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다녀 그 '솜씨'를 잘 알고 있는 끽다점 외에서 나는 일찍이 가배차를 마신 일이 없소. (박태원, '기호품 일람표', 동아일보, 19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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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MJB의 미각을 잊어버린 지도 20여 일이나 됩니다. (이상, '산촌여정',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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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히라다'에서 '런치'를 먹을 때와 '멕시코'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에도 생각하였거니와 나와 같이 유일도일愉逸逃逸 무위하는 이처럼 살아 나가는 존재야말로 값어치 없고 누추하기가 흡사 도금비녀, 도금가락지 같은 것이라고 오늘은 더 한층 자책하는 마음이 들었다. (안회남, '상자',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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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자동차에 치일 뻔하면서도 나는 그래도 경성역을 찾아갔다. 빈 자리와 마주 앉아서 이 쓰디쓴 입맛을 거두기 위하여 무엇으로나 입가심을 하고 싶었다.
커피 ― . 좋다. 그러나 경성역 홀에 한 걸음을 들여 놓았을 때 나는 내 주머니에는 돈이 한푼도 없는 것을 그것을 깜박 잊었던 것을 깨달았다. (이상, '날개',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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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잔을 들고
오─ 나의 연인이여
너는 한 개의 슈크림이다.
너는 한 잔의 커피다.
너는 어쩌면 지구에서 알지 못하는 나라로
나를 끌고 가는 무지개와 같은 김의 날개를 가지고 있느냐?
나의 어깨에서 하루 동안의 모든 시끄러운 의무를
내려주는 짐 푸는 인부의 일을
너는 캘리포니아의 어느 부두에서 배웠느냐?
(김기림, 태양의 풍속, 1939)
늘 다녀 그 '솜씨'를 잘 알고 있는 끽다점 외에서 나는 일찍이 가배차를 마신 일이 없소. (박태원, '기호품 일람표', 동아일보, 1930.3.)
향기로운 MJB의 미각을 잊어버린 지도 20여 일이나 됩니다. (이상, '산촌여정', 1935)
여러 번 자동차에 치일 뻔하면서도 나는 그래도 경성역을 찾아갔다. 빈 자리와 마주 앉아서 이 쓰디쓴 입맛을 거두기 위하여 무엇으로나 입가심을 하고 싶었다.
커피 ― . 좋다. 그러나 경성역 홀에 한 걸음을 들여 놓았을 때 나는 내 주머니에는 돈이 한푼도 없는 것을 그것을 깜박 잊었던 것을 깨달았다. (이상, '날개', 1936)
커피잔을 들고
오─ 나의 연인이여
너는 한 개의 슈크림이다.
너는 한 잔의 커피다.
너는 어쩌면 지구에서 알지 못하는 나라로
나를 끌고 가는 무지개와 같은 김의 날개를 가지고 있느냐?
나의 어깨에서 하루 동안의 모든 시끄러운 의무를
내려주는 짐 푸는 인부의 일을
너는 캘리포니아의 어느 부두에서 배웠느냐?
(김기림, 태양의 풍속, 1939)
커피! 인생! 도회! 봄!
현대인의 다방 취미는 담배 하나 피우기 위한 휴게소로 또는 친우親友나 혹은 용건 있은 사람을 잠시 기다리는 대합실 정도로 이용되는 바 공리적 일면이 있은 이런 분들께는 좋은 홍차나 가배珈琲나 또는 좋은 레코드가 그다지 필요하지 아니하다. 다방의 세속화라고나 할까? 이런 종류의 다방은 서울로 치면 '명과明菓'[명치제과]나 '금강산'에서 종로의 '올림피아', '아세아'가 이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다방의 존재 또는 다방의 의의로 본다면 이러한 순전한 세속적 공리성에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르는 바 다방 취미, 다방 풍류란 일종 현대인의 향락적 사교 장소라는데 공통 존재 이유가 있은 것이니 가령 한 친우親友(또는 2-3인)와 더불어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아니하고 문학, 예술, 세상의 기이한 사실, 더 나아가 인생을 이야기하기 위하야 이러한 곳을 선택하는 바 고급된 다방 애용가도 있을 것이요, 사랑하는 한 이성과 청담淸談하며 애정의 분위기에 잠기려는 세상의 많은 로맨티스트들도 있은 것이요, 최근과 같이 레코드와 영화에 대한 열이 극도로 팽일膨溢한 세대에 있서서는 레코드를 듣기 위하야 또는 영화의 세계를 찾아 이 다방을 일종의 공동 아지트로 해서 기분 좋게, 유창悠暢하게 모여들기도 한다.
