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나와서 어디 가 차나 먹을까 하고 진고개로 향하였다. 병화 생각도 나기는 하였지만 병화를 끌면 또 술을 먹게 되고 게다가 사람을 꼬집는 그 찡얼대는 소리가 머릿살도 아파서 혼자 조용히 돌아다니는 편이 좋았다. 우선 책사에 들어가서 책을 뒤지다가 잡지 두어 권을 사들고 나와서 복작대는 거리를 예서 제서 흘러나오는 축음기 소리를 들어가며 올라갔다. (염상섭, 『삼대』,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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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인생에 피로한 몸을 이끌고 이 안으로 들어와 2척×2척의 등탁자를 하나씩 점령하였다. 열다섯 먹은 '노마'는 그 틈으로 다니며, 그들의 주문注文을 들었다. 그들에게는 '위안'과 '안식'이 필요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어린 노마에게 구한 것은 한 잔의 '홍차'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그리고 '축음기 예술'에 귀를 기울였다. 이 다방이 가지고 있는 레코드의 수량은 풍부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나의 기쁨은 결코 그 '이백오십 매'라는 수효에 있지 않았고 오직 한 장의 엘레지에 있었다.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의 성대(聲帶)만이 창조할 수 있는 '예술'을 사랑하는 점에 있어서, 나는 아무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 내가 일곱 시간 이상을 그 곳에 있었을 때, 분명히 열두 번 이상 들었던 엘레지는, 역시 피로한 것이었음에 틀림없었다……. (박태원, '피로',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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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인은 없었다. 구보가 다시 문으로 향하여 나오면서, 왜 자기는 그와 미리 맞추어 두지 않았던가 뉘우칠 때, 아이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참, 곧 돌아오신다구요, 누구 오시거든 기다리시라구요, '누구'가 혹은 특정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벗은 혹은, 구보와 이제 행동을 같이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은 언제든 희망을 가져야 하고, 달리 찾을 벗을 갖지 아니한 구보는 하여튼 이제 자리에 앉아 돌아올 벗을 기다려야 한다.
여자를 동반한 청년이 축음기 놓여 있는 곳 가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노는 계집 아닌 여성과 그렇게 같이 앉아 차를 마실 수 있는 것에 득의와 또 행복을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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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옵쇼."
포노 라디오 '나나오라' 앞에서 레코드를 고르고 있던 아이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끄떡하였다.
"하웅 씨 계시냐?"
들어온 사람은 소설가 구보다.
"방에 계세요."
"뭣 하시니?"
"그냥 드러눠 계신가 봐요. 나오시랄까요?"
"그럴 것 없다."
오후 두시 십분 찻집 안에는 다른 객이 없었다. 구보는 축음기 놓인 데 가까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 차 하나 다우."
레코드가 돌기 시작하였다. '강남향' 독창의 '해당화.'
"더운 거요?"
"찬 걸 다우. 그리구 유성기는 그만둬라." (박태원, '애욕',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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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주인의 직업이 직업이라 결코 팔리지 않는 유화 나부랭이는 제법 넉넉하게 사면 벽에가 걸려 있어도, 소위 실내장식이라고는 오직 그뿐으로, 원래가 삼백 원 남짓한 돈을 가지고 시작한 장사라, 무어 찻집답게 꾸며 보려야 꾸며질 턱도 없이, 차탁과 의자와 그러한 다방에서의 필수품들가지도 전혀 소박한 것을 취지로, 축음기는 자작이 기부한 포터블을 사용하기로 하는 등 모든 것이 그러하였으므로, 물론 그러한 간략한 장치로 무어 어떻게 한 밑천 잡아 보겠다든지 하는 그러한 엉뚱한 생각은 꿈에도 먹어 본 일 없었고, 한 동리에 사는 같은 불우한 예술가들에게도, 장사로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우리들의 구락부와 같이 이용하고 싶다고 그러한 말을 하여, 그들을 감격시켜 주었던 것이요, 그렇기에 자작은 자기가 수삼 년간 애용하여 온 수제형 축음기와 이십여 매의 흑반 레코드를 자진하여 이 다방에 기부하였던 것이요, [...] (박태원, '방란장주인',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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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아마 약 한 달 전 일이었다. 하아얀 저고리를 입은 보이가 한 벌 접은 하아얀 종이를 영숙에게 전해주던 것이! 그리고 보이는 고갯짓으로 저어편 한구석에 혼자 앉아 있는 어떤 제복 입은 학생을 가리키었다. 그 학생을 바라다본 영숙이의 첫 인상이 '몹시도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 창백한 얼굴에서 반사되는 두 개의 시선, 그것이 영숙이를 이상스런 감정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 두 눈은 뚫어질 듯이 영숙이를 응시하는 것이었다. 그 눈 모습은 마치 몹시 사랑하는 애인을 건너다보는 순결하고도 열정에 찬 그러한 눈이었다.
영숙이는 얼른 그 시선을 피하면서 종이를 펴 들었다. 그때 영숙이 가슴속에서는 무엇이 털썩 소리를 내고 떨어지는 듯 싶었다. 그러나,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악」을 한 장 틀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직 이것이었다. 영숙이는 다시 그 학생을 건너다 보았다. 역시 열정에 찬 두눈이 영숙이를 집어삼킬 듯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영숙이는 그 소리판을 찾아서 축음기 위에 걸어 놓았다. 심포니의 조화된 멜로디가 담배 연기로 자욱한 방안 구석구석에 울릴 때 그 학생은 잠시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은 얼굴이 창백한 탓이었던지 어째 몹시 구슬픈 고적한 미소였다. (주요섭, '아네모네의 마담', 『조광』, 1936.1.)
기자-외국서는 '살롱문화'가 놀랍게 발달됐다는데 여기서도 작고 문화층文化層의 발과 눈을 여기 모으는 노력을 해야할 걸요. 그런데 음악은 무엇들을 좋아해요. 레코드판으로 비치한 것은?
강석연[모나리자(본정2) 마담] - 아무래도 '재즈'를 좋아해요. 아메리카류의, 우리 홀에는 조선판은 일체 놓치 않았어요.
복혜숙[비너스(인사동) 마담] - '비너스'에도 '재즈'와 같이 경쾌하고 변화가 많고 선정적煽情的이 되어 그런 것 늘 좋아해요. 조선 유행가판도 많이 있고 승태랑勝太郞[가츠타로]이나 시환市丸[치마로] 것도 있고요.
김연실[낙랑(장곡천정) 마담] -「낙랑樂浪」에는 세레나데 종류가 많아요. 카루소 것이나 소원의강藤原義江[후지와라 요시에] 것도 여러 장 잇지요. 쪼세프 뻬-간의 꾀꼬리 같은 판도 여러 장 있고 그리고 민요들을 좋아해요. 스코틀랜드蘇格蘭 것 같은 것과 서반아西班牙의 무용곡도 좋아들 하고. ('끽다점 연애풍경', 『삼천리』, 19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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