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는 마침내 다리 모퉁이에까지 이르렀다. 그의 일 있는 듯 싶게 꾸미는 걸음걸이는 그곳에서 멈추어진다.
그는 어딜 갈까 생각하여 본다. 모두가 그의 갈 곳이었다. 한군데라도 그가 갈 속은 없었다. 한낮의 거리 위에서 구보는 갑자기 격렬한 두통을 느낀다. 비록 식욕은 왕성하더라도, 잡은
잘 오더라도, 그것은 역시 신경쇠약에 틀림없었다. 구보는 떠름한 얼굴을 하여 본다.
취박臭剝 4.0
취나臭那 2.0
취안臭安 2.0
고정苦丁 4.0
수水 200.0
1일 3회 분복(分服) 2일분
그가 다니는 병원의 젊은 간호부가 반드시 '3삐스이'라고 발음하는 이 약은 그에게는 조그마한 효험도 없었다.
[...]
여자를 동반한 청년이 축음기 놓여 있는 곳 가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노는 계집 아닌 여성과 그렇게 같이 앉아 차를 마실 수 있는 것에 득의와 또 행복을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육체는 건강하였고 또 그의 복장은 화미(華美)하였고 그리고 그의 여인은 그에게 그렇게도 용이하게 미소를 보여 주었던 까닭에, 구보는 그 청년에게 엷은 질투와 선망을 느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뿐 아니다. 그 청년은 한 개의 인단 용기仁丹容器와 로도 목약目藥을 가지고 있는 것에조차 철없는 자랑을 느낄 수 있었던 듯 싶었다. 구보는 제 자신 포용력을 가지고 있는 듯 싶게 가장하는 일 없이, 그의 명랑성에 참말 부러움을 느낀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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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고개 너머를 갔으니 내일은 동막[현 마포구 용강동, 대흥동 일대]으루 해서 양화도루 해서 염창을 들르려면 들러서 영등포로 돌아 들어와야지."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심부름하는 아이를 부른다.
"저 너 지금 바쁘지 않느냐?"
"왜 그러세요."
"약 좀 내놔라. 저 영신환[소화제] 스물, 활명수[소화제, 동화약방] 다섯.... 사향소합환[토사곽란] 셋... 청고약[종기, 공애당약방] 큰 것 스물, 적은 것 서른..."
"그뿐이에요?"
"가만있거라. 저 참, 암마고약 열만 허구."
[...]
그래도 그 길을 얼마 안 가 조그만 양약국의 유리창 문을 척 열고 들어섰을 때 그의 얼굴에 웃음이 있었다.
그것은 단골손님에 대한 장사하는 이의 웃음이었다.
최주사는 역시 한 개의 매약 행상에 틀림없었다.
"퍙안하시오─"
말소리까지 명랑한 무엇이 있는 듯싶었다.
...
"그래두 요새 날씨가 고르지 않어 감기약들을 많이 찾을 텐데…… "
"어디 별루 찾는 것 못 보겠던뎅."
"그래두 앞으로 자꾸 쓰일 것이니까 넉넉히 준비해두드래도 손損은 없습니다…… 한 열 봉만 두시려요?"
"무얼?"
"감기약이지. 소연산이지."
"어유 그걸 다 뭘 해요…… 돈 요담번에 가져가셔도 좋다면 다섯 봉만 냅쇼…… 다섯 봉두 그걸 다 뭘 해…… "
"뭘 하긴, 파실 거지, 하하하. 자 그럼 다섯 봉…… 영신환은 몇 봉?"
"아직두 많어요."
"그럼 활명산? 채명산? 능치고?…… "
"다 있에요."
"아따, 이렇게 심하게 안 팔어주어야 어떡하우?"
"나두 받어놓기만 할 수 있습니까? 차차 팔리는 대루 말씀 여쭙지…… 참, 청고약이나 열만 허구 촌충약 셋만 주
수." (박태원, '낙조',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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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가자……."
경손이는 이내 잠자코 섰다가 불쑥 하는 소립니다.
이 기교 없는 기교에, 정말 아닌 노염이 났던 춘심이는 단박 해해합니다. 가령 정말로 성이 났었더라도 그러했겠지마는요.
"늦었는데?"
"괜찮아?"
"영감님?"
"그걸 핑곌 못 해?"
춘심이는 좋아라고 연신 생글뱅글, 사랑으로 들어가더니, 대뜰에 올라서서,
"영감님? 나, 집이 가봐야겠어요!"
합니다.
"오―냐!"
윤직원 영감의 허―연 수염이 미닫이의 유리쪽을 방 안에 가리며 내다봅니다.
"……누가 불르러 왔더냐?"
"네…… 우리 아버지가 아푸다구, 어머니가 왔어요!"
"그렇거들랑 어서 가보아라…… 거, 무슨 병이 났단 말이냐?"
"모르겠어요. 갑자기, 그냥……."