여기 경성 시내에 산재해 있는 다방 분포도를 하나 그려보자. 그리고 이 분포도 위에 배치된 지리적 방위와 그 다방 다방이 가지는 바 독자적인 다방의 개성과 공통성을 염두에 상기하라.
지역적으로 보아 명치정明治町[명동] 한 구역一區이 경성 다방의 총 본영本營인 감이 있다. 이르는 바 서울의 다방구區다. 이 중에서 다방 탐방객이 어느 집 입구를 들어서면 거기에는 공통된 다방 분위기─일종의 다방 체취를 감촉하리라, 남양南洋의 열대 식물이 있고 베토벤의 사안형死顔型과 2-3인의 다방양娘 또는 다방아兒와 가급적 좁은 지면을 공리적으로 이용하여 벌려진 테이블과 의자, 소란한 레코드, 여기저기 널려져 있는 그 날 그 날의 신문과 헐어진 그 달 그 달의 취미 잡지 영화 잡지, 커튼, 몇 개의 화폭, 조상彫像, 탁상 전등 등. 그리고 자욱한 담배 연기와 몇 개의 독립된 대사의 교착, 창백한 인텔리급의 청년 남녀의 분산된 진영 등. 그러나 이 공통된 분위기 속에 반영된 세상이란 또 그들의 이 순간적 향락 심리란 계절을 따라 외부 세계의 이변에 따라 지극히 완만하게 때로는 발작적으로 변모되어 간다. 그리하여 자아의 적은 화상만을 안고 다니는 다방객의 멸렬된 세계에도 하나의 공통된 심적 현상을 환기할 수 있으니, 가령 겨울에서 갑자기 다양한 봄 햇볕의 총애를 받은 그들이라면 그들은 일제히 경쾌한 보조와 명랑한 미소의 얼굴로 습관적인 그 걸음이 어느 다방 한 집을 찾아들어 가벼운 멜로디에 댄스의 한 스탭을 사랑할 것도 같다. 이 신경적 외계外界의 감촉이 이제 멀지 아니하여 우리에게도 이를 듯싶다. 명명하야 '춘삼월 다방 정조春三月 茶房 情調'란 제목이 나에게 제시된 것도 이러한 곳에 연유한 것이리라. 외투가 무거워지고 스프링 코트가 생각나는 때, 오히려 처녀들은 일색의 외투나, 두루마기 속에 간직햇던 선명한 색채와 단아한 여장麗裝을 거리에 해방하는 기쁨을 맛볼 것이다. 수선水仙은 시들어 늙었고 커피는 너무나 둔탁한 듯, 향기로운 홍차의 부드러운 김이 웃음 띤 그들의 얼굴과 더불어 하나의 명랑보明朗譜를 짜낸다. 말소리가 가볍고 몸의 율동이 생생하고 탄력성이 있어 봄의 향욕과 꿈과 희망을 품은 힌 구름이 그들의 향연香烟과 같이 한 공간 속에 가득 차진다. 어디서 카나리아의 봄 하늘을 그리는 노래도 있을 듯 창을 열면 '아코디언'의 애수 품은 보헤미앙의 한 전율이 들릴 것도 같으나 불행히 여기는 파리의 뒷골목이 아님에 이런 살 속에 숨어드는 예술적 향취를 찾을 바 없다.
