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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의 봄 (3)] 장충단 일대

category 영화와 경성 2021. 8. 5. 12:12

전 남소영前南小營의 유지遺址에 장충단奬忠壇을 세웠다. 원수부元帥府에서 조칙詔勅을 받들어 나랏일을 위해 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고종실록』, 1900.10.27.)


서울 중구 신당동 약수역 사거리에서 장충체육관 방향으로 야트막한 고갯길을 올라가다 장충체육관 못미쳐서 횡단보도 앞에서 좌편의 경사진 길을 보면  성곽이 끊어진 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성벽의 끊어진 자리에서 출발해 횡단보도를 넘어서 골목길로 접어들면 그 골목길(동호로20길)이 광희문과 동대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있던 곳이다. 동호로20길을 경계로 서쪽이 장충동1가, 동편이 신당동이 된다. 다시 횡단보도를 지나고 장충체육관을 지나서 가다 보면 동대입구역이 있는 장충체육관 사거리에 이른다.  등 뒤로 장충단공원과 호텔신라의 입구가 있는 사거리에서  태극당 앞을 지나 과거 동대문운동장(현재의 동대문 DDP)과 청계천(오간수문), 동대문으로 향하는 장충단로를 확인할 수 있다. 장충단로를 경계로 하여 (정확히는 남소문동천을 경계로) 장충단1가(동사헌정)와 장충단2가(서사헌정)가 나뉜다. 이 장충단로를 따라 일제강점기에는 동대문운동장(일제강점기 당시 경성운동장)에서 분기하여 장충단공원앞까지 전차선로(1926)가 부설되어 있었다. 이 선로의 역할은 2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1920-30년대 주택단지(문화주택)가 개발된 동사헌정과 서사헌정에 거주하는 부민들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충단공원 이용객들을 위한 것이다.  

 

▲ 박문사 정문(흥화문) 밖으로 보이는 동사헌정(장충동1가)과 서사헌정(장충동2가) 일대 주택지 (반도의 봄, 1941)

 
장충단이 조성되기 전만 해도 장충단 일대는 지극히 평범한 교외의 전원이었다. 성벽에 붙어 있지만 도성내에 위치했던 장충단 일대는 교외라고 불렀다. 1900년 이전까지는 경성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던 농촌이었을 것이다. 장충단 건립 이후 장충단이 공원화(1919)되고 현재의 장충동 1,2가의 구릉지에 주택지(1920-30년대)가 개발되고, 장충단공원 동편 남산 자락에 박문사(1932)가 세워지면서 장충단 일대는 일약 경성인들의 주목을 받는 곳이 되었지만 30년대초까지만 해도 여전히 교외로 인식되었다. 

장충단으로, 청량리로, 혹은 성북동으로…… 그러나 요사이 구보는 교외를 즐기지 않는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

'반도의 봄'에서는 많은 씬을 할애해 장충단 일대를 보여주고 있다. 박문사 석고각(박문사 본당은 등장하지 않는다)과 주변의 풍광, 남산자락에서 청계천으로 흐르던 지류인 남소문동천을 이용해 조성한 개울가와 다리, 등나무로 꾸며진 쉼터 등 장충단공원 일대를 배우들의 동선을 따라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장충단 씬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춘향전 주인공 안나의 촬영펑크로 스탭과 배우들이 박문사 본당에서 계단을 따라 철수하는 씬이다. 배우와 스탭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박문사 본당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데 이 장면을 통해서 당시 신흥 주택지(문화주택)로 각광을 받고 있던 동사헌정과 서사헌정의 풍경이 드러난다. 경성에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문화주택 거주자들과 급료를 제떄 받지 못하고 합숙소에서 불안한 하루하루를 지내는 배우와 스탭들의 처지를 대비해 보여주는 장면처럼 볼 수 있다. 

 

▲ 장충단다리위에서개울가를내려다보는영일과안나 (반도의 봄, 1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