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후 긴슈쿠는 에이코가 일하는 노다피복공장에 취직하는 한편 세키와 살던 셋집을 정리하고 노다피복공장의 여직공숙소로 들어간다. 4개월의 훈련을 마친 세키는 동료 지원병들과 입성하여 시가행진을 마치고 출정하기에 앞서 귀가해 본가의 가족과 상봉한 후 기요코가 알려준 주소로 긴슈쿠를 찾아나선다. 공장에서 일하던 긴슈쿠가 연락을 받고 황급히 숙소로 돌아오지만 세키와 길이 엇갈리고 끝내 둘은 만나지 못한다.
노다피복공장의 실제 여직공 숙소는 권농정 187번지에 있었다. 영화에서 여직공 숙소의 주소는 '광희정 1정목'(기요코가 오빠 세키에게 알려준 위치)에 있고 숙소이름은 '광희장'(숙소의 푯말)이다. 그런데 긴슈쿠를 찾아온 세키의 동선을 좇다 보면 영화에서 여직공숙소를 모델로 한 촬영지는 뜻밖의 장소가 나온다. 그곳은 당시 경성에서 고급주택지로 이름이 높았던 송현동 1松峴洞[송현정] 식산은행 사택지舍宅地이다.
영화에서 긴슈쿠를 만나지 못한 세키는 숙소 주변을 빠져나와 큰 길쪽으로 걷기 시작하는데 왼편에 대궐집의 긴 행랑과 대문이 보인다. 이 대궐집은 안국동 초입(감고당길)에 있던 안동별궁이다. 특히 영화 화면에서 보이는 모습은 3층 솟을대문으로 된 별궁 대문이다. 안동별궁은 이미 1937년경에 당시 동일은행 두취 민대식과 금광왕 최창학에게 분할 메각된 상태였지만 1943년 현재 안동별궁의 외관은 크게 바뀌지 않은 듯하다. 사진에서 세키를 중심으로 왼쪽이 안동별궁을 포함한 안국동이며, 오른쪽이 송현동이다. 안동별궁의 위치에서 세키의 동선을 되짚어 보면 긴슈쿠가 거주하는 여직공숙소 주변으로 묘사된 곳이 송현동 식산은행 사택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식산은행 사택지는 조선식산은행이 1920년경 순종의 외척이자 세력가였던 윤덕영으로부터 송현동 일대의 땅을 사들여 조성한 주택지이다. 안국동과 송현동 사이의 골목 초입에서부터 양편으로 담장이 길게 이어진다. 이중 송현동쪽의 담장 사이 사이의 경사진 통로나 담장에 붙어 설치된 계단(첫번째 사진 오른쪽)을 통해서 식산은행 사택지에 접근할 수 있다. 북쪽으로 북악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수려한 경관을 바탕으로 각각의 식산은행 사택은 담장으로 에워싸이고 각 담장에는 조경이 잘된 나무들이 도심 속의 전원주택 느낌을 주는 인상적인 문화주택이었다. 2
당시 경성에 거주하는 고급엘리트들 3의 주택지가 피복공장 여직공숙소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은 다소 의아하다. 4세키와 긴슈쿠가 서로 엇갈리는 장소로 등장하는 송현동 식산은행사택지임을 비교해볼 수 있는 유일한 사진이 다음의 기사내용과 함께 1924년에 동아일보에 게재돼 있다.
송현동 일대는 식은사택이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경성의 몰락을 알 것이 아닙니까. 이 집의 전신은 부원군보다도 대갈장군으로 유명한 윤택영씨의 집이 되어 들썩들썩하였으나 형제가 시세면서 너무 과분하게 떠들고 지낸 까닭인지 이 집을 지니지 못하고 학생기숙관으로 세를 놓아 먹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식산은행으로 들이밀고 말았습니다. 식은에서 이 부근의 팔천오백여 평을 사서 헐고 미국에서 유행하는 근대식으로 34채의 굉장한 사택을 짓기에 3년의 세월과 70만원의 금액이 들었다 합니다. 붉은 지붕만 보고 감옥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속에 들어가 보면 이상적으로 된 문화주택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집은 뉘 돈으로 지었을까요? 쓰러져가는 초가집 옆에서 사는 그네들[식산은행 사택에 사는 사람들]도 좀 미안한 생각이 있으리다. 경비를 절약하느라고 하급행원을 도태하면서 정원들 앞에는 괴석과 화초가 하나씩 늘어감도 이상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사택으로 덕본 것은 안국동 전차가 속히 된 것이라 합니다. (후략) 5
'경성의 몰락'으로 표현할 만큼 송현동 식산은행 사택지는 당시 여타의 북촌 조선인 주택지와는 확실하게 차별화된 장소였던 듯하다. 종로네거리에서 식산은행사택지 앞까지 전차가 부설(1923)되고 준공 단계에 있던 조선총독부 앞까지 도로(1924)와 전차(1929)가 정비되어 장차 종묘와 창덕궁을 관통하는 도로(현재의 율곡로)의 시발점이 되었다. 1920년대초에 선도적으로 개발된 송현동 식산은행 사택지는 이후 북촌 일대를 중심으로 한 경성의 부동산과 문화주택 개발붐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 그런 가운데서도 서청[서북청년단]의 제1합숙소로 둔갑한 호림장은 규모로 보나 엮어낸 사건기록으로 보나 단연 빛나는 존재였다. 이곳은 일정 때 야전野田 피복공장 여직공숙소(종로구 권농동 187)로 사용하던 것을 김흥배 씨가 인수하여 임시정부 특파사무국으로 제공함으로써 청년운동의 요람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경향신문, 1986.12.24.) 기사 내용 중에 김흥배가 노다피복공장의 여직공숙소를 매입해 귀국한 임시정부 요원들에게 제공했다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 이 숙소 역시 본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김흥배는 임정요원이었던 해공 신익희의 행정연구반에 노다피복공장 본사를 제공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본문으로]
- 서 참의가 늘 지나다니는 식은관사殖銀官舍에는 울타리가 넘게 피었던 코스모스들이 끓는 물에 데쳐 낸 것처럼 시커멓게 무르녹고 말았다. (이태준, '복덕방', 1937) [본문으로]
- 조선 전체에서 조선식산은행의 조선인과 일본인 은행원 비율은 1945년 기준으로 3 : 4 정도였다고 한다. 정병욱, '조선식산은행 일본인 행원의 식민지 기억', <사회와 역사> 91권, 2011. [본문으로]
- 주거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여직공숙소나 식산은행 사택이나 동일한 기능을 하는 사택이라는 점에서 촬영지로 선정된 듯하다. [본문으로]
- 이용구, '송현동 식은촌', 동아일보, 1924.6.2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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