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가 왔다. 사람들은 내리고 또 탔다. 구보는 잠깐 머엉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러나 자기와 더불어 그곳에 있던 온갖 사람들이 모두 저 차에 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저 혼자 그곳에 남아 있는 것에 외로움과 애달픔을 맛본다. 구보는 움직이는 전차에 뛰어올랐다.
전차 안에서 구보는 우선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하나 남았던 죄석은 그보다 바로 한 걸음 먼저 차에 오른 젊은 여인에게 점령당했다. 구보는 차장대 가까운 한구석에가 서서, 자기는 대체 이 동대문행 차를 어디까지 타고 가야 할 것인가를, 대체 어느 곳에 행복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이제 이 차는 동대문을 돌아 경성 운동장 앞으로 해서... 구보는, 차장대, 운전대로 향한, 안으로 파란 융을 받혀대인 창을 본다. 전차과에서는 그곳에 '뉴스'를 게시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요사이 축구도 야구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
**
순례는 바로 집으로 가려다가 아직 밥도 아니 되었을 것 같고, 또 심사도 산란하여 이야기나 좀 하고 가려고 정선의 집을 찾았다.
“안 계신데요.”
하는 유월의 말을 듣고, 순례는,
“어디 가셨니?”
하고 물었다.
“저 잿골 서방님하고 경성운동장에 야구구경 가셨어요.”
하고 유월은 앞서서 길을 인도하며,
“들어오시지요. 인제 곧 돌아오실걸요, 머.”
하고 시계를 바라본다. 대청에 걸린 시계는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다.
[...]
“부인께서는 오늘 오후에 김갑진 군허구 베이스볼 구경을 가셨다가 아마 어디로 저녁을 자시러 갔을 것입니다. 요새 거진 날마다 그러시는 모양이니까. 지금 댁에 들어가시더라도 아마 부인은 안 계실걸요. 부인을 보시려거든 청목당이나 경성호텔이나…… 응 벌써 시간이 되었군, 난 갑니다. 굿바이. 부인 조심 잘 하시오!”
하고 단장을 흔들며 건너편 폼으로 가려는지 층층대로 뛰어오른다. 건영은 서분의 집에서 나와서 정거장 식당에서 위스키를 한잔 사서 날뛰는 양심을 어지러뜨려 놓고는 인천으로 가는 길에 우선 경의선으로 혹시 아는 여자나 올라오면 만날까 하고 서성거리다가, 숭을 만나서 갑진과 정선에게 대한 원혐을 풀고는 맘이 흡족하여 가는 것이었다. (이광수, 『흙』, 1932)
**
영신은 사흘 뒤에 동혁의 답장을 받았다. 제 모양과 같이 뭉툭한 철필 끝으로 꾹꾹 눌러 쓴 글발은 굵다란 획마다 전기가 통해서 꿈틀거리는 듯, 피봉을 뜯는 영신의 손은 가늘게 떨렸다.
주신 글월은 반가이 받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실례한 것은 이 사람이었소이다. 남자끼리였으면 하룻밤쯤 새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영신 씨의 사정을 보느라고 충분히 이야기할 기회를 놓치고 말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을 그러한 의미 깊은 모임에 청하여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오는 토요일에는 교우회의 책임 맡은 것이 있어서 올라가지 못하니 미안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토요일에는 경성운동장에서 '법전'과 축구시합이 있어서 올라가게 되는데, 시합이 끝나면 시간이 늦더라도 백선생 댁으로 가겠으니, 그때 반가이 뵙겠습니다.
[...]
시합하는 날, 동혁은 연습할 때와는 딴판으로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신문사 같은 데서 후원을 하는 것도 아니요, 아직도 늦더위가 대단해서 그런지 넓은 운동장에 구경꾼은 반쯤밖에 아니 찼다. 중학교끼리 대항을 하는 야구와도 달라서 응원도 매우 조용하게 진행이 되었다. 전반까지는 골키퍼인 동혁이가, 적군이 몰고 들어와서 쏜살같이 들여 지르는 볼을 서너 번이나 번갯불처럼 집어 던지고 그 큰 몸뚱이를 방패 삼아서 막아 내고 한 덕으로 승부가 없다가, 후반에 가서는 선수 중에 두 사람이나 부상자가 생긴 데 기운이 꺾여서 '고농'이 세 골이나 졌다.
그러나 최후까지 딱 버티고 서서 문을 지키다가, 볼을 막아 내치는 동혁의 믿음성 있고 민활한 동작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동혁은 풀이 죽은 다른 선수들과 섞여서 운동장으로 나왔다. 나오다가 정문 곁에 비켜 서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두 여자를 발견하였다.
