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약도熱河略圖No.2
1931년의 풍운風雲의 적적寂寂하게 말하고 있는 탱크가 한신旱晨[早晨]의 대무大霧에 적갈색赤褐色으로 녹슬어 있다.
객석客席의 기둥의 내부內部. (실험용實驗用 알콜램프가 등燈불노릇을 하고 있다)
벨이 울린다.
아해兒孩가 삼십년전三十年前에 사망死亡한 온천溫泉의 재분출再噴出을 보도報導한다.
(이상李箱, 『조선과 건축』, 1932.7.)
**
전차가 지난 뒤면 자동차가 지난 뒤면 으레히 잠깐 동안씩은 소리 없는 네거리의 아스팔트 위를 신문 배달부의 지까다비 신은 두 다리가 달려갔다.
그의 옆구리에 찬 방울이 시끄럽다.
석간이 배달된 뒤 두 시간.
호외다.
만주에 또 무슨 일이나 생긴 것일까? (박태원, '낙조', 1933.12.)
**
숭이가 정선을 기다리는 제일 플랫폼에서도 군대를 송영하는 제이 플랫폼 광경이 잘 건너다보였다. 정선이가 탄 열차가 경성역에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북으로 향할 군대 열차는 정선의 열차보다 십 분 가량 먼저 정거장에 들어왔다.
열차가 들어올 때에 송영 나온 군중은 깃발을 두르며 ‘반자이’를 부르고 중국 사람의 것과 비슷한 털모자를 쓴 장졸들은 차창으로 머리를 내어밀고 화답하였다. 송영하는 군중이나 송영 받는 장졸이나 다 피가 끓는 듯하였다. 이 긴장한 애국심의 극적 광경에 숭은 남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나라를 위하여 죽음의 싸움터로 가는 젊은이들, 그들을 맞고 보내며 열광하는 이들, 거기는 평시에 보지 못할 애국, 희생, 용감, 통쾌, 눈물겨움이 있었다. 감격이 있었다. 숭은 모든 조선 사람에게 이러한 감격의 기회를 주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전장에 싸우러 나가는, 이러한 용장한 기회를 못 가진 제 신세가 지극히 힘없고 영광 없는 것같이도 생각하였다.
이러한 일생에 첫 기회가 되는 용장하고 감격에 찬 생활의 생각을 하고 섰을 때에 정선을 담은 차는 콧김을 불며 굴러 들어왔다. 차창에서 서서 내다보는 정선의 적막한 얼굴이 번뜻 보였다. (이광수, 『흙』, 1932)
국호는 만주국滿洲國, 황지일각黃地一角에 4색을 둔 신新 5색기色旗, 당분간 공화제, 원수元首의 칭호稱號는 집정執政[푸이溥儀], 인선人選은 전 선통[청나라 말기 연호] 황제前宣統皇帝, 국도國都는 장춘長春, 연호는 대동大同, 이리하야 대동원년大同元年 3월 1일에 만주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3월 9일 장춘 신도新都에서 건국식建國式이 종료되었다. [장개석의] 남경 정부南京政府가 지상紙上 토벌령討伐令을 나리건 옌후이칭顔惠慶이 제네바에서 반대연설反對演說을 하건 만주국의 3원院6부部는 존재하고 있다.
3면파面坡 방면方面에 반길림군反吉林軍의 습격이 있어 일본군은 이를 진격하러 중동철도中東鐵道 남부선南部線을 이용하려 했으나 소련측의 반대로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 만주리滿洲里에도 폭동설이 있어서 군대파유설派遺說이 있다. 이리하야 일본군의 활동구역은 점차로 북만주 각지에까지 미치게 되는 모양이다. 이에 대하야 소련의 극동사령관 부류헬 장군은 소련이 극동에 군비軍備를 증가한 것을 승인承認하였다.
만주국의 첫 정사政事는 열국列國에서 승인을 구할 것인 바 일본이 솔선하여 이를 승인할 것은 불문가지나 기타 열국의 태도는 연맹총회의 결의안의 대세로 보아 쉽게 승인할 것 같지 아니하다.
연맹의 만주조사위원회는 2월말에 일본에 도착하여 10여일을 묵고 중국을 향하였다.
만주 중 길림성吉林省, 왕청汪淸, 화룡和龍, 훈춘琿春, 연길延吉 등의 4현縣으로 되는 간도 일대間島一帶를 특별행정구역特別行政區으로 되어 '조선인'의 자치구역自治區域이 된다고 한다. 이것도 만주국滿洲國의 행정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주요한, '내외대관, 국제동태의 조감도(2월-3월)', 『동광』, 19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