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그대로 매일같이 줄기차게 내렸다. 아이들을 가진 집안에서는 병원과 약국에, 출입이 잦았고, 사람들은 차차 너무나 지리한 장마에 멀미가 나기 시작했다. 삼남지방의 수해와 전선 몇 군데의 일시적 철도 불통이 얼마동안 신문의 사회면을 가장 중요하게 점령하고 있었다. [1936] (박태원, 1989, 『천변풍경』, 깊은샘, 193쪽)
▲동아일보 1934년 7월 24일자
▲동아일보 1934년 8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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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윤직원 영감은 그래도 곧잘 기부는 하는 셈이지요. 시골서 살 때엔 경찰서의 무도장(武道場)을 독담으로 지어 놓았고, 소방대에다가 백 원씩 오십 원씩 두어 번이나 기부를 했고, 보통학교 학급 증설 비용으로 이백 원 내논 일이 있었고, 또 연전 경남 수재 때에는 벙어리를 새로 사다가 동전으로 일 원 칠십이 전을 넣어서 태식이를 주어서 신문사로 보내서 사진까지 신문에 난 일이 있는걸요. 그 위대한 사진 말입니다. (채만식, 『태평천하』,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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