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렬은 마침내 책상 맞은편에 가서 형식과 마주앉았다. 형식은 또 돌아앉으려다가 차마 그러지도 못하여 청원서를 도로 내어주며,
"종렬군, 그러나 이것은 좋지 못한 일이외다. 무슨 이유를 물론하고 학생의 학교에 대한 스트라이크는 좋지 못한 일이외다"
하였다.
김종렬은 스트라이크라는 말의 뜻은 자세히 모르거니와 베이스볼에 스트라이크란 말이 있음을 보건댄, 대체 학교를 공격하는 것이어니 하였다. 그러고 청원서를 접으며 장중한 목소리로,
"아니올시다. 저의 모교 당국은 부패지극腐敗之極에 달하였습니다. 차제此際를 당하여 저희 용감한 청년들이 일대 혁명을 아니 일으키면 오히려 모교는 멸망할 것이올시다 하고 결심의 굳음이 말에 보인다. 형식은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이희경을 돌아보며,
"희경군도 의견이 그렇소?"
"녜, 어저께 하학 후에 삼사년급이 모여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이광수, 『무정』,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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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는 바로 집으로 가려다가 아직 밥도 아니 되었을 것 같고, 또 심사도 산란하여 이야기나 좀 하고 가려고 정선의 집을 찾았다.
“안 계신데요.”
하는 유월의 말을 듣고, 순례는,
“어디 가셨니?”
하고 물었다.
“저 잿골 서방님하고 경성운동장에 야구구경 가셨어요.”
하고 유월은 앞서서 길을 인도하며,
“들어오시지요. 인제 곧 돌아오실 걸요, 머."
하고 시계를 바라본다. 대청에 걸린 시계는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다.
(...)
‘행복은 오직 남자를 사랑해 보지 아니한 숫처녀의 것인가.’
하고 순례는 한숨을 지었다.
이때에 전화가 왔다. 유월이가 뛰어가 수화기를 떼어 들었다.
“어디세요? 네, 마님이세요? 네, 유월입니다. 네, 네, 손님 오셨어요. 네, 저― 저녁 잡수시고 오세요? 네, 이박사도 네시에 오셨다가, 저녁에 오신다고요. 그리고 또 저 심순례 아씨께서도 오셔서 기다리시는데, 네.”
하고 유월은 수화기를 순례에게 주며,
“아씨, 전화 받으시라고요.”
한다.
“아니 나 일 없다고. 어서 저녁 잡수시고 오시라고. 나는 간다고.”
하고 순례는 속으로,
‘오, 정선이가 김갑진이하고 베이스볼 구경하고 어디 밥 먹고 놀러 가는구나. 남의 아내가 그래도 좋은가.’
하고,
“나 간다.”
하고는 대문으로 걸어나갔다. (이광수, 『흙』,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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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차는 동대문을 돌아 경성운동장 앞으로 해서...... 구보는 차장대, 운전대로 향한, 안으로 파아란 융을 받쳐댄 창을 본다. 전차과에서는 그곳에 뉴스를 게시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요사이 축구도 야구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
제대로 잠을 못자고 5시30분에 기상. 아침을 먹고 네쉬빌행 6시 열차를 탔다. 서늘하고 시원한 아침공기 덕에 요새 축쳐진 정신이 회복되었다. 9시에 네쉬빌 도착.
11시 30분 260명의 학생들, 소녀들, 방문객들과 더불어 특별열차편-왕복티켓 1달러-으로 레버넌[미국 펜실베니아주의 도시]으로 V.U[밴더빌트 대학]와 C.U.[센트럴 대학]의 야구경기를 보러갔다. [...] 3시반에 시작하여 6시에 끝났는데 센트럴 대학이 밴더빌트대학을 10:9로 이겼다. 모두 낙담하고 목이 쉰 채 돌아왔다. 그렇지만 난 이 여행이 매우 즐거웠다. (『윤치호일기』, 1891년 4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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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선 야구 및 정구 대회가 오늘 오전 11시에 시작되었다. 조선은 너무 가난하여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야구팀을 유지하기 어렵다. 경성에는 불과 4개의 야구팀만이 있을 뿐이다. -휘문, 배재, 중앙과 C.C.C.- 조선에는 체육활동을 장려할만한 여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同, 1928년 5월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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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에 경성운동장에서 일본의 대학최강 게이오[慶應]대학과 서울의 최강 식산은행의 야구시합을 관람했다. 식산은행 유일의 조선 선수 이영민이 팬스를 넘기는 깨끗한 홈런을 날렸다. 일본인 관중들이 그에게 박수를 쳐주는 모습이 흐뭇했다. 게이오대는 거의 흠잡을 데 없는 경기를 펼쳐 4:1의 승리를 거두었다. 어쨌거나 내 관심은 온통 [양 팀을 통틀어] 유일한 조선 선수인 이영민의 놀라운 경기를 지켜 보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말로만 일본-조선의 우의 등속을 떠들지 말고 더 많은 조선인들을 자기들 팀에 영입하여 두 민족의 친선을 촉진함이 마땅하다. (同, 1930년 6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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