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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씨의 결혼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4. 9. 13:10

▲ 박태원·김정애 결혼식 방명록 (안석영)

나이 찬 아들의 기름과 분 냄새 없는 방이, 늙은 어머니에게는 애달펐다. 어머니는 초저녁에 깔아 놓은 채 그대로 있는 아들의 이부자리와 베개를 바로 고쳐 놓고, 그리고 그 옆에가 앉아 본다. 스물 여섯 해를 길렀어도 종시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자식이었다.
설혹 스물 여섯 해를 스물 여섯 곱하는 일이 있다더래도 어머니의 마음은 늘 걱정으로 차리라. 그래도 어머니는 그가 작은며느리를 보면, 이렇게 밤늦게 한 가지 걱정을 덜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참, 이애는 왜 장가를 들려구 안하는 겐구."
언제나 혼인 말을 꺼내면, 아들은 말하였다.
"돈 한푼 없이 어떻게 기집을 먹여 살립니까?"
"하지만…… 어떻게 도리야 있느니라. 어디 월급쟁이가 되드래두, 두 식구 입에 풀칠이야 못헐라구..."

어머니는 어디 월급자리라도 구할 생각은 없이, 밤낮으로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고 혹은 공연스리 밤중까지 쏘다니고 하는 아들이 보기에 딱하고 또 답답하였다.
'그래두 장가를 들어 놓면 맘이 달러지지.'
'제 계집 귀여운 줄 알면, 자연 돈벌 궁릴 하겠지.'

작년 여름에 아들은 한'색시'를 만나본 일이 있다. 그 애면 저두 싫다구는 않겠지. 이제 이놈이 들어오거든 단단히 다져보리라…… 그리고 어머니는 어느 틈엔가 손주 자식을 눈앞에 그려보기조차 한다.
[...]
구보는 좀더 빠른 걸음걸이로 은근히 비 내리는 거리를 집으로 향한다. 어쩌면 어머니가 이제 혼인 얘기를 꺼내더라도, 구보는 쉽게 어머니의 욕망을 물리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


박태원 씨, 김정애 양과 이달 27일(토), 다옥정 7 자택에서 화촉華燭의 전典을 거행하리라고. (조선중앙일보, 1934.10.19.)


▲ 박태원·김정애 결혼식 방명록 (김지용)

[...] 저편 한약국 집에서 젊은 내외가 같이 나오는 것을 보자,
'하여튼, 의는 좋아. 언제든지, 꼭, 동부인이지……'
제풀에 빙그레 웃음이 입가에 떠올랐다.
그들 젊은 내외를 가리켜 의가 좋다는 것은, 다만, 이 이발소 소년 혼자의 의견이 아니다. 동경 어느 사립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한약국 집 큰아들이, 현재의 아내와 결혼을 한 것은 지금부터 햇수로 삼 년 전의 일이요, 그들이 서로 안 것은 그보다도 일 년이 일러, 같이 어깨를 가지런히 하여 거리를 산책하는 풍습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었떤 것이다. 동경서 갓 나온 한약국 집 아들이, 역시 그해 봄에 '이화'를 나온 '신식여자'와 '연애'를 한다는 소문은, 우선 빨래터에서 굉장하였고, 이를테면 완고하다 할 한약국집 영감이 이러한 젊은 사람들의 사이에 대하여, 어떠한 의견을 가질지는 의문이었으므로, 동리의 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제법 흥미를 가지고 하회를 기다렸던 것이나, 아들의 말을 들어보고, 한번 여자의 선을 보고 한 완고 영감이, 두말하지 않고 그들에게 선뜻 결혼을 허락해준 것은, 참말, 뜻밖의 일이었다. 그것으로 '영감'은 '개화'하였다는 칭찬을 동리에서 받았으나, 아들 내외의 행복에 대해서는, 객쩍게, 남들은, 또 말들이 많아 '연애를 해서 혼인했던 사람들이 더 새가 나쁘더군'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으나, 그들의 사랑은 참말 진실한 것인 듯싶어, 흔히 '신식 여자'라는 것에 대하여 공연히 빈정거려보고 싶어하는 동리의 완고 마누라쟁이로서도, 이제는 방침을 고쳐, 도리어 그들 젊은 내외를 무던들 하다고, 그렇게 뒷공론이 돌게 된 것은 퍽이나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박태원, 『천변풍경』,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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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5년─
내가 아내를 맞아들인지 이미 5년이 지냈는가 하고 생각하여 보니 나와 나의 아내가 신랑 신부로서 초례청에서 마주보고 같이 백년해로를 맹세하여썬 것이 그것이 바로 소화 9년[1934년] 가을의 일이었으니까 딴은 이번 10월 27일로써 우리들의 결혼 생활도 만 5년햇수로는 어언간에 6년이나 되는 폭입니다.

결혼 5년─
5년이란 시일이 무어 그리 길다고 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이제 우리가 서로 손을 맞잡아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그 사이 있었던 가지가지의 일을 되생각하여 볼 때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 또한 그다지 짧은 시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때만 하여도 아직 학생티가 그저 가시지 안핬던 젊은 남편은 이제 이미 삼십의 고개를 넘었으며 노랑저고리 다홍치마가 어울리던 아내도 이제 세 어린 것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5년의 시일을 두고 언제든 변치 않은 것은 나의 '가난'입니다. 나는 남들만큼은 아내와 어린것을 사랑하는 까닭에 내가 가난하므로 하여 저들을 좀더 다행하게 하여 주지 못함을 생각할 때 못내 죄스럽고 또 슬픕니다.
그러고 보니 결혼 생활 5년에 내가 절실히 느낀 것은 '돈의 귀함'입니다. 내 집에 아내를 처음으로 맞아들일 때 나는 아내를 위하여 비로서 '돈의 귀함'을 배웠거니와, 이제 세 어린것의 아버지 노릇을 하게 되매 그 느낌이 절실한 바가 있습니다.

나의 아내는 숙명여고를 마치고 여자사범 연습과를 나온 여교원이었습니다. 그는 나와 결혼하기 한 해 전에 교원을 그만두었던 것입니다마는 나와 결혼한 뒤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다시 교원 노릇을 하겠노라고 원하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속에서 혼자 허위대는 남편의 모양이 보기에 딱하고 민망하였던 모양입니다.
[...]
아내가 아직 처녀 적에 삼 년간 시골 보통학교에서 교원 노릇을 하였다는 것만으로 나의 마음을 곧잘 애달픈 정을 느낍니다. 다른 별 까닭 아니고 오직 남편이 가난하기 때문에 다시 교단에 선다는 것은 내가 바로 가난한 연고로 하여 마음에 견디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박태원, '결혼 5년의 감상', 『여성』,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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