"그럼 무엇 먹은 게 체히여서 곽란이 났넝가 부구나?"
"글쎄, 잘 모르겠어요!"
"어서 가부아라…… 그리구, 곽란이거던 와서 약 가져가거라…… 사향소합환 주께."
"네." (채만식, 『태평천하』,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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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빈이는 먼저 영신환靈神丸 장사를 해 보았다. 학교에서 나오는 길로 저녁때까지 공원과 정거장과 음식점으로 다니며 팔면, 잘 팔리는 날은 하루 열봉은 팔았다. 열봉이면 삼십전이 남는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잘하면 일이원의 이익을 보는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학생은 한둘이 아니었다. '고학생 갈톱회'라는 것이 생겼는데 거기 회원만도 백여명이었다. 손님들도 이쪽에서 말하기 전에 '이제 방금 샀어'하고, 약봉지를 꺼내 보이었고, 음식점에서들은 귀찮다고 들어서지조차 못하게 하였다. 약도 팔기가 이내 힘들어졌다. 월사금 사원이 제일 급했다. 매달 초엿샛달 아침 조례 시간에는 으례 월사금 미납자들이 불려나가는데, 송빈이는 이축에 번번히 끼었고, 이축에 끼면 월사금을 가져 갈 때까지는 교실에 못 들어가는 법이었다. 책보 대신에 약봉지 뭉텡이를 끼고 이틀이고 사흘 나흘이고 사원돈을 채우러 나서야 한다. 한봉지에 삼전씩 남으니까 일백 사십봉지는 팔아야 된다. 열사람에 한 사람씩 사준다면, 잘 팔리는 세음이니 일백 사십봉지를 팔자면, 약을 사줄듯한 사람만 적어도 일천 사백명을 만나야 한다. 서울이 넓다하나 새 얼굴만 일천 사백명은 하루 이틀에는 어려웠다. 어디선지 분명히 청해봤던 사람이요, 혹은 어정쩡하여 모른척하고 모자를 벗고 약봉지를 내어 밀면,
"번번이 나만 맛이야?"
하고 재수 없다는 듯이 일어서 가 버리는 사람도 여러 번이었다. (이태준, 『사상의 월야』,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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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까지 죽기 기쓰고 기어들어와 턱 눕는 것을 보면 원재 어머니는,
"아이고 채선생님, 이러다간 큰 병 나시겠구려. 사람이 성허구서야 학원 집이구 뭣이구 짓지, 온 가엾어라. 아주 초죽음이 되셨구려."
하고는 영신의 다리 팔을 주물러 주고, 더위를 먹었다고 영신환을 얻어다 먹이고 하였다. (심훈, 『상록수』, 1935)
약방에 전교하였다.
"새로 지어들인 영신환(寧神丸)을 복용한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그러나 그 약 속에는 용뇌(龍腦) 1전(錢)이 들어 있다. 용뇌는 기운을 분산시키는 것이니 어찌 장복할 수 있는 약이겠는가. 더구나 지금처럼 추운 시기이겠는가. 요즈음 먹어보니 서늘한 느낌이 들어 좋지 않은 듯싶다. 의관들이 필시 오용하였을 것이다.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 [『선조실록』 217권, 선조40년 10월 26일 (16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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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자주 안질을 앓았다. 눈꼽은 안 끼고 눈만 새빨갛게 충혈되는 안질을 사람들은 궂은 피 때문에 생긴 풍이라고 말했고 그런 풍에는 굶주린 거머리를 잡아다가 흠빡 궂은 피를 빨리는 게 즉효라는 게 그 시절의 그 고장의 민간요법이었다. 대야를 갖고 다니면서 논이나 미나리밭에서 거머리를 잡아오는 건 나의 일이었다. 할머니는 눈꺼풀을 뒤집고 거기다 거머리를 붙이셨다. 실컷 피를 빨아먹은 거머리는 굼벵이처럼 몸이 굵고 꿈떠지면서 저절로 그곳에서 떨어졌다. 할머니는 아이 시원해, 아이 거뜬해, 하면서 할머니를 위해 거머리를 잡아온 나의 공로를 칭찬하셨다. 그러나 즉석에서 총기 있게 그 일을 할머니에게 상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를 내 편으로 만드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할머니는 희미하게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아이고 신통한 내 새끼, 할미 생각 끔찍이 하네. 할미도 이제 효녀 손주딸 둔 덕 좀 보세. 이제 서울 가면 신식양약을 사올텐데 뭣 하러 그까짓 거머리한테 뜯껴?”
그 때 할머니의 웃음은 뭔가 아뜩했다. 엄마도 부랴부랴 할머니의 말씀에 동의했다.
“그래요, 어머님. 대학목약이라는 안질약이 아주 신통하다더군요. 아이들 방학해서 내려올 때 꼭 사올게요”
우리 세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박완서, '엄마의 말뚝',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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