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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4. 16. 17:03

화수분도 가고, 어멈도 하나 남은 어린 것을 업고 간 뒤에는 대문간은 깨끗해지고 시꺼먼 행랑방 방문은 닫혀 있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다시 행랑 사람도 안 들이고 식모도 아니 두었다. 그래서 몹시 추운 날, 아내는 손수 어린 것을 등에 지고 이웃집의 우물에 가서 배추와 무를 씻어서 김장을 대강 하였다. 아내는 혼자서 김장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어멈 생각을 하였다. (전영택, '화수분',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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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장 담그는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서방(캘리포니아 등지)에 있을 때에는 우리 동포 가정에서 조선 음식을 먹을 기회가 있습니다. 김치도, 그렇지마는 이렇게 김치 맛이 안 나요. 선생님 댁 김치 맛납니다.”
하면서 김칫국을 떠서 맛나게 먹는다.
김치 맛이 아마 조선 음식에 있어서는 가장 조선 정신이 있지요.
하고 대학 문과에서 조선 극을 전공하는 김상철이 유머러스한 말을 한다.
“브라보우!”
하고 이 박사가 영어로 외치고,
“참 그렇습니다. 김치는 음식 중에 내셔널 스피릿(민족 정신)이란 말씀이야요.
하고 그 지혜를 칭찬한다는 듯이 상철을 보고 눈을 끔쩍한다. (이광수, 『흙』,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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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은 없어두 많이 자슈."
국수 외에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 것을 보고 덕기댁은 권하더니 아이를 떼어놓고 나가서 자기도 떡국 한 대접을 들고 들어오며,
"나하고 잡숩시다."
하며 마주 앉는다. 덕기는 속으로 잘되었다 하고 빙긋 웃는다. 아내의 그런 너름새가 마음에 들었다.
"설에 친 떡이라, 마른 게 잘 붇지를 못했군."
하고 혼잣소리를 하며 편육을 집어 떡국 그릇에 넣어준다. 지금 부엌에서 원삼 처가 필순을 칭찬하는 바람에 아까보다는 호의를 갖게 된 것이다.
필순은 이제야 마음이 풀리며, 이것저것 집어먹어보았다. 편육도 일년에 몇 번 술안주 설 제 도마머리에서 한두 점 얻어먹던 그 맛이 새롭거니와, 근년에는 설에도 구경 못하던 전유어 맛이란 잊었다가 새로 찾은 듯싶다. 도대체 겨우내 주리던 통김치를 보니, 그것만 가지고도 밥 한 그릇은 먹겠는데, 그 싱싱한 맛이라니 한세상 나서 잘살고 볼 거라고 어린 마음에 자탄을 하는 것이었다. (염상섭, 『삼대』,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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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월에 대독 터진다는 말이 있다. 딴은, 간간이 부는 천변 바람이 제법 쌀쌀하기는 하다. 그래도 이 곳, 빨래터에는, 대낮에 볕도 잘 들어, 물 속에 잠근 빨래꾼들의 손도 과히들 시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아니, 요새, 웬 비웃이 그리 비싸우?"
주근깨투성이 얼굴에, 눈, 코, 입이, 그의 몸매나 한가지로 모두 조고맣게 생긴 이쁜이 어머니가, 왜목 욧잇을 물에 흔들며, 옆에 앉은 빨래꾼들을 둘러보았다.
"아아니, 을말 주셨게요?"
그보다는 한 십 년이나 젊은 듯, 갓 서른이나 그밖에는 더 안 되어 보이는 한약국집 귀돌 어멈이 빨랫돌 위에 놓인 자회색 바지를 기운차게 방망이로 두들기며 되물었다. 왼편목에 연중창 앓은 자국이 있는 그는, 언제고, 고개를 약간 왼편으로 갸우뚱한다.
"글쎄, 요만밖에 안 되는 걸, 십삼 전을 줬구료. 것두 첨엔 어마허게 십오 전을 달라지? 아, 일 전만

