌러 나가 볼까 보오." '제비'가 차차 경영 곤란에 빠졌을 때 어느 날 그의 모교 고공高工에서 전화로 그를 부른 일이 있다. 당시 신축 중에 있었든 신촌 이화여전 공사장에 현장 감독으로 가 볼 의향의 있고 없음을 물은 것이다.
그리고 이튼날 벤또를 싸가지고 신촌으로 갔든 것이나 그 다음날은 다시 '제비' 뒷방에 언제나 한가지로 늦잠을 잤다.
"그 참 못하겠습디다. 벌이두 시원치 않지만 나 같은 약질은 어디 그런 일 견디어 나겠습디까." (박태원, '이상李箱의 편모片貌', 『조광』, 1937.6)
▲ 러시아 영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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