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구보는 혹은 상대자가 모멸을 느낄지도 모를 것을 알면서도 불쑥, 자기는 이제까지 고료라는 것을 받아 본 일이 없어, 그러한 것은 조금도 모른다고 말하고, 마침 문을 들어서는 벗을 보자 그만 실례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무어라 말할 수 있기 전에 제자리로 돌아와 노트와 단장을 집어들고, 마악 자리에 앉으려는 벗에게,
"나갑시다. 다른 데로 갑시다."
[낙랑파라] 밖에, 여름 밤, 가벼운 바람이 상쾌하다. 조선호텔 앞을 지나, 밤늦은 거리를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대낮에도 이 거리는 행인이 많지 않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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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별명이 '봉테일'이다. 하도 디테일해서 붙은 별명이다. 제작발표회[웨스턴 조선호텔] 때도 그 디테일함은 살짝 비췄다. 고3 시절, 집 창문에서 자신이 괴물을 본 거리에 대해 봉 감독은 이렇게 설명했다.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프라자호텔 거리? 본 건 확실하다", 디테일에 목숨 거는 봉 감독이 대충대충 만들었을 거 같진 않다. (오마이뉴스, 2006.6.9.)
인생에 피로한 자여! 겨울 황혼의 '한강'을 찾지 말라. 죽음과 같이 냉혹한 얼음장은 이 강을 덮고, 모양 없는 산과 벌에 잎 떨어진 나뭇가지도 쓸쓸히, 겨울의 열 없는 태양은 검붉게 녹슬어 가는 철교[철도교] 위를 넘지 않는가?……
나는 그 곳에 인생의 마지막─그러나 '인생의 마지막'으로는 당치않은 어수선하고 살풍경한 풍경을 발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박태원, '피로',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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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다리 위
남자A : 윤 사장님!
천둥소리 요란한데 폭우를 뚫고 인도 위를 달려가는 두 남자. 카메라 급속히 PAN하면, 한강다리 난간 밖으로 몸을 내민 한 중년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세찬 비바람에 넥타이를 휘날리며, 한 손으로 난간을 움켜쥔 투신 직전의 윤 사장.
남자A : 안 됩니다 사장님!
남자B : 윤가 너 왜 이러니! 부도 첨 나보나 임마!
윤 사장 : (난데 없이) ... 니들 ... 방금 봤냐?
직부감 화면, 난간 밖의 윤 사장 아래로 검푸르게 출렁이는 한강물이 화면 가득 보인다.
윤 사장 : 뭐 커다란게 ... 물 속으로 시커멓게 이 놈들아 ... 정말 못봤어?
남자B : 뭐 임마 뭐?
윤 사장 : 으이구 이 ... 끝까지 둔해 빠진 새끼들! [....] 잘 살어들. (영화 '괴물' 중. 대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