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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의 봄 (8)] 춘향전의 상영

category 영화와 경성 2021. 8. 14. 09:21

주인공 여배우의 중도하차와 자금난, 영화제작자의 구속과 병환 등으로 어려움에 처했던 영화 춘향전의 제작과정은 강력한 후원자를 만나 마침내 완성을 보고 감격적인 상영에 들어간다. 영일도 병원에서 춘향전의 상영 소식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된다.   첫날부터 인파가 몰려들고 춘향전은 흥행 성공의 길로 가게 된다. 


지난했던 춘향전의 촬영이 끝나고 상영을 위한 준비과정이 영상에 펼쳐진다.  수원 화성 방화수류정(오류정 장면)을 배경으로 찍은 다양한 포스터, 유인물이 만들어져 길거리 상점 쇼윈도에 배치되고 극장에는 춘향전 상영을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린다. 상영 당일에 극장에 입장하기 위해 많은 손님들이 극장을 에워싸고 끝도 없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극장의 전체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당시 개봉관에서 '반도의 봄'을 보러 온 관객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곳이다.  춘향전이 상영되는 극장으로 설정된 곳은 바로 '반도의 봄'이 상영된 명치좌이기 때문이다. 

 

▲ 반도의 봄 1941년 11월 7일 명치좌에서 개봉 (매일신보, 1941.11.8.)

 

명치좌는 명치정이 경성의 유흥 문화중심지로 부상하기 시작한 1936년에 개관한 다목적 극장으로 1500명의 관객을 수용하여 당대 조선 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명치좌에서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은 영화 춘향전이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 받았다는 것이고 출연한 배우, 스탭들에게 밝은 미래가 열리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 명치좌 입장을 위해 줄지어선 관객들 (반도의 봄, 1941)

'반도의 봄'은 친일 영화로도 알려져 있다. 영화를 보면 조선인들 사이에도 일본어가 많이 쓰인다는 점, 영화 춘향전의 완성에 일본 자본이 도움을 주었다든지 제작자 영일과 정희가 결혼 후에 선진 영화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다는 등의 설정이 친일에 해당된다고 보는 듯하며 상당부분 사실에 부합하는 주장이다. 그런데 '반도의 봄'은 해방후에 국내에서 재상영된 적이 있다. 1949~1950년 사에 서울 수도극장(스카라)에서 제목을 '아름다운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상영된 것이다. 서울 뿐만 아니라 부산(부민관), 대구(송죽극장), 광주(시민관)에서도 개봉되었다. 영화가 개봉된지 8년이 흐른 뒤 친일 논란에도 불구하고 '반도의 봄'이 다시 상영이 된 것은 당시 국산 영화로서는 작품성이 높았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할 수 있으며,  친일논란이 있음에도 영화가 만들어지던 시대의 시국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용납하는 분위기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 '아름다운 청춘'으로 해방후 재상영된 '반도의 봄' (경향신문, 1949. 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