더 깎재두 막무가내로군."
지금 생각하여 보아도 어이가 없는 듯이, 달래 흔들던 손을 멈춘 채, 입을 딱 벌리고 옆에 앉은 이의

얼굴을 쳐다보려니까, 그의 건너편으로 서너 사람째 앉은 얼금뱅이 칠성 어멈이 
"그, 웬걸 그렇게 비싸게 주구 사셨에요? 어제 우리 안댁에서두 사셨는데, 아마 한 마리에 팔 전 꼴두 채 못 된다나 보든데,,,,,,."
그리고 바른손에 들었던 방망이를 왼손에 갈아들고는 한바탕 세차게 두들기는 것을, 언제 왔는지 그들의 머리 위 천변길에가, 우선, 그 얼굴이 감때사나웁게 생긴 점룡이 어머니가 주춤하니 서서,
"어유우, 딱두 허우. 낱개루 사 먹는 것허구, 한꺼번에 몇 두룸씩 사 먹는 것허구, 그래 겉담? 한 마리 팔 전씩만 헌담야 우리 거튼 사람두, 밤낮, 그 묵어 빠진 배추김치 좀 안 먹구두 사알게?"
사내같이 우락부락한 소리로 하는 말에, 이쁜이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기는 하면서도, 반은 혼자말로,
"그 묵은 통김치나마 넉넉하게나 있었으면 좋겠수. 우린 그나마두 낼만 먹으면 그만야." (박태원, 『천변풍경』,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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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는 올해 매우 일즉어니 아직 추위가 이르기 전에 김장을 해치웠다. 대개 날이 차면 일하기가 귀찮을 것을 생각하고서다.

그래 가히 큰 일을 치르고 났다 할, 안에서들은 매우 마음에 좋아서 아직도 김장을 담그지 못한 다른 가정에 비겨

"우린 춥기 전에 참말 일즉어니 잘 해치웠지."

하던 무던이나 다행하게 또 만족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김장이 끝난 날 옆집 아낙네가 말[마실]을 왔다가

"댁에선 참 일즉어니 잘 허셋서. 우린 아즉두 김장이 안 들어왔으니 인제 날은 출께구 걱정이에요."

하고 가만히 이맛살을 찌푸렸을 때 나의 아내는 가장 인사성 있게

"뭐얼요. 인제부터 허세두 너억넉허실걸. 어디 요새 같에선 날씨가 그렇게 쉽게 춥겠어요?"

그러한 말로 제법 그에게 위안을 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물론 '인삿말'이라 하는 것이다. 그는 사실 내심으로 어서 하루바삐(라도 내일부터라도) 날이 부쩍 추워지기를 바라마지 않는 듯싶었다. 이미 담궈 놓은 김치 깍두기를 위하여서도 그 편이 이로울 것은 물론이지만 모처럼 서둘러서 그렇게 남보다 일즉어니 해치운 터이니 이제 남들이 추운데 제법 고생하는 꼴을 보아야만 좀더 마음에 만족과 자랑이 클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우리 집 사람과 반드시 그 이해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 그렇지만 무어 김장을 담근대야 내가 바로 팔을 걷고 나서서 무 한 개 배추 한 통 만져 본 것이 아니니 남이 추위에 고생을 하거나 말거나 내가 느낄 별난 쾌감이라든 그러한 것이 있을 턱이 없다. 그야 그대로 춥지 않는 날이 계속하여 우리의 김치 맛이 좋지 않든지 그러할 것은 저으기 마음에 염려도 된다. 하지만 워낙이 몸이 약하여 남보다 유달리 추위를 타는 나는 역시 언제까지든 김치맛이라든 그러한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애를 태운다는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 집이 학생이 오랜 동안 농 속에 간수하여 두었던 활빙구滑氷具[스케이트]를 끄내어 연連해 손질을 하며

"이거 언제나 얼음이 언담. 무슨 겨울날이 이 모양이야."

하고 그러한 말을 한탄 비슷이 하였을 때 나는 가만히 쓴웃음을 웃고 내 아내와 학생에게는 전혀 비밀로 부디 이번 겨울은 이대로 여엉영 춥지를 말아달라고 이웃집 아낙네와 마음을 한가지하여 그러한 것을 빌어마지 않았다.

옆집 부녀婦女의 희망을 아주 쉽사리 이루어졌다. 그는 아직도 날씨가 춥지 않은 사이에 김장을 담궈버리는 것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언제까지든 그렇게 추위가 오지 말라 바라는 것은 바라는 이가 옳지 않았는지 모른다.

하늘은 물론 나 한 사람의 당치 않은 원망願望 같은 것을 이루 돌볼 까닭 없이 하룻날 눈을 날리고 물을 얼리고 그리고 바람도 제법 매섭게 추위는 그으예 오고야 말았다.

학교에서는 운동장 한모퉁이에 이미 활빙장을 만들어 준비가 되었다는 보도를 내게 하고 학생은 매우 마음에 만족한 듯싶다. 나는 어째서 공부는 하지 않고 그렇게 놀 생각만 하느냐고 그를 꾸짖어 물리치고 혼자 우울하게 방 속에 가 웅크리고 앉어 있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박태원, '에고이스트', 조선일보, 1937.12.)

 

 

▲ 대한뉴스 140호 (195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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