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아내 긴슈쿠(문예봉 분)에게 기별도 하지 않은 채 세키(남승민 분)는 끝내 지원병으로 입대한다. 훈련소 정문에는 '조선총독부육군병지원자훈련소'라는 명패가 달려 있다. 이 훈련소는 징집제로 전환한 1944년 이후 조선총독부군무예비훈련소가 되었고  해방 후에는  '(남)조선국방경비대', ' 조선경비사관학교', '육군사관학교'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진은 해방후에 신설된 조선경비사관학교 정문의 모습이다. 정문의 치장벽돌 오른편 기둥에 '조선경비제일연대'라는 명패가 달려 있다. 정문에서 일직선 위치에 일제강점기 당시 훈련소의  본관으로 쓰였던 건물이 보인다. 

 

▲ 영화 '조선해협' 중 연병장에서 훈련중인 훈련생들

위의 사진은 '조선해협'의 한 장면이다.  훈련생들이 훈련하고 있는 남쪽 연병장에서 바라볼 때 북쪽 불암산을 배경으로 하여 훈련소의 숙사宿舍,  본관 후면, 대강당, 교사敎舍 등의 건물이 펼쳐져 있다. 또한 연병장에 바투 붙어 있는 여러 채의 단층 부속건물들(창고 등)도 확인할 수 있다. [각주:1]

 

사진에서 맨 왼쪽 이층 건물은 훈련생들이 수업과 훈련 이외의 시간 동안 생활하는 '숙사'이다. 숙사 중에 최초로 완공된 건물로 숙사가 여러채 들어서면서 1호병사一號兵舍로 칭해진 듯하다. 훈련생의 급증으로 숙사는 1호병사 왼쪽(서쪽) 방향으로 7호병사까지 지어졌다.  1938년에는 당시 경기도 양주군 공덕리에 훈련소를 지정하고 공사에 들어가는 때여서 최초의 훈련생들은 경성제국대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1939년 3월에야 공덕리 훈련소가 완공되었다. 이떄까지만 해도 숙소는 2층짜리 1호병사 건물 한 동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1940년부터는 6개월에서 4개월 단위 교육으로 바뀌었고 매 기수의 훈련생의 숫자가  1000여 명 수준까지 크게 늘어 추가적으로 숙사들을 짓게 되었다. [각주:2]  사진에서 가운데 건물은 단층으로 된 대강당이다.[각주:3] 대강당은 밤 시간에도 교육이 시행되었고 일과상으로 토요일 밤에  회식이 제공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각주:4] 

위의 사진에서 맨 오른쪽 건물은 '교사'이다. 원래는 단층으로 지어졌으나 훈련생의 규모가 크게 늘어나면서 가로와 세로로 크게 증축되었다. 이 건물의 여러 교실에서 국어, 국사, 지리, 수학, 이학 등의 보통과목과 정신교육에 중점을 둔 교련과목으로 교실 수업이 실시됐다. 또다른 장면에서  훈련생 동료와 함께 간이 식당에서 빵을 먹고 나온  세키가 야외에서 휴식을 취하며 동생 기요코(김신재 분)의 편지를 읽는데 그 배경이 되는 건물(오른쪽 사진 참조)이 훈련소 교사이다. 

영화에서는 간이 식당(위치 불명)에서 세키가 동료훈련생(최운봉 분)과 자유롭게 대화를 하며 취식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이곳에서는 목요일과 일요일에  빵 종류의 간식을  판매했다. 훈련생들의 평일 점심시간을  참관한 이태준에 따르면 한 학급에 3인이 정량 배식을 하고 반원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이타다키마스'라고 감사인사를 한 후 밥 한 톨도 남김 없이 식사를 했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평소에는 자유로운 식사 풍경은 아니다.  [각주:5] 

한편 1938년에 제정된 '조선총독부육군병지원자훈련소생도 채용규칙'에 따르면 훈련소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17세 이상으로 신장은 155cm 이상, 소학교 4년 이상의 학력, 본인 입대시 가족의 생계에 이상이 없는 자 등 당시로서는 쉽지만은 않은 조건이 붙어 있었다. 법 대로라면 세키도 가정이 있고 태어날 자식도 있었기 때문에 가족 생계 사유로 입대가 불허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각주:6] 훈련소 경쟁률도 매우 높아서[각주:7] 1940년에 3차례의 모집 결과를 보면 지원병 응모자가 8만여 명이나 되었고 이중 3천명[각 기수별로 1000명]이 훈련소에 입소하였고 최종으로 1000명[훈련소 수료자 중 1/3 수준]이 현역에 배치(만주 전장 등에 파견)되고 나머지 인력은 보충역에 편재(수료 후 귀가조치)됐다. [각주:8]

  1.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서 여러 도면들을 참조하였으나 설명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본문으로]
  2. 1939년 5월초 일본 육군성에서 열린 사단참모장회의에서 '조선의 방공시설'의 시급한 정비 필요성과 함께 1938년의 지원병 훈련소 운용결과가 만족스럽다는 판단에 따라 지원병 모집을 크게 확대한다는 결정이 내려지면서(조선일보, '조선특별지원병 내년엔 증모 예정', 1939, 5.14) 기수당 200~300여 명 정도를 수용하는 훈련소는 숙사, 교사 등의 시설에 대해 긴급한 확장이 불가피해졌다. 이에 따라 원래의 훈련소 시설 계획은 상당히 수정되고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1940년 10월 12일 춘원 이광수, 상허 이태준 등의 문인 일행이 훈련소를 방문했을 당시에도 증축공사가 한창이었고 좁은 시설에 정원 이상의 인원이 수용되었다(이태준, '지원병훈련소의 일일', 문장 1940.11.) [본문으로]
  3. 자세히 보면 외관상 거의  같은 건물이 두 채가 보이는데 연병장쪽으로 가까운 건물이 대강당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4. 이태준, 같은 글 [본문으로]
  5. 이태준, 같은 글 [본문으로]
  6. https://url.kr/xtovs2 [본문으로]
  7. 명목상으로는 '지원'이었지만 전국적인 모집인 관계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청년들이 반강제적으로 응시를 한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표영수 (2008),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원병제도 연구', 숭실대 박사논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