봄이 되면 명치정 다방구는 너무나 음산한 맛이 있다. 봄으로 더불어 걷는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기에는 해방된 태양의 자애慈愛를 빌어야 할 것이 아닐까? 오히려 겨울이면 추워서 그 넓은 길을 피하기까지 하는 장곡천정長谷川町[소공동]의 다방이 훨씬 친밀성을 느끼리라. 서울의 다방다운 다방의 새 기원紀元을 지어준 '낙랑樂浪'이 여기 있고, 그 다음으로 7년의 역사를 가진 '플라타느'는 서울서도 가장 친밀하고 가정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다. 새로 생기는 '나전구羅旬區'도 이 새봄을 기달려 남쪽 창을 열 것이요, '미모자'는 훨씬 규모가 째여서 명랑明朗보다도 안일安逸의 순간을 제공한다. 음악을 찾는 이는 엘리자로 더 멀리 '돌체'의 탐탁한 적은 문을 두드리기 하리라. 이 봄을 장식할 곻은 멜로디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본정本町[충무로]을 좋아하는 이의 발걸음은 아직도 '명과明菓'나 '금강산'을 버리지 아니 할 것이나, '미령美鈴'의 일층은 잠시 태양과 친할 포근한 몇 개의 자리를 갖추고 있고, '프린스'는 봄밤의 그림자를 가득히 품어 있다. 혼자 유유히 '써니'의 이층에 오르면 검은 비로드[벨벳]의 남벽南壁이 정다운 손길을 기다리고, '다이아나'는 성림聖林[헐리웃]의 아메리카적 기분을 좋아해 걸음을 멈추는 단골 손님도 있으나, '노아노아'의 흰 원주곽圓主槨을 거쳐 넓은 백색 공간, 더높이 한 층계를 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백룡白龍'은 언제나 화려가 경허輕虛에 흐르지 않는 매혹으로 넉넉히 시간을 저버리고 앉아 있을 수 있으며, 더욱 페치카의 정취는 겨울보다도 봄밤의 온기를 전하기에 더 정다웁지 않을까?
추위가 물러가고 조바위 대신 여우목도리의 남일濫溢이 차차 퇴치되어 가는 때 종로네거리 앞을 밀리는 발걸음도 자리가 잡혀진다. 전차를 기다리는 동안 또 거리를 휘돌아 다니는 이들은 여기저기서 지기知己, 친우親友에게 손을 내밀어 '아세아'와 '올림피아'로 잠시 쉬러 들어간다. '영보永保', '밀림' 안엔 떠드는 소리가 높아지고 '뉴홈'은 아직도 단조한 중에 편히 쉴 자리를 장만해 있으리라. 종로와 안동安洞 네거리 중간에 걸처있던 '은령銀鈴'이 그 소리를 감춘 후 서대문에 채 못미처 '자연장紫煙莊'은 빌리야드[당구]를 즐기는 손님을 부르며 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대학 전문교를 모아 놓은 동소문東小門 부근에 하나의 다방도 없다는 것은 너무나 삭막하다. 파리의 '카르티에 라탱'(羅甸區)은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생활과 더불어 안식의 포근한 한 자리가 이 봄을 기다려 열릴 수도 있을 법 하건만 이곳은 건실健實 때문에 단조를 참을지언정 생의 향기를 위하여 한 잔의 커피를 사랑하는 등의 부박성을 경멸하는 법도의 세계인 까닭인가?
봄! 그러나 봄은 더 큰 곳 더 넓은 곳에 있다. 다방의 좁은 공간에서 봄의 정조, 풍류를 찾는 도회인의 그 좁은 심창心窓을 열어 자연의 포옹, 자연의 위대, 자연의 자애에 접하게 하라. 한 잔의 홍차 대신 대기의 영령英靈을 삼키는 해방된 인간! 대지 위에 서서 손을 높이 쳐들어 하늘의 신비를 부르는 그 순간, 그 공포, 그 법열法悅! 하나의 보헤미앙은 이런 환상을 품어본다. 그러나 권태와 피로에 지친 몸을 오늘도 어느 다방의 한 구석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커피! 인생! 도회! 봄! 이 무슨 업원業寃인가? (이헌구, '보헤미안의 애수의 항구─ 다방茶房 보헤미안의 수기手記', 『삼천리』, 19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