"구경 오셨에요?"
동혁은 발을 멈추며, 뜻밖인 듯이 영신에게 인사를 하였다. (심훈, 『상록수』, 1935)
영리營利를 목적함인지 공익을 위주爲主 함인지 여하간 '30만 부민府民을 위하야'라는 경성부京城府 경영의 경성운동장이 을축년 10월 15일에 와서 새로 생겨나니 즉 훈련원 동편 구릉이든 그곳이었다.
만여 평의 육상 경기장이며 5천여 평의 야구장이며 천여평의 정구장이며 평탄平坦 광활한 것이 실로 대규모적이다.
관람석도 그럴 듯이 되었고 수도며 변소며 .. 설비가 모르긴 하지만 동양 제일이라고 칭할만하다. 그런데 예例의 관영官營인지라 경기가 있을 때마다 관람료, 좌석료의 중세重稅는 말도 말고 부청관리, 순사 등의 관객 감시가 무엇보다 불쾌하다고 비난이 많다. 집회장은 그 만콤 다수인多數人인 것과 같이 그 만큼 질서유지가 곤란한 바가 아닌 바 아니지만 너무 관세官勢만 내세우는 것은 운동장으로서의 너무 부자유가 안일가. 공익상 군중의 주의도 촉구하지 않는 바는 아니나.. ('경성은 1년간 어떻게 변했나', 『개벽』, 1925.12.)
**
오후 4시에 경성운동장에서 일본의 대학최강 게이오[慶應]대학과 서울의 최강 식산은행의 야구시합을 관람했다. 식산은행 유일의 조선 선수 이영민이 팬스를 넘기는 깨끗한 홈런을 날렸다. 일본인 관중들이 그에게 박수를 쳐주는 모습이 흐뭇했다. 게이오대는 거의 흠잡을 데 없는 경기를 펼쳐 4:1의 승리를 거두었다. 어쨋거나 내 관심은 온통 [양 팀을 통틀어] 유일한 조선 선수인 이영민의 놀라운 경기를 지켜 보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말로만 일본-조선의 우의 등속을 떠들지 말고 더 많은 조선인들을 자기들 팀에 영입하여 두 민족의 친선을 촉진함이 마땅하다. (윤치호 일기, 1930.6.15.)
**
종로 네거리에서 전차를 잡아 타니 차중車中의 화제는 전부 서정권徐廷權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하는 이들은 산듯하게 차린 청년신사들이 아니면 어느 고등학교인 듯한 학생패들이다. 전차는 탑동공원塔洞公園 앞에서도 이러한 구경패를 한아름 싣고, 또 종묘宗廟 앞에서서도 한아름 싣고 쏜살같이 쏜살같이 훈련원의 운동장으로 닿는다. 운동장 앞은 수십 자동차와, 또 자꾸 계속하여 오는 전차가 수십 명씩 수백 명씩 사람을 쏟아 놓고 가버린다.
입구의 혼잡은 예상이외로 사람은 사람을 안고 돌고, 부녀아婦女兒들은 인파에 끼어 울음소리를 낸다. 눈 앞에 보이는 군중만도 천여 명이 될까, 겨우 뚫고,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가니 그 넓은 운동장 3면三面 주위는 첩첩 인파로 빈틈이 없이 군중으로 가득 찼다. 얼른 보기에도 약 5,000명 정도의 군중인 듯, 운동장 중앙에는 권투장이 둥그렇게 올려 솟았고, 그 주위에도 사람으로 가득 찼다. 가끔 환성이 "우워우워-"하고 일어나는 것은 아마 정각이 다 되었으니 어서 시작하라는 뜻인 듯, 청년학생들이 많이 모인만치 장내가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신선하고 활기가 흘러 보인다. 누가 가끔 우스운 말을 한마디 툭 건네면 그 주위의 수십 명, 수백 명 군중이, "왓-"하고 환하게 웃는다.
[...]
7시 정각, 오백촉 전광 아래에선, 처음으로 역사적인 이 시합이 개시되었다. 오늘[1935년 10월 21일] 이 광경은 라디오를 통하여 전조선은 물론이요, 세계의 곳곳에서 서정권의 승패 기록을 주시하고 있으리라.
간단한 개회사開式辭가 마이크로폰 앞에서 있은 뒤 뒤이어 여운형呂運亨씨의 거구巨軀가 단상에 오르면서 일장의 감격적인 축하연설이 있었다. [...] ('무적 서정권 대승광경, 서반아의 강호를 격파', 『삼천리』